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0일 

몇 일째 촉촉한 봄비가 내린 덕에 텃밭의 채소들도 한층 더 싱그러워졌다. 매일 저녁 텃밭에 물 주는 건 원래 랄라의 몫이었는데, 랄라는 고마운 비 때문에 며칠간 놀 수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 것이다. 

다음 달이면 랄라와 본격적인 한글 공부를 시작한 지 꼬박 일 년이 된다. 요즘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글을 재미있게 익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 중이다. 월-목 까지는 사실상 랄라의 학교 공부만으로도 너무 바빠서 한글 공부까지 끼워 넣으면 랄라가 하루에 두 시간도 채 못 놀게 된다. 물론 한글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인 랄라에게 그 시간마저 빼앗아 억지로 책상에 앉혀놓고 싶은 생각은 없기에, 우리 집은 매주 금/토/일이 "한글날"이다. 

이제는 받아쓰기도 제법 잘하고, 듣기 실력도 훌륭한데, 아직도 ㅆ (쌍시옷) 발음이 어설퍼서 나에게 자주 지적을 당하는 랄라. 매일 읽기 쓰기만 하게 되면 가르치는 나도 배우는 랄라도 재미가 없어서, 이제는 같이 영화나 다큐도 보고, 랄라 또래 아이들이 나오는 '붕어빵' 방송 프로그램도 시청하고 있다. 지난주 랄라랑 '붕어빵'을 보다가 "이럴 때 나 우리 엄마 아빠가 창피해요"라는 주제가 나와서 랄라 한데 같은 질문을 해보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엄마: 랄라야. 랄라도 엄마 아빠가 창피할 때 있어?

랄라: 그럼요. 당근 있죠.

엄마: 그럼 한번 이야기해봐.

랄라: 아빠는 헤어컷이 너무 촌스러워서 아빠 친구 피터 아저씨처럼 멋있게 바꿨으면 좋겠고요. 아빠는 맨날 랄라가 말 안 들으면 랄라 학교에 와서 벨리댄스 춘다고 해서 정말 창피해요.

엄마: 그래? 그럼 랄라는 아빠가 머리를 좀 더 스타일리시하게 하고 다니셨으면 좋겠구나? 왁스도 좀 바르고... 그지?

랄라: 그래요. 그러려면 일단 아빠 헤어스타일을 바꿔야 돼요. 엄마가 아빠 한데 말 좀 해보세요.

엄마: 그래. 그러지 말고 엄마랑 랄라랑 같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아빠가 벨리댄스 춘다는 건 상상만 해도 재미있잖아. 엄마는 아빠가 그 이야기하면 귀엽던데...

랄라: 엄마!!! 그건 재미있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아요. 만약에 아빠가 우리 학교 카페테리아에 들어와서 이마에 "랄라 아빠"라고 크게 붙인 뒤, 배 다 내놓고 벨리댄스 춘다고 생각 좀 해 보세요. 그게 재미있어요? 엄마 그건 정말 나한데 창피하고 최고로 싫은 일이에요.

엄마: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랄라가 아빠 말씀 잘 듣고, 착한 어린이 하자. 그러면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야. 아직까지 아빠가 한 번도 랄라 친구들 앞에서 벨리댄스 정말 추시지는 않았잖아. 근데 랄라야. 혹시 엄마가 창피할 때도 있어?

랄라: 있어요. 엄마는 스쿨버스가 도착할 때 가장 앞에 서서 두 팔을 앞에 모으고 너무 간절하고, 기대되는 모습으로 항상 웃으면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전 그게 창피해요. 그냥 다른 엄마들처럼 좀 뒤편에 서서 쿨한 표정으로 제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지켜만 보고 계시면 안 돼요?

엄마: (순간 만감이 교차함. 너무 당혹스러워할 말도 잃음)

랄라: 엄마. 엄마. 엄마 왜 그래요? 내가 엄마 맘 아프게 했어요? 엄마 슬퍼서 그래요?

엄마: 어... 아니... 엄마는 랄라가 그걸 창피해하는지 몰랐었어. 정말 몰랐었어. 엄마는 그냥 랄라가 무사히 학교에 잘 다녀온 게 너무 다행스럽고, 얼굴 빨리 보고 싶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얼굴 표정을 하고 제일 앞에서 기웃거리면서 널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정말 몰랐어. 우리 랄라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랄라야. 으앙!!!!!!!!!!!!!!!! (여기서부터는 엄마의 감정 컨트롤 무너짐. 그냥 대성통곡)

랄라: 엄마. 알았어요. 월-목요일 까지는 계속 그렇게 웃으면서 제일 앞에 서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대신 금요일에만 좀 뒤편에 서서 계세요.

