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들어선 나는 그래도 마냥 좋기만 하다..

휴… 큰일날뻔했는데 다행이다 싶어서 피시시…멍청한 미소를 짓는데,

Mike를 돌아보니 영 표정이 좋지가 않다.

왜 그래? 하며 눈치를 보내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억지로 미소짓는다.

무척이나 자손심 상하고 수치스러웠다는 표정이다.

교수님께 부탁한다고 일일이 이유를 댄것도 치사했겠지만 아마도 윤지석이 끼어들어 도와준것이 더 기분나쁜지도 모르겠다.

 

“연서. Mike. Your turn. I hope we’re not wasting our time here.”

말에 씨가 있다.

늦게들어온 불량학생들이라서 가뜩이나 주늑들게 하는 교수님의 눈빛이 더 살벌하게 느껴진다.

 

Mike는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랩탑을 셋업하는 내내 고요한 침묵에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Mike도 평소때보다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다른 클라스 같으면 이럴때 서로 농담도 주고받고 허허 웃으며 셋업할테지만 이 교수님은 절대 그런 시시껄껄한 대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무슨소리를 지껄였는지, 지금까지 준비해온 슬라이드쇼가 잘 넘어갔는지,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정신없이 줄줄 내 순서를 다 채웠다.

Mike의 파트가 되자 그는 침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얼마나 곧바르고 묵직하게 발표를 잘하는지, 정말 와…박수가 저절로 나오도록 그는 술술 연설을 잘해냈다.  질문에 대답하는것이며 다른 학생들의 의문들을 오히려 지배하는 듯한 그의 독해력에 슬슬 교수님의 표정도 풀어져 갔다.

 

그런데…

“왜 이 프로젝트를 연서와 함께 했지?”

 

“예?”
Mike 도 나도 당황할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왜 이제 막 학위를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파트너를 골랐냐는 말이야.”

 

“그건..” 그렇게 말을 잘하는 Mike가 말을 얼버무린다.

 

“제가 부탁했어요.”
이쯤와서는 내가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요. 나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젤 잘하는사람한테 부탁했어요.

뭐가 잘못됬나요?

 

“너한테 묻고있는게 아니야. 니가 부탁했을거란걸 내가 모를것 같아?

아무리 부탁한다고 자기 점수가 걸린 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너랑 했다는건.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엄청나게 무모한거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연서는 대단히 똑똑하고, 일도 잘합니다. 일의 분량이 많아도 불평하지 않고요. 저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사람보다 열심을 가진사람을 높이 평가하거든요.”

 

교수님은 피식 웃는다.
“일을 잘해서 연서를 써먹었단 소린가?”

“아니요. 전혀 아닌데요.” 내가 팔짝 뛸판 이었다.

 

“됐어. 다음.”

That’s it?

 

사람 염장을 질러놓고 됐다고?
나는 아주 사람취급도 안하는건가?

 

세삼스레 열받을 일이 아니다.

이 교수님의 이런 행동에 총장실에 드나들던 학생들이 한둘이던가.

결국은 그들이 스스로 클라스를 관두고 말지 않던가…

너무 기가막히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나올랑 말랑 했다.
내 말은 들어줄 필요도 없다는듯. 됐어. 다음? 허…

 

Mike가 내 손을 잡아준다.

 

“Come on, let’s sit down.”

 

손이 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프레젠테이션때문에 긴장하고, 늦게들어와서 쫄아있었고, 또 이런 황당무개한 비판까지 들어야 한다니.
마이크에게 내가 미안해야 하는건가... 설마 나때문에 마이크 점수가 왕창 깍이는건 아닌가…

 

어쨌든 모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고,

마이크는 바로 옆방에서 미팅이 있어서 급하게 사라지고,

가방정리를 마치고 방을 나오다가, 문득 교수님을 뒤돌아 보는데,

그가 피곤한듯 두눈을 감고 잠시 이마를 쓸어내린다.

그 순간만큼은 왠지 조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꼭 이말을 하고 싶었다.

 

“교수님.”

 

그는 눈을 치켜올려 나를 보았고,

 

“저때문에… 마이크의 점수를 깍으실건가요.”

 

“당연하지.”

 

눈물이 나오려한다.

 

“제가. 그렇게 못했나요..”

 

“처음부터 이 클라스 들어올때 내가 뭐라고 했지? 신입생이 택할 클라스가 아니라고 했지?”

 

“교수님이 내년에 쉬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꼭 택하고 싶었습니다.”

 

“나가봐.”

 

“교수님!”

 

그는 귀찮다는듯 자신의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순간 그의 손이 떨리면서 약병하나가 가방에서 떨어져 나와 알약들이 방안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는데, 나는 얼른 떨어진 약알들을 주워 모았다.

 

“뭐하는거야? 나가라니까!”

 

놀라서 그를 올려다 보니, 굉장히 화가난 표정이다.

 

“죄송합니다. 아니…그렇지만…”

 

그는 약병만 주워들고 걸어나가면서 사방으로 흩어진 알약들을 발로 차 버린다.

