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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그리운 할머니,
올겨울 한국은 55년 만에 찾아온 한파로 몹시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들었어요. 한파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할머니가 계신 곳까지 추위가 파고드는 것 같아 제 마음 또한 얼어붙었어요. 밤이 찾아와 보드라운 이불로 몸을 감싸고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순간에는 문득 할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물론 할머니께서 들으시면 당치도 않은 이야기라며 저를 꾸짖으시겠지만, 할머니를 땅에 묻고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올해 할머니 생신 전 날밤, 우리는 꿈에서 만났어요. 노을이 바라다보이는 마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죠.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어찌나 기뻤던지 몰라요.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과일을 먹으면서 제가 자꾸 쏟아지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걸 보시던 할머니께서 신경이 쓰이셨는지, 손으로 제 앞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기시며 할미가 앞머리를 잡아줄 테니 어서 더 먹으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 팔 아프니까 그냥 두시라고 제 앞머리를 잡고 계신 할머니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할머니 손의 감촉이 어찌나 따뜻하고 부드럽던지 너무 좋아서 손을 계속 잡고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제가 앞머리를 정리해서 묶은 모습을 보신 할머니께서 "이러니까 우리 수미 이쁘고 참 반듯하게 생겼다" 하시며 흐뭇해하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손깍지를 한 채 하늘의 석양을 함께 바라보았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꿈이 너무 생시 같다 보니 오히려 할머니께서 곁에 안 계신 현실이 더 큰 슬픔으로 밀려왔어요. 아직도 남아있는 할머니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 저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할머니, 저는 하루도 할머니 생각을 안 하고 보내는 날이 없어요. 매일 밤 할머니 앞으로 편지/일기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이 저에게는 가장 평온한 시간이며 치유의 시간이에요. 할머니께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지금 읽고 있는 책 내용을 알려드리고, 가족들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 결국은 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할머니께 보내는 편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제가 할머니한테 꿈에 나와달라고 조르는 대목일 거에요. 할머니는 맨날 들으니까 이제 귀찮으시겠지만, 그래도 전 아주 신성한 마음으로 매일 밤 기도하듯 할머니께 애원하는 거 아시죠?
할머니, 한국에서 장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순간은, 매일 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리던 한국 시각 오전 9시를 맞이할 때였어요. 다이얼만 누르면 바로 할머니와 연결해주던 고마운 전화기는 상실과 애도의 상징이 되어 매일 저녁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천 수만 번 전화기를 들어도 더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어요.
사랑하는 할머니,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제 말 기억하시죠? 저는 늘 할머니와 함께 있어요. 얼마 전에 선지식께서 제 안부를 물으시길래, 감사하게도 할머니를 꿈에서 뵐 수 있어서 심적으로 위안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누군가를 많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면 꿈에서 자주 만나는 거라면서, 할머니도 제 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저는 크고 작은 집착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됐어요. 그 점이 할머니께서 떠나신 후 제 삶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진 해방감은 제 인생관에 큰 울림을 남기게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마음공부가 많이 부족한 저는 제 삶에 대한 집착은 버렸지만, 할머니의 삶에 대한 집착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82세 생신을 저희와 함께 맞이하시지 못함이 너무나 애달프고, 슬프고, 안타깝고, 화가 나요. 할머니, 제가 살아 숨 쉬는 한, 할머니의 생신을 매년 함께 축하해 드릴게요. 먼저 가신 할머니께 넋두리하며 저도 나이를 먹어가겠죠. 그래도 할머니 저는 정말 감사할 뿐이에요. 할머니 손녀로 태어나서 할머니를 사랑하고 할머니께 사랑받았고, 할머니 목소리를 하루에 한 번 들을 수 있었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고, 돌아가신 후에도 할머니를 꿈에서 자주 뵐 수 있고, 눈을 감으면 할머니를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할머니, 올해는 랄라가 한글을 모두 익혀서 금강경을 저와 같이 독송했어요. 할머니께서 들으시면서 웃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저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나의 사랑 할머니, 변함없이 저를 지켜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손녀로 살아갈게요. 그리고 저에게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소중한 할머니의 여든두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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