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8일 

중국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미 장마가 시작되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밤새 내리는 며칠 동안 랄라가 여독이 쌓였는지 배앓이를 했다. 몸이 아파 누워 지낸 랄라를 돌보느냐 귀국 후 시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는데, 오늘은 랄라가 조금이나마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아 아침 일찍 함께 시댁으로 향했다. 손녀 보고 싶은 마음은 친정이나 시댁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기에, 나는 최대한 양가분들과 공평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맑게 개인 일요일. 랄라와 함께 어머님 아버님께 드릴 도넛을 고르고, 지하철에서 마실 따뜻한 커피도 한 잔 구입한 뒤, 북적이지 않는 지하철을 타고 일요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한다. 간혹 가다 배가 아프다는 랄라의 배를 쓸어주기도 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손에 감싸고 있던 따뜻한 커피 컵을 아이 배 위에 살짝 올려놓아 본다. 아픈 배가 좀 나아지면 랄라의 끊겼던 수다가 다시 시작되고,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도착한 시댁. 아픈 랄라 걱정으로 며칠 사이 더 야위신 아버님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아프다. 당신 얼굴 반쪽 되신 건 생각 안 하시고, 랄라가 핼쑥해졌다고 자꾸만 속상해하시는 아버님. 그래도 이렇게 손녀 얼굴을 보시니 조금은 안심이 되시나 보다. 주방에서 배가 아픈 랄라를 위해 열심히 흰 죽을 쑤시는 어머님의 뒷모습도 정겹다. 서둘러 한 술이라도 랄라에게 먹이시려고 어머님은 분주하게 움직이시고, 아버님은 아이 돌보느냐 우리 며느리도 살이 빠졌다며, 자꾸자꾸 먹어야 한다고 나에게 여러 차례 음식을 권하신다. 

어머님께서 끓여주신 죽을 맛있게 먹고 난 뒤, 랄라는 거실에 대자로 누워 얇은 담요 한 장을 배에 두르고 텔레비전을 본다. 그 모습에 어머님도 한 숨 놓으셨는지, 이제야 며느리와 마주 앉아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햇살 드는 거실 한편에는 물에 젖은 마늘 한 소쿠리가 보인다. 아침에 두 분이서 마늘을 다듬고 계셨는지 제법 많은 양의 마늘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채반에 담겨 있다. 

어머님은 한사코 멀리 미국에서 마늘 까려고 여기까지 왔냐고 말리셨지만, 난 이렇게 마주 앉아 마늘을 다듬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나에게 과도를 빼앗기신 어머님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보며 나도 웃음 짓는다. 어머님은 어쩌면 이 순간을 여러 차례 마음에 그려오셨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사는 막내며느리가 한국에 오면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마늘 소쿠리를 앞에 두고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될 날을.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어머님의 얼굴이 화사하다.

집안일 중에서도 특히 야채를 다듬거나, 멸치를 다듬을 때 누군가 함께 동참해 주면 지루함이 즐거움으로, 청승맞은 기분이 활기찬 분위기로 바뀐다. 일흔 넘기신 노인이 혼자 꾸부리고 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과 노인 곁에 자식이나 손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마늘을 다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그 노인의 모습이 다름 아닌 나의 자화상이라면, 나는 과연 어느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까? 우리 할머니께서 생전에 노인 박대하며 못되게 구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지는 안 늙는 줄 아나?”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신뢰가 두터워지고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십 이년 전 시댁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 얼마나 긴장하고 떨리고 조심스러웠던가. 매사가 자연스럽지 못했고,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시댁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앞질렀고, 긴장감은 어느새 편안함으로 탈바꿈했다. 과잉 친절도 자연스러운 언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스톰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는 내가 편히 머물 수 있는 또 하나의 집과 마음 따뜻한 부모님을 선물 받았으니까.

어머님 아버님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다.

2012년 7월 8일 

중국을 여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미 장마가 시작했다고 한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밤새 내리는 며칠 동안 랄라가 여독이 쌓였는지 배앓이를 했다. 몸이 아파 누워 지낸 랄라를 돌보느냐 여행 후 시댁 어른들을 찾아뵐 수 없었는데, 오늘은 조금이나마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아 아침 일찍 시댁으로 랄라와 함께 향했다. 