엄마: (슬프지만 왜 금요일만 안되는지 궁금해서 눈빛은 반짝이는 나) 왜? 랄라야? 금요일은 왜?

랄라: (한숨을 내쉬며) 그날 가장 많은 아이들이 버스를 타거든요.

엄마: (웃음을 참으려 하나, 참을 수 없는 나) 푸하하하!!!! 랄라야. 너 정말 대박이다. 아구. 내가 이래서 널 사랑한다. 이 와중에 할 말 다 하는 우리 랄라. 넌 정말 재밌는 아이야. 그래 알았어. 엄마가 쿨하게 앞으로 버스 정거장 가장 뒤에 서서, "WASSUP YO!" 하고 손인사만 해줄게.

랄라: 엄마!!!!!!!!!!!!!!!!!!!!!!!!!!!!!!!!!!!!! WASSUP YO! 가 뭐예요? 엄마 제발. 엄마 그러지 마요. 엄마. 그냥 엄마 하던 데로 제일 앞에 서서 저 내리면 너무 행복한 얼굴로 와서 안아주세요. 월. 화. 수. 목. 금. 매일매일 그렇게 하세요. 엄마 제발. 쿨하지 않아도 되니까... 엄마...

엄마: 그래? 그건 랄라 생각이고, 엄마는 쇼크 받아서 이제 쿨한 엄마로 거듭나려고. 엄마 한번 하면 한다는 사람이잖아. 알지? 다음 주 월요일 기대해. ㅋㅋㅋ

엄마: (랄라의 표정을 살펴보니, 더 할 말이 남아있는 듯) 랄라야. 다른 말 뭐 할 거 있어?

랄라: 엄마. 그리고 창피한 거 하나 더 있어요.

엄마: 뭐라고~~~!!!!!

랄라: 엄마. 엄마는 구쉬구쉬한거 잘 아는데, 나도 엄마가 구쉬구쉬해서 좋은데, 앞으로 슈퍼에 장 보러 가거나 서점이나 가게 같은 사람 많은 곳에서는 저한데 너무 구쉬구쉬 하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집에서는 계속 구쉬구쉬 하세요. 친구들 앞에서 구쉬구쉬한거도 괜찮아요. 근데 공공장소에서만 좀...

엄마: (이제는 거의 망연자실)

<참고> 구쉬구쉬라는 말은 나도 이날 처음 들었는데, 난 단박에 알아차렸음. 분명히 내가 랄라에게 하는 애정표현을 이야기하는 듯. 꼭 안아주거나, 볼에다 뽀뽀해주거나, 엉덩이를 토닥여주거나, 코를 비비거나 하는 행위.

엄마: (독백) '한 마디로, 사람들 앞에서 애 취급하는 거 그만둬 달라 이 얘기 아님?' (한 숨을 한 번 길게 내뱉은 뒤) 그래. 랄라야. 엄마 눈에는 자꾸 랄라가 세 살 아기로 보여서 같이 다니면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에 오버했나 보다.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구쉬구쉬한 행동 안 할게. 알았어. (근데 또 여기서 감정 컨트롤 망가짐. 랄라 아기 때 사진 한 장을 부여잡으면 대성통곡하는 나.)

랄라: 엄마. 미안해요. (결국 랄라도 울음이 터짐) 

이 이야기를 꼭 일기로 남기고 싶었던 이유는 누구나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머리로는 이해하되 이 기분을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 겪었을 것이고 곧 겪게 될 순간. 처음이어서 나에겐 더욱 당혹스럽고 속이 아리던 경험. 

하지만 랄라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한 바탕 실컷 울고 나니 시야가 맑아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 일을 일주일이나 지난 뒤에 글로 남기는 이유도, 내 마음을 추스르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일 날에는 너무 울었어서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일주일 내내 되뇌고 있다. 

'랄라는 성장하고 있다. 랄라는 더 이상 세 살 꼬마가 아닌 아홉 살이며 초등학교 4학년이다. 랄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변화하는 랄라를 사랑으로 관찰하고 함께 성장해야 한다. 구쉬구시한 엄마도 물론 좋지만, 앞으로 눈부신 성장을 할 우리 랄라를 평정심을 가지고 지켜보려면 나 또한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깊어져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사랑이다.' 

먼 훗 날, 랄라가 이 일기를 읽으면, 울다가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난 랄라에게 네가 그날 엄마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마웠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랄라가 한 아이의 엄마가 돼서 이 일기를 읽는다면 랄라는 더 많이 울 지도 모른다. 왜냐면 랄라 자신도 구쉬구쉬 엄마가 되어있을 테니까. 랄라야, 널 사랑한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엄마는 랄라의 엄마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