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같은거, 전 안믿어요. 사양하겠습니다."

"너 사람 꽤 무안하게 하는구나."

"그러셨다면, 죄송하네요."

"그냥 데려다 주겠다는거야. 전철타려면 한참인데, 밖에 날씨도 쌀쌀하고."

T 전철을 안타고 가면...어쨌든 1불 70전, 아낄수 있긴 하겠군.
하는 생각이 휘리릭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해도 친하지도 않은데 얻어타고 다닐순 없지..

한번 더 정중히 사과하고 문을 확 열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시내.
문을 여는 동시에 불어닥치는 바깥 바람이 뼈속에 사무치도록 차가왔다.

"옷도 그렇게 얇게 입고. 감기들겠다."

윤지석.
정말 왠 친절? 나한테 뭔가 바라는게 있나...? 아니면...

나는 평생 공짜라는걸 믿지 않았다.
더구나 이유없는 친절은 더더욱 익숙치 않아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말없이 그를 돌아보는 나의 눈빛이 어색했는지, 그가 픽. 웃더니,

"어차피 가는방향도 같은데. 안그래? 난 Peabody Terrace에 살아. 넌?"

"저도... 거기 살긴 하지만. 전 Lamont Library로 가야해요."

"거기서 거긴데 뭐. 자... 사양하지 말고 타."

식당 바로 앞에 왁스칠을 잘 해놓은 반질반질한 BMW 문을 열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큼 사양했으면 알아서 갈것이지...하는 핀잔을 머리속으로 되뇌이면서도
내 몸은 어느새 그 푹신한 가죽의자에 앉아있었으니.
그가 내 싯벨트를 향해 팔을 뻣치기에 무섭게 내가 재빨리 먼저 착용을 해 버렸다.
그는 다시 어이없다는듯 웃었는데,
또 보니 웃는 모습이 영화배우 누군가를 닮았다.

"몇층에 사니?"

"네?"

"아파트말야. 몇층이야?"

별걸 다 묻네...싶으면서도,

"21층이요."

"정말?" 그가 크큭...웃는다.

"왜그러세요?"

"난 22층이거든."

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자세한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one bedroom 아파트에서는 혼자들 살지만, 나는 아파트값을 아끼려고 룸메이트를 구했다.
나의 룸메이트는 방안에서 자고.
나는 차가운 거실바닥에 커튼을 쳐놓고 길거리에서 주워온 메트리스하나가 전부였다.
(지금생각하면 미친짓이다. 그당시에는 bed bug가 뭔지도 모르고 겁없이 버려진 메트리스를 가져다 썼으니...)

"졸업은 언제 하시나요?"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왜.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어?"

"아니요. 제가 왜..."

"아... 내가 5년이상 눌러앉아서 논문도 시작안한거.. 소문 들었구나?"

이런 실수...  본의아니게 지나친 관심을 보여주었나보다.

"될수록 늦게. 오래 해먹을라고."

"시간이 아깝지 않으세요?"

"별로."

그가 신호등앞에 차를 세웠다.

"근데 넌, 왜 그 클라스를 택했어? 신입생이."

"아...그냥. 교수님이 내년에 Sabbatical 가실거라고 해서요."

"뭐? Sabbatical (안식년)? 그 인간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 보았는데,

"별 걱정을 다한다. 그 사람은 일에 미친사람이야. workaholic 이라고."

"그 클라스...해보셨어요? 선배님도?"

순간 궁금해졌다. 그 교수님을 잘 알고 있는듯 해서.
아까 우리를 위해 윤지석이 횡설수설 지껄이던 말도안돼는 변명을 교수님이 웃어 넘겨준것도 좀 이상하고...
지금 나의 최대 관심사는 그 클라스를 패스하느냐 마느냐 였으니까.

"아니.  내가 그 힘든 클라스를 왜 하냐?"

역시 실망... 그러면 그렇지.
정말 마이크가 말해준 그대로야. 할일없이 여자들이랑 시시덕거리며 공부와는 담을 쌓은...

