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으로 도착했고, 우리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채 조용히 기차에 올라탔다.
공주만 신나서 떠들었고,
"엄마, 츄츄 츄레인?츄츄.."
그런 공주의 손을 꼭 잡으며 이신우는 웃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냐고 왜 묻지 않아요?"
"그냥...믿으니까요."
"고마와요. 믿어줘서"
"고마운건 우리죠."
"나도 고마운거 많아요. 식당바닥에 정신잃고 있을때 나 구해준것도 당신이니까."
"그건...누구나 그렇게 했을거구요.
나는, 어딜 가든 상관없어요. 열심히 다시 일하거예요. 공주만 나와 함께 있다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그는 겉으로는 웃고있었지만 속은 어땠을까. 무슨생각을 하고있을까?
묻고싶은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그런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우는, 숙모의 아들이에요.
철없고 짖궃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예요.
그래도 내가 도움을 청할수있는 유일한 친척이죠.
물론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지만.
정우 어릴때 우리 엄마가 정우를 많이 힘들게 하셨죠. 내가 생각해도, 미안할정도로.
숙모는 우리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에게 많이 당하면서 무지 속상하셨을거고...
첩이었고, 또 술집출신의 여자라고 정말 심하게 대하셨거든요.
뼈대있는 집안, 재산있는 집안 따지면서 많이 상처받고, 무시 당하셨고.
그게...참 많이 한이 되셨던 거예요.
몇년전부터 아무도 모르게 여러가지로 준비를 해오셨더군요.
결국 모든 재산... 한푼도 남김없이 다 손에 넣으셨죠."
"아무리 그래도. 아무 잘못없는 이신우씨에게 복수하는건, 옳지 못해요. 다니던 학교도 못다니게 하고, 식당일이나 시키다니...
그리고 그 정우란 사람도 그래요. 아무리 쌓인게 많다고 해도... 정말 유치하고 못된사람 맞아요."
"와... 이제 정말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다 있네요."
하며 그가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그렇게 웃을수 있어요? 이런 상황에."
"그래도 난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까요."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순간 싫었다. 나를 동정하는것같아서 화가 났다.
"나 불쌍해요?"
"아니예요. 그게 아니고 미안해서"
"왜 안 불쌍해요? 어릴땐 고아원에서 울음이 많다, 말이 많다, 설거지를 더럽게 한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종아리에 멍이들게 맞았고, 학교가서는 고아라고 놀림당하고...선생님들은 나를 동네북처럼 때렸죠. 다른아이들에게 본보기로 보인다나 뭐라나... 고등학교는 커녕 중학교도 제대로 못마치고, 고아원에서 보내는 직장으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시키는일이라면 다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그 놈을 만났죠. 생전처음으로 나에게 선물을 준 사람...내가 좋다고 무조건 따라다니며 예쁘다고...사랑한다고...나는 그가 나의 인생의 출구라고 생각했어요. 드디어...나도 사람같이 살수 있겠구나. 남들처럼 예쁜 옷도 입어보고, 좋은냄새나는 화장품도 발라보고...
그런데..."
"미안해요."
"왜 이신우씨가 미안해요? 동정할 필요도 없고, 미안할거 없어요. 그래도 끈질기게 살아왔으니까... 이만하면 나, 잘 한거 아니예요?"
"그래요. 당신 아직 젊고 아름다와요. 아직 행복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았어요."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신우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왜요..?"
"이신우씨가...갑자기 너무 순진하게 느껴져서요. 난 그런거 바라지 않아요.
그냥 지금 내 곁에 공주가 있다면. 그리고 공주가 나같이 고생하지 않고 자랄수있다면...나 따위의 행복같은건...관심도 없거든요."
"정말 말 안듣네... 전에도 그랬죠? 자기 자신을 아껴야 된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왜 이런 위험한일에 끼어들어요?"
"말했잖아요, 가족이라고."
"피도 한방울 안섞였는데, 가족은 무슨..."
"이렇게 만난건, 우연이 아니고 운명이예요. 기적같은 일이라구요."
"기적? 어젯밤에 잠들었다가, 오늘 눈뜨고 일어난거...그것도 기적이예요. 알아요?"