 

“저 아직 말 안끝났는데요!”

데요…데요…데요….

내 목소리만 빈방에서 메아리치고.

한숨을 푹 쉬는데 눈물이 나오려 한다.

 

나… 잘 해야 하는데.

나 학교 보낸다고 밤낮으로 일하며 고생하는 울 오빠 위해서…
마이크한테도 미안해서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주저앉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잠을 못자서 그런가…내가 지쳤나 보다…

하다가 알약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무슨약일까?

 

주머니에 하나 집어 넣었다.
약학과다니는 교회 언니한테 한번 물어볼까?

 

집에 돌아오는 발길은 무겁고도 무거웠다.

배가 너무 고파서 힘도 없었다.

이 학교는 다 좋은데 싸구려 음식을 맘껏 사먹을수가 없다.

모든것이 너무너무 비싸다.

이제 곧 파트타임 일을 시작 하니 돈을 조금 벌수 있겠지…

그리고 박사학위마치고 나면 난 정말 최고의 교수가 될텐데?

속상한데 맛있는거라도 사먹자..

하고 혼자 지하철을 탔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Newbury street 까지 나가서 평소 절대 못가는 Thai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혼자 테이블을 잡아놓고 pad thai를 시키고, 거기다 thai ice tea까지 시켰다.

한참 신나게 먹다가 갑자기 오빠생각이 나니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지. 이게 얼마나 비싼건데, 하고 억지로 넘기려니,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삐질삐질 세어나왔다.

에휴…또 이 주책…

 

내가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했던건 아니었다.

사실 공부에는 관심없었고 미술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그림을 너무나 사랑하던 아이었다.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후 하루하루 먹고 살일이 막막해지고 나니,
그림이고 뭐고 필요없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는데 나보다 일곱살이나 많은 오빠가 난생처음으로 화를 내며 내 뺨을 때렸다.

 

상업고등학교는 오빠 하나로 족하다고.

오빠가 돈 벌고 있으니 너는 대학교에 가야한다고. 가서 서울대, 연대, 아니면 미국의 하버드로 가라고.

너는 할수있으니까. 그날 울며 나를 다그치던 오빠의 표정을 잊을수 없다.
늘 묵묵히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사무직을 하면서도, 내가 필요한 모든 공부에 부족함 없게 해주려고 밤일도 뛰고, 주말에는 장사도 하고… 내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오빠를 위해서 내가 할수있는건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친사람처럼 공부를 했다.

오빠말대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사를 한후,
어찌하다보니 박사학위를 하러 하버드까지 오게되었다.

오빠는 이제 여한이 없다며 웃었다.

엄마아빠를 이제야 편히 잠드시게 한것 같다며, 내 입학서류를 붙잡고는 또 울었다.

세상에 우리오빠같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동생 공부시킨다고 결혼도 안하고 일만 쉴새없이 한사람…

이제 오빠도 행복해야 돼… 오빠 좋은거 하고 살아.

내가 이제 오빠위해서 살께.

 

먹다말고 그냥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한국에서 오늘도 묵묵히 혼자 일하고 있을 오빠가…

너무 그립고 가여워서…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무시당하는게 서러워서…

 

누군가 내 앞에 털썩 주저 앉는다.

깜짝 놀라 올려다 보니.

 

“왜 울어?”

 

윤…지석...

 

“낙제 받았어? 내가 그렇게 힘써 줬는데도?”

 

“뭔 상관이세요?”

허.. 그가 기가 막히다는듯 웃는다.

바람둥이라더니. 생긴건 정말 반듯하네…

 

“너 꽤 재밌는 애구나. 마이크랑 같이 다녀서 답답한앤가 했는데.”

 

“마이크랑 친구 아니예요?”

“친구? 그 답답한 자식이랑? 어휴… no thank you..”

 

“마이크가 왜 답답해요? 얼마나 똑똑한데.”

“야. 여기 하버드야.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니?”

 

그쪽은 아니라고 소문났던데요? 하려다가 참았다.
내가 그냥 이 국수를 더 먹고 말지.

 

“너 마이크 좋아해?”

그를 째려봤다.

“어쩜… 어떻게 그런걸 물어봐요? 절 아세요? 제 이름도 모르지 않아요?”

“하연서.”

 

내이름을… 저 사람이 어떻게 알지?

 

“여기 한국애들이 몇이나 된다고… 더구나 넌…”

“제가 뭐요.”

“무척 촌스럽잖아. 어딜 가던 눈에 띄던데?”

 

“촌스러운게 눈에 띄는건지 오늘 처음 알았네요. 제가 보기에 선배님도 그리 세련되 보이진 않아요.”

 

“근데 왜 울었어? 밥먹다가?”

“상관하실바 아니예요.”

 

이제는 밥맛도 싹 가신다.

투고박스를 부탁해서 싸가지고 나오려는데,

 

“여기서 만난것도 인연인데. 내가 데려다 줄까?”

어머어머어머머….

지금 나 꼬시는거야 이 인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