"너,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하버드는 정말 행복한 곳이야. 이렇게 즐길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몇번이나 오겠어?"

"졸업하면. 전 그때 즐길거예요."

"이런...이런... 오늘. 이 순간 하나하나를 즐기는게 인생이야. 나중? 그런건 아무리 기다려도 나중일뿐이야."

어찌보면 옳은소리.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가하게 놀기좋아하는 그의 핑계같이 들렸다.
생활비 걱정없고, 수업료 아깝지 않은 부자라서 그러나보다. 싶어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중요하다는 말이었어요."

"현실이 더 소중한거야. 미래는 어차피 우리 손안에 들어오지 않아. 참. 도서관 간다 그랬지?"

그가 차를 돌려 도서관앞에 세운다.

우연이었을까.
마이크가 문앞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얼음처럼 굳어진다.

"Oh.. Hi Mike."
소심하게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왠지 나쁜짓하다 걸린사람처럼.

"연서...?"
그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순간 윤지석을 돌아보는데,
그는 나를 보고 또 윙크를 한다.
씨익 웃더니,

"아파트에서 보자."

하며 쐥 하고 사라진다.

뭐? 아파트에서 봐? 저....저..

"무슨...일이야? 왜 윤지석이랑 함께 와?"

"어...그냥. 식당에서 만났는데, 거절해도 계속 물어보길래..."
치사한 핑계다. 결국은 내가 좋아서 탔으면서.

마이크는 기 막히다는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다.

"왜그래, 마이크?"

"아니야. 그냥..."
마이크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연서야. 너... 윤지석...조심해. 나쁜녀석은 아니지만...
너 마음 다칠수도 있어.  무슨말인지 알아?"

"아니. 몰라. 내가 전혀 관심없으니 마음이 다칠리도 없잖아?"

"니가 몰라서 그래. 저 자식이 마음만 먹으면..."
말하다 말고 마이크가 다시 한숨을 쉰다.

"공부하러 왔어? 할거 많아?" 갑자기 화제를 바꾼다.

"말해. 왜 말하다 말고 그래?"

"아냐. 쓸데없는 소리야. 추운데 들어가자."

"그냥 피하란 소리지? 바람둥이라고?"

"그것보다...저 자식은...그 누구든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어 버리는...재주가 있어."

"난 그 사람 편들고 싶지 않은데? 편들 일도 없고"

"그건 니가 아직 윤지석을 몰라서 하는말이야."

이상하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마이크는 무척이나 생각이 깊고 마음이 좋아
다른사람을 깍아내리는 말을 만들어낼 사람은 절대 아니다.

"알았어. 조심할께. 마이크는 공부 다 마친거야?"

마이크가 안심된다는듯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그의 품안이 너무 따뜻하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냄새가 좋았다.
미국 사는 사람들은...
그냥 친구라도 이렇게 따뜻하게 안아주나?

하는 질문을 떨쳐버리고, 그냥...좋아서 아무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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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F?"

"그래... F 받았어... 너도...?"

"나...나...난..." 입술이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아직...못...봤어."

"체크해봐..."

마이크도 울것같은 표정이다.
고개를 숙이며 애써 참아보려 하지만 그 황당함과,
또한 이게 지금 꿈이야 생시야...하는 헷갈림은 말로 형용할수 없었다.

역시나.
나도 F 학점을 받았다.

마이크와 나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말없이 오로지 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교수님의 오피스.

똑똑똑...

"Dr. Chang...?"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가 문을 열어준다.

"왠일이야?"
정말 뻔뻔스러운것일까?
어떻게 멀쩡한 프로젝트에 낙제점수를 주고도 우리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다는듯 묻는다.

"교수님!"
마이크가 할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다.

"왜죠? 왜... F 를 주셨는지. 이해할수 없어요."
나도 모르게 침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마치 교과서를 읽은듯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살짝 정신이 나간걸까?

"못했으니까. 아주...terrible 이었으니까."

"교수님!"
이번엔 우리가 아주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함께 합창을 했다.

우리가 이런다고...
이 교수님이 마음을 바꿔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