그는 피식 웃었다.
왜 나는 이렇게 독해졌을까, 이신우에게 엎드려 절을해도 모자른데 왜 이렇게 톡톡 쏘고 있지?
"미안해요... 나.. 많이 삐뚤어진 사람이예요...몰랐죠?"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배운것들보다 훨씬 더 일리있고 맞는 말만 하네요."
"그러는 이신우씨는 뭘 공부 했어요? 쓸만한거...예요?"
"별로...쓸만하지 않더라구요."
"뭔데요?"
"법대."
"어? 법대?"
"그러니까요. 그렇게 법을 공부했는데, 결국 법대로 했더니 알거지가 된거예요. 이상하지 않아요? 재밌기도 하고."
"재밌기는...맘편하게 살아서 좋겠네요."
"어, 다 왔네요, 공주는 잠도 잘자네...내가 업을테니 이 가방 좀 들어줘요."
그를 따라 기차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한참 시골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신우는 길을 이미 알고있는지, 망설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더니, 작은 울타리집앞에 서서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한 아주머니가 나오셨는데,
"왔어? 늦었네. 점심전에 온다더니."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오래걸렸어요."
아주머니는 위 아래로 흩어 보시더니,
"정말 이런 일 할수 있겠어요? 애도 딸리고, 여자도 있고."
"네. 가르쳐주시면 금방 배울수 있습니다. 열심히 할수 있어요."
이신우를 따라 짐을 내려놓고, 풀고 하는데,
작은 방이 두개 있었다.
"뭐예요...? 여기가 어디에요?"
"제가 새로 찾은 직장이예요."
"무슨...직장?"
"뭐...동물도 키우고, 청소도 하고...공주가 밖에서 뛰어놀기도 좋고, 지수씨 안정하고 쉬기도 좋을것 같아서"
"무슨...소리 하는거예요? 공주는 내가 벌어서 키울거예요. 아까 말했잖아요, 난 안해본 일이 없다고."
"아, 잘 됐네, 그럼 나 일하는거 코치해줘요."
"법대나 나왔다면서...여기서 나때문에, 공주때문에 이러고 있겠다구요? 이런 시골 농장에서 썩을사람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힘든일, 막일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화를 내려고 하자,
이신우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 젊고, 힘 쎄요. 부자로 자란 덕분에 좋은것 많이 먹고, 운동 많이 하면서 자랐어요.
그리고 지금은...지수씨가 더 힘이 생길때 까지 안정해야 하고...또"
"준혁이 피해서...이렇게 먼곳에 숨어지내야 하구요?"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나도 생각이 있어요. 나 믿는다고 했죠?"
"믿어요.. 그치만...숨어지내는건 나하고 공주면 됐지, 왜 나때문에 이신우씨 까지"
"당신 때문이 아니예요. 나도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고... 좀 더 생각해볼 여유가...시간이 필요해요."
"그럼 난 뭐하고 있으라구요."
"공부하세요. 지금까지 못한 공부.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들어가고."
"미쳤어요? 내가 이런상황에 무슨.."
"내가 도와줄께요. 대학입시까지는 내가 확실히 가르쳐줄수 있어요."
"왜...그래야 하는데요...?"
"나는, 당신의 오빠니까요."
풋...또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조금 어색해서...
"오빠가 동생을 위해서 해줄수있는게...지금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공주가 학교들어갈 나이가 되면, 엄마도 대학마치고, 떳떳한 사회인이 되있을거예요. 자격지심같은거, 서러움받으면서 자라온 지난 시간들...되돌릴수는 없다고해도 이제부터 조금씩 바로잡을수는 있어요. 내가 도와줄께요. 지금까지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거잖아요."
"피한방울 안섞였는데 가족이라고 이렇게 무조건 돕는거, 너무 순진한거 아니예요? 인생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리고 나. 돌머리라구요. 학교에서 늘 꼴찌만했던."
"그건 두고 볼 일이고." 하며 그가 씨익 웃었다.
공부....공부를 하라고?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회인? 대학?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떨려오는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는 믿을수가 없었다.
나를 도와주겠다니.
오빠라니...
