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리가!” 마이크가 유리창을 옅보려고 다가오는데,

 

“뭐하나 니들. 나 차가 없는데 운전 좀 해라.”

 

엉? 교수님…?

 

마이크와 나는 주춤하다가 먼저 걸어나가는 그의 뒤를 쫓아,

마이크의 차안으로 그를 모셔들었다.

 

한참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왜…낙제를 주셨는지. 이제 조금 알것 같습니다.”

마이크가 나지막하게 한마디 한다.

 

“그래? 하버드학생 답군.”

왜냐고. 뭐냐고도 묻지 않는다.

알았으니 됐다는듯.

말없이 창밖을 주시하는데,

 

“교수님은, 언제부터 그 학교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그가 앞자리에서 뒤에 앉은 나를 돌아본다.

그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이 무척 불편하다.

 

“처음 봤을때부터.”

 

그니까…그게 언젠데요, 물을라다가 그냥 쪼그라들었다.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그의 표정때문이었는데,

“왜. 신기해?”

뜻밖에 그가 물었다.

 

“네. 뜻밖이에요. 교수님 연구에 빠져 계시는 분인줄 알았거든요.”

 

쯧쯧…하며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젖는다.

 

“그럼 내가 저기서 연구안하고 놀고있는줄 알았나?”

아…

그런건가…?

그저 좋은일하려고 가는게 아니라 연구를 하려고…
그럼 그렇지…

 

말없는 침묵속에서 장교수는 하버드 스퀘어에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내린후 사라졌고,

 

“아까…무슨말이야, 마이크? 왜 낙제를 받은건지 알겠다는 말.”

 

“우리 프레젠테이션에 말이야… 자폐아 학생들의 지도에 대한 문구가 있었지?”

“아….그래… 아주 짧은 몇마디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쓴 문구가 틀린정도가 아니라 아주 편견에 지우친 사상이었어.  짧은 내용이었지만 우리 프레젠테이션 주제에 없어서는 안될것이었고… 그게 굉장히 offensive 하다는걸 알려주려 하신것 같아.”

 

그랬구나…
하여간 그렇게 작은 디테일을 끄집어 내는 교수나, 그걸 깨닫고 고칠수있는 학생이나.
둘다 대단하네… 그리고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가…맞네.

 

한숨을 길게 뿜었다.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좋은경험이 될것같아. 그렇지?”
마이크가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이 사람이 참 좋다.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다정하고, 따듯하고,

또.

 

“그리고 너랑 함께 하니까… 더 괜찮은것 같아.”
하며 그가 싱긋 웃는다.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하는데…

 

“다행…이네… 괜찮다니”
이럴때 나는 꼭 횡설수설을 한다.

 

하하…그는 상쾌하게 웃는다.

 

“너… 나 좋아하니?”

응? 뭐 저런 자기 중심적인 질문이 다 있지?

“어? 내가…널?”
이렇게 곤란할땐 상대방이 한말을 고대로 되새기면 되는거야.

 

피식…그가 다시 웃더니,

“아니…미안하다. 사실은…내가. 널 좋아하나봐.”

 

그렇지. 진작에 그럴것이지.
참으려고 했는데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기침과 사랑은 감출수 없는거라 했던가…?

 

“그 웃음은…너도 날 좋아한다는 뜻이야?”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오늘…마이크가 노래하고 춤추고 아이들 닦아주고 밥먹여 주는거 보면서…내내 마음이 따뜻했어.
원래 좋은 사람이란거 알았지만…오늘 보고 더 그렇게 느껴졌어.”

 

“어…내가…하려고 했던 말인데…” 하며 마이크가 수줍게 웃는다.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려는데,
갑자기 그가 내 볼에 슬쩍 뽀뽀한다.

 

“미안…놀랬어…?”

“아니야…”
좋아 죽을뻔 했어… 하는 말을 삼키고…

 

“내일 아침에 아파트로 데릴러 갈께. 오늘 피곤하니까 푹 쉬고. 10시쯤. 어때?”

“어…좋아.”

 

그와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헤어졌다.

 

너무 기분좋아서 한쪽 볼을 어루만지며 행복하게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Good evening.” 하며 누군가 비집고 들어온다.

 

윤지석이다.

 

“어. 하연서네? 여기 산다더니. 드디어 만나는구나?”

그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살짝 고개숙여 인사했다.

 

“어디갔다와?”

“선배님은. 어디갔다 오세요?”

 

“데이트.” 하며 씩 웃는다.

사실 난 알고있는데.
그리고 조금 궁금했는데…그 여자아이는 누구냐고…왜 거기에 있었냐고.

 

“너도 데이트 나갔다 오는구나?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네?”

“어머. 아니예요.”

 

“놀라긴…”

 

어느새 21층이다. 고개로 까딱 인사하고 서둘러 내리려는데,

 

“야, 너 라면 있어?”

“있어요.” 거짓말은 하면 안돼지.

