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7일 

랄라가 개학을 하고 두 번째 맞이하는 금요일. 

여름방학 동안 어찌나 열심히 놀았는지, 난 우리 랄라가 구구단 9단까지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아마도 7단부터는 기억이 오락가락하지 않을까 싶다. 방학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을 알아가고 학교 생활에 다시 적응해가느냐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나 보다. 매일매일 새로운 정보를 받아오는 랄라가 집에 와서 열의를 가지고 업데이트를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난 요즘 랄라가 조금은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방학이 끝났다는 말은 잔치가 끝났다는 말과 흡사하다. 잔치가 끝나면 설거지와 청소 그리고 잡다한 뒷정리가 남아있는 것처럼, 개학 후 랄라에게 남은 건 과제물과 숙제 그리고 책 읽기와 한글 공부라는 일거리들 뿐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불평불만 없이 잘 지켜왔던 규율들도, 개학 후 며칠 동안은 구시렁구시렁 군소리가 늘어났고, 랄라가 자꾸만 덤벙거려서 물건을 잊어버리거나, 해야 하는 일을 깜빡하는 일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도시락 편지에 마음을 잘 챙기라는 글을 써서 보냈었는데, 랄라가 등교를 하고 보니 식탁 위에 초대형 필통이 덩그러니 남겨져있지 않은가... 개학 후 일주일 동안 랄라가 마음을 잘 챙기지 못한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책을 친구 집에 놔두고 왔고, 한 번은 과제물을 제출하는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고, 한 번은 특별활동 수업 일정을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아서 나에게 세 차례 이미 꾸중을 들은 뒤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필통을 놓고 가는 일이 또 생긴 것이다. 당근 이번에는 삼진아웃! 

하지만 나도 순간 고민했다. '지금 이 필통을 학교에 가져다줄까?' '지금 뛰어가면 스쿨버스가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시간이 맞을 텐데 동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랄라에게 전해줄까?' 아주 짧은 시간, 나도 엄마니까 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먼저 앞섰다. 책가방을 열고 필통이 없어서 당황해할 랄라의 얼굴. 그리고 아침부터 이과/문과 수업을 따로 들어야 하는데 다른 반으로 이동할 때마다 친구들에게 매번 필기도구를 빌려야 할 랄라의 난감한 얼굴. 그런 우리 랄라의 얼굴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가만히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니, 이건 아무래도 우리 집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에게 물어보는 게 정답일 듯싶어 스톰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스톰은 단칼에 "가져다주지 마! 우리 랄라 하루 정도 필통 없어도 살아!"라고 속시원히 말해주는 게 아닌가. 역시 이래서 나에겐 스톰이 필요하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우왕좌왕 우유부단해할 때 스톰의 칼 같은 한 마디가 얼마나 묘약이 되어주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속에는 역시 안 가져다 주기를 잘했다는 확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번 일로 랄라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랄라도 이제 5학년이니까 본인이 챙기지 못한 물건에 대한 뒷감당은 스스로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랄라가 주로 물건을 빌려주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번 기회에 자기가 좀 아쉬워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험을 해보게 될 것이다. 셋째, 자연스럽게 필기도구를 빌려준 친구들한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넷째, 이 일로 선생님께 혹시라도 꾸지람을 들으면 워낙 선생님 말씀이라면 잘 듣는 랄라니까 다음부터 자기 소지품은 두 배로 잘 챙기게 될 것이다. 다섯째, 엄마 아빠가 언제든지 짠! 하고 나타나서 랄라의 모든 것을 챙겨줄 거라는 기대를 싹 거두어 드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필통을 그냥 가져다주지 않는 걸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면 레인소나타가 아니지. 나는 랄라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아침에 놓고 간 필통을 쪽지와 함께 우리 집 현관문 문고리에 메달아 두기로 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Be Mindful, Missy W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