동생?
그러니까 그의 말은...값싼 동정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희생을 해주겠다는 건가.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매일 매일 그렇게 말도 안돼를 맘속으로 외치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들고 사정하는 그를 피해보기도 하고,
방에서 공부하라는 그의 말을 안듣고 농장에서 일을 돕다 다시 그에게 끌려들어오기도 하고...
하여튼 이신우는 끈질겼다.
고집이라면 나를 이기는것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어느새...
공주는 동네아이들과 뛰어노느라 바쁜 다섯살 꼬마 아가씨가 되었고,
이신우는
처음봤을때 뽀얗고 고급스럽게 부티나던 모습은 간데없이
햇빛에 그을리고 거친일에 익숙해진 영락없는 시골아저씨가 되어있었고,
나는...
그의 덕분에
정말로 검정고시를 마치고 통신으로 지방대학에서 일, 이학년 과정을 마치고,
이제 삼학년으로 새로 편입할수있는 대학을 알아보며 공부하고있는 학생이 되어있었다.
이신우는 아침부터 이른 저녁까지 고된 노동을 하고 들어와서는, 저녁을 먹자마자 나에게 준 과제를 점검하고, 다음날 공부할 것들을 준비해주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공주와 놀아주며 자기 자신을 위한것이라고는 전혀 관심없는 사람처럼. 나만을 위해서 살고있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내가 그를 설득해도, 그의 고집을 꺽을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학대하냐고 따지면, 늘 가족이라서, 오빠라서...
그렇게 나를 설득시켰다.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쌓인 분노와 억울함이 조금씩 벗겨지는...
나에게는 치료의 시간과도 같았다.
이신우는 자신에게도 이런시간이 필요하다고 우겼다.
이런 자연속에서 농사지으며 사는것이, 한때 꿈이었다고, 말도안돼는 어거지를 부리면서.
그는 분명 재벌로 자란 티가 줄줄 흘렀다.
서툴었고, 힘을 제대로 쓸줄 몰랐고, 세상 물정도 잘 몰랐다.
그래도 그는 아닌척 했다.
분명 그리웠을텐데...화려하고 즐거웠던 그의 과거 생활이, 공부에 열정을 쏟던 시절이, 그리웠을텐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것이, 내눈에는 보였다.
4년이라는 세월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
결국 그의 뜻대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수밖에 그에게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공부에 매달리고, 그가 시키는대로 힘을 다해 머리를 쥐어짰다.
우리는 다른사람이 보기에 영락없는 아빠, 엄마, 딸...이렇게 세가족이었지만
이신우는 나에게 선생님이었고, 아직은 조금 멀게 느껴지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너무 아픈기억일까? 잊고싶은 기억이겠지...싶어서 나도 묻지 않았다.
그는, 아는사람도 많을테고, 하고싶은 일도 있을테고...정작 자신의 학교도 마치고 싶을텐데
왜 나에게만 이렇게 해주느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웃어주고, 도와주고, 가르쳐주고...
내가 틀렸었다.
순진하고 조금은 철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신우는
너무나 어른이었다.
"지수야! 찾았어. 이 학교야. 바로 이 학교야.."
"응? 어딘데?"
"그가 들고 들어온 입학원서는 영어로 되어있었다.
"텍사스? 이게 뭐야?"
"텍사스야. 니가 원하는 수학공부. 여기가 제일 맘에 들어."
"하지만.. 보스턴으로 가야 너도.."
"또 시작이다, 또. 자... 이거 먼저 읽어보고, 원서 작성하자."
"너도 다시 학교 가야지."
"알았어. 간다고 했잖아. 우선 너부터"
"그만. 이제 나만 챙기는거 그만해."
"자...이름부터 쓰고...우리 이번기회에 너 영어이름 하나 만들까?"
"또 무시모드로 들어가기로 했어?"
"얘기 했잖아. 너 대학마치고..우리 대학원 같이 가자고. 그때까지는 내가 돈 모아서 우리 먹고 살아야지?"
"너가 내 남편이야? 오빠라며."
이 얘기를 하면 이신우가 제일 싫어하는걸 알면서...