손녀 보고 싶은 마음은 친정이나 시댁이나 다름없음을 잘 알기에, 나는 최대한 친정 시댁 편 가르지 않고 양가분들과 공평하게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어릴 적부터 랄라가 최대한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자주 찾아뵙는 것도 솔직히 어르신들을 위한 마음보다는, 내 새끼에게 조부모의 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엄마로의 욕심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맑게 개인 일요일. 랄라와 함께 어머님 아버님께 드릴 도넛을 고르고, 지하철에서 마실 따뜻한 커피도 한 잔 구입한 뒤, 북적이지 않는 지하철을 타고 일요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한다. 간혹 가다 배가 아프다는 랄라의 배를 쓸어주기도 하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손에 감싸고 있던 따뜻한 커피 컵을 아이 배 위에 살짝 올려놓아 본다. 아픈 배가 좀 나아지면 랄라의 끊겼던 수다가 다시 시작되고,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도착한 시댁. 아픈 랄라 걱정으로 며칠 사이 더 야위신 아버님 얼굴을 마주하니 가슴이 아프다. 당신 얼굴 반쪽 되신 건 생각 안 하시고, 랄라가 핼쑥해졌다고 자꾸만 속상해하시는 아버님. 그래도 이렇게 손녀 얼굴을 보시니 조금은 안심이 되시나 보다. 주방에서 배가 아픈 랄라를 위해 열심히 흰 죽을 쑤시는 어머님의 뒷모습도 정겹다. 랄라를 서둘러 한 술이라도 먹이시려고 어머님은 분주하게 움직이시고, 아버님은 아이 돌보느냐 우리 며느리도 살이 빠졌다며 자꾸자꾸 먹어야 한다고 나에게 여러 차례 음식을 권하신다. 

랄라가 할머니가 끓여주신 죽을 맛있게 먹고 난 뒤, 거실에 대자로 누워 얇은 담요 한 장을 배에 두르고 텔레비전을 본다. 그 모습에 어머님도 한 숨 놓으셨는지, 이제야 며느리와 마주 앉아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신다. 그런 어머님 옆에 놓여있는 물에 젖은 마늘 한 소쿠리. 아마도 내가 오기 전까지 혼자 앉으셔서 마늘 껍질을 까고 계셨지 싶다. 어머님은 한사코 멀리 미국에서 마늘 까려고 여기까지 왔냐고 말리셨지만, 난 이렇게 마주 앉아 마늘을 까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나에게 과도를 빼앗기신 어머님의 얼굴에 퍼지는 미소를 보며 나도 웃음 짓는다. 어머님은 어쩌면 이 순간을 여러 차례 마음에 그려오셨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사는 막내며느리가 한국에 나오면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마늘을 다듬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될 날을.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오늘 마늘 한 소쿠리를 앞에 두고 이마를 맞댄다.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어머님의 얼굴이 화사하다.

집안일 중에서도 특히 야채를 다듬거나, 멸치를 다듬을 때 누군가 함께 동참해 주면 지루함이 즐거움으로, 청승맞은 기분이 활기찬 분위기로 바뀐다. 일흔 넘기신 노인이 혼자 꾸부리고 앉아 마늘을 까고 있는 모습과 노인 곁에 자식이나 손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함께 마늘을 다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리고 그 노인의 모습이 다름 아닌 나의 자화상이라면, 나는 과연 어느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까? 우리 할머니께서 생전에 노인들께 못되게 구는 젊은 사람들을 보시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지는 안 늙는 줄 아나?” 이처럼 간단명료한 삶의 이치를 우리는 너무 뒤늦게 깨닫는 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신뢰가 두터워지고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십 이년 전 시댁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 얼마나 긴장하고 떨리고 조심스러웠던가. 매사가 자연스럽지 못했고,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시댁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앞질렀고, 긴장감은 어느새 편안함으로 탈바꿈했다. 과잉 친절도 자연스러운 언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스톰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나는 내가 편히 머물 수 있는 또 하나의 집과 마음 따뜻한 부모님을 선물 받았으니까.

어머님 아버님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