“하나만 빌려주라.”

 

왜요…하려다가… 에이. 그까짓 라면하나, 전에 신세진것도 있고 하니…

 

“잠깐만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는데 그가 휘파람을 불며 서성거린다.
아니. 혹시 내가 사는 아파트 번호를 보려고?
기분나쁜생각이 스쳐서 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문을 빼꼼히 열고 라면하나를 덜렁 내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빌려드리는거 아니고. 그냥 드리는거에요.”

 

그가 풋..하고 웃는다.

 

“그래. 고마와.”

하며 라면을 받아들고 사라진다.

 

착한일하고, 왜…미안하지?
아니야. 미안할거 없어.

 

주로 주말에 해치우는 빨래거리가 잔뜩 쌓여있다.

낑낑 메고 지하실에있는 빨래방에 갔는데,

 

이런…일요일 저녁.  모든 학생들이 빨래를 서둘러 헤치우는 시간이다.

빈 빨래통이 하나도 없다.

헤매고 헤매다가 드디어 하나 찾아내고, 빨래 넣어놓고 책좀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Excuse me. Are these yours?”
고개를 들어보니 한 여학생이 나를 노려보며 내 젖은 빨래들을 툭툭 친다.

 

어? 왜 빨래가 나와있지?

“Yes. Why?”

잠에서 덜 깨서 헤매는데,

 

“Can you be more civil? We are all living here and we all have to do laundry. I can’t believe you would throw my laundry out to do your laundry. It’s unbelievable!”

내가…자기 빨래를 던져놓고 내 빨래를 했다니… 말도 안돼는 소리다.

아니라고 설명을 하는데,

그녀는 얼굴이 상기될정도로 성질을 부리며 급기야는 내 빨래를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정말 기막히고 열받아서…

 

갑자기 커다란 등치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감싼다.

“Just forget about it Stacy. Bitches will stay bitches. There’s nothing you can do about it.”

 

“Excuse. Me??”

너무 기가막혀서 … 아 난 이런상황에 왜 꼭 눈에 눈물이 맻히는지. 더 독하게 싸워도 모자랄판에…

 

“Well, a bitch and a jerk. What a perfect combination, isn’t it?”

하며 갑자기 나타난 윤지석이 그녀의 빨래 바구니를 발로 뻥 차버린다.

씩 웃는 그의 표정이 내 속을 다 시원하게 한다.

“What the heck is your problem?” 등치 큰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Don’t be ridiculous. Over a laundry? Seriously? Come on, man. What’s your GPA?”

갑자기 GPA 소리가 나오자 그들이 기가 막힌듯 코웃음을 친다.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우리욕을 해대며 사라진다.
아직도 서러운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

윤지석이 내 군데군데 널려진 내 빨래를 주워 담는다.

 

어머. 내팬티!

잽싸게 그의 손에서 잡아 내 치는데,

그가 푸하..하고 웃더니..

“아…미안…미안.”

하며 두손을 치켜든다.

 

“왜 남의일에 나서고 그래요?”

 

“그냥 놔두면 울겠던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았다.

 

“울면… 좀 어때요.”

 

“울지 않아도 돼는데… 왜 울게 해?”

그러니까 내가 울던 말던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구요.

하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분명히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나는 그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한 감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빨래를 집어들고 가려는데,

그가 내 바구니를 뺏는다.

 

“왜 이래요?”

“빨래 다 하고 가. 여기 빈세탁기 있어.”

 

그가 주섬주섬 쑤셔 넣고, 자기 학생증을 넣고 빨래를 돌린다.

 

“저기요…죄송하지만. 이러지 마세요.”

 

그가 나를 돌아본다. 어색하게 피식 웃더니,

 

“그래. 알아 무슨말인지. 나도 그런거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뭐가 알았다는거고 뭐가 아니라는건지… 하여튼 이 박사학위하는사람들 말 떼어먹고 하는버릇들…

 

어차피 빨래를 집어 넣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책을 읽으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일부러 멀리 떨어져 앉아 그도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뭔가를 찾는듯한데,

 

“어. 피…코피..” 얼른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코피…나시네요…”

 

그가 조금 찡그리며 웃는다.

 

“고마와… 수건은..내가 빨아줄께”

 

“그냥 가지세요. 또 많아요.”

하고 획 돌아섰다.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왠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코피를 닦아내며 빨래를 집어 옮기는 그가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실없이 아무 여자나 만나고 다닌다는…
공부도 안하면서 졸업은 안중에도 없고…교수님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
그러나 아까 학교에서 여자아이와 다정히 대화나누던 그는

참으로 진실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에게 베푼 쓸데없는 친절도…그냥…저 사람 진심인가?

나한테 작업거는게 아니고?

내 빨래가 끝나고 나가려다가 잠시 그를 뒤돌아 보았는데,

그는 피곤했는지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에대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낑낑 바구니를 들고 올라갔다.

마이크는…지금 뭐하고 있을까?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