"또 그런다. 오빠로써 이렇게 해주는게 당연하다고 했지? 남편이 이렇게까지 해줄것 같애? 쓸데없는 잡담 그만하고 어서 원서나 써. 이거 다 쓰려면 오늘 밤 세우겠다."
늘 이런식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들을수밖에 없었다.
"어...근데 공주가 왜이렇게 안들어오지?"
"아까 수연이네 집에서 더 놀고싶다고 했어. 걱정마."
"그래도 이렇게 늦는건...좀 이상한데."
"그럼 원서 쓰고있어. 내가 가서 데려올께."
"내가 가볼께. 하루종일 집에 있어서, 답답해. 오빠 너는 하루종일 일했으니까 집에서 좀 쉬어."
"어...너 원서 쓰기 싫어서 그러지? 이 오빠가 이거까지 해야겠냐?"
"그냥 쉬고있으라니까!"
살짝 그를 흘기며 흘러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이신우도 슬쩍 웃는다.
"그래, 그럼 갔다와. 금방 와야된다"
"알았어."
수연이네 집은 정말 이분정도 걸어가면 바로다.
공주가 얼마나 재밌는 놀이에 빠졌길래 아직도 안와?
하며 수연네 집앞에 들어섰는데,
수연어머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가슴이 땅으로 떨어졌다.
"왜...왜 그러세요 수연어머니?"
"아이고...어쩌나...이를 어쩌나...그렇잖아도 지금 공주엄마에게 가려던 참인데!"
"왜요?"
"공주가... 없어졌어요! 수연이가 지금 울고불고 난리 났는데, 어디서 까만 차가 갑자기 와서 공주를 태워갔다고...저렇게 부르르 떨면서 우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아요! 어쩌면 좋아요 공주엄마!!! 미안해요! 우리집 뒷마당에서 둘이 잘 놀길래 맘놓고 저녁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를 어째요!!! 아이고...아이고!!"
수연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우는데,
나는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내 손과 발을 느낄수가 없었다.
머리위로 바윗덩어리들이 한없이 쏟아져 내리는것 같았다.
그냥 땅속으로 꺼져버렸으면... 차라리 이렇게 무겁고 아픈마음은 피할수 있었을까?
나는 순간적으로 알았다.
아마도 이런꿈을 아주 자주...상상하며 꾸어왔기 때문일까..?
준혁.
정...
준혁.
"지수야!"
허겁지겁 달려온것은 이신우...
수연집에서 보낸 사람이 그를 데려온것 같았다.
이신우는 나를 끌어안고 지수야...지수야 를 계속 되뇌이고 있었고,
나는 그를 밀어내고 뛰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뛸 생각이었다.
내가 지쳐 쓰러져 죽어도
정준혁이 있는곳으로 당장 쫓아갈 생각이었다.
"지수야, 진정해. 잠깐, 잠깐만 기다려!"
"경찰에 신고해! 이건 납치야! 납치라고!"
"신고는 벌써 했어... 그치만 별로 소용없다는건...니가 더 잘 알지?"
이신우도 알고있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왔겠지.
"가야해. 우리 공주, 무서워서 어떻게해? 지금 울고있을텐데, 내가 가야지! 지금 가야지!"
"그래, 알아. 하지만 잠시만, 나에게 잠시만 시간을 줘."
"안돼! 잠시라니, 지금 공주가 얼마나 무서울건데! 지금 가야돼! 공주가 얼마나 겁많은지 알잖아?"
미친듯 소리를 치는 나의 손을 이신우는 힘없이 내려놓았다.
"그래, 알아. 알았어, 가자 그럼."
우리는 늘 두개의 짐을 싸놓고 살아왔다.
의논을 할필요도 없었고, 서로 의아해 하지도 않으면서, 필수품을 항상 그렇게 챙겨놓고 살았다.
이런상황이 오리란 것을...
우리는 악몽처럼 지우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 살아왔지만..
그 악몽이 지금 현실이 된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로 ...
준혁의 집으로 향했다.
이신우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나는 그저 멍하니 흐르는 눈물도 느끼지 못한채 공주걱정에 미칠것만 같았다.
아마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이성을 찾았더라면...
이신우가 무슨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는지 알았더라면...
준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미친듯이 벨을 눌렀고,
기다렸다는듯이 문이 열렸다.
뛰어들어가는 나를 이신우가 잠시 붙잡았고..
"이러면...안돼는거...너도 알지? 이렇게 무작정 들어가면"
"내가 침착할수 없는 상황이란것. 너도 알지?"
"그래...알아. 아니까 같이 온거야."
"미안해. 하지만 공주가 너무 무서울거야. 공주가!"
"알아... 나도 알아... 들어가서 소리라도 질러...공주가 너 목소리듣고 마음 놓게."
놓고 싶지 않았지만...그의 손을 놓았다.
"공주야! 공주야!!!"
소리지르며 거실안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악마같은 준혁이 변하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오랫만이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듯했다.
술을 마시면 더 포악해지는 사람이란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공주...공주 어딨어?"
엄마! 엄마! 하는 공주 목소리가 들린다.
정신없이 목소리만 따라 고개를 돌리는데,
"어, 공주야! 엄마 여기 있어. 걱정하지마. 알았지?"
준혁이 두손으로 나를 쥐어 잡는다.
"그동안 나 보고싶지 않았어?" 그의 눈빛이 완전히 풀려있다. 심상치 않았다. 무서웠다.
"미쳤어? 왜 이래? 너 지금 내 아이 납치한거야. 알어?"
"그래? 4년전에 있었던 납치사건은 어쩌고?"
"뭐?"
그가 피식 웃는다.
짐승...
"너 찾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너는 나를 그렇게 애태우고, 고생시키고, 넌 호강하며 살았다며? 공부도 하시고...검정고시? 대학? 와....그 머리에... 어떻게 그런 희한한 짓을 다했어?"
"원하는게 뭐야. 대체 니가 원하는게 뭐야!"
"내가 원하는거?"
그의 눈빛이 끔찍하게 소름끼쳤다.
"너." 하며 또르르...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소름이 끼쳤다.
이신우가 이러면 안된다고... 내가 정말 잘못한건가?
이신우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이신우는 어디갔지?
도망갔을까? 잘 피해서 가야하는데?
"니 서방 찾냐?"
"서방이라니!"
"찾을거 없어. 지금 빚갚고 있는중이니까."
"넌...정말...악마야. 세상이 두렵지 않아? 넌 죽지 않고 평생 살것같니?"
"나한테 너무 그러지마. 난 너를 사랑한 죄밖에 없어."
"이신우씨는! 어딨어!"
"아, 그렇게 보고싶어? 그럼 볼래?"
그가 나를 창문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차마 볼수없었다.
"제발 이러지마. 이신우씨 보내주고, 그래...나는 니 멋대로 해.
공주만 가까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그럴순 없지.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지난 4년을 어떻게 살았는데!"
그의 눈빛이 분노로 가득찼다.
"넌 모르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만해, 제발. 니가 하라는데로 할테니까. 제발!"
"그래 그럼. 따라와."
"공주를 먼저 보게 해줘."
준혁은 잠시 나를 윗층에 공주와 만나게 해줬다.
공주를 안심시키고, 억지로 웃어보이면서 잠시후 보자고 약속을 해 놓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디서 부터 뭘 해야하는지, 머리속이 하얘졌지만,
준혁이 나를 다시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신우가 준혁의 비서 석에게 이미 많이 맞아서 상처투성이었다.
아악!! 소리지르며 그에게 다가가려해도 준혁이 나를 쥐어 잡고 있어 움직일수 없었다.
"야, 비켜. 니가 얘 좀 잡아라."
석이 나를 잡고, 이제는 준혁이 이미 지쳐있는 이신우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
"그만해! 그만 좀 해!!"
"4년이야, 그 긴 세월동안 내 여자를 이 놈이 가로채서, 나를 미치게 만든놈이야! 너도 나만큼 고통스러워 봐야해!"
"준혁아, 넌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그만해!"
그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경찰차의 요란스런 사이렌이 울렸고,
대문이 부셔지듯 열렸다.
다른것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을정도로 나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똑똑히 보이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바로 정우.
이신우의 사촌.
정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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