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야말로...장교수랑 무슨 사이야?"

"그게 무슨말씀이세요? 물론 그냥 교수님과 제자 사이죠."

"그래?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 아니었어?"

"왜...그런걸 물으세요?"

"장교수가 마이크를 이 학교로 보낸건 이해해.  Research 경험도 많고, 이제 거의 논문도 자리 잡아가고.
근데 넌... 경험도, 실력도 아직 멀었는데..."

"그건...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제가 마이크랑 프로젝트를 같이 했는데..
점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신거예요."

"장교수는 그런식으로 사정 봐주는 교수가 아닌데..."

"장교수님을...어디까지 알고계셔요? 그 아이랑은...무슨 관계인거죠?"

윤지석이 커피를 마신다. 대답할까 말까 망설이는듯.

"솔직하게 대답해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저 아까 허수아비처럼 목걸이 걸고 서있는거...보셨잖아요. 아참... 목걸이.."

그러고 보니 아직 그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른 빼내어 그의 손에 집어 주었다.

"이 목걸이를 저한테 주신것도 선배님이었구요."

"애나가 자폐증이 아니라고...약물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장교수는 주장해왔지.
이 목걸이가 뭔지는...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누나가...애나한테 선물로 준거라는데..
자폐증환자들은. 감정표현을 잘 못한다고 알려져 있잖아. 상황과 정 반대된 표현을 하기도 하고.
그러나 애나가 울면서 엄마가 준 목걸이를 알아봤다는건..."

"애나가...자폐증이 아니라는 증거이군요."

"자폐증은 그렇게 자로 대고 줄로 재서 단정지을수 없는 condition 이야. 난 아직도 Post Traumatic Autism이라고 생각해.
설사 아니라 해도, 지금 이 학교보다 더 좋은 환경은 찾을수 없었고.
어린아이에게 약물사용은 위험성이 길고..높거든.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치료기간이...단축될수는 있겠지."

"장교수님이... 애나의 아버지 인가요?"

"아니야."

그렇게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창문을 돌아다보는 그의 눈빛이.
쓰라리게 아파보였다.

"애나의 부모님은요...?"

"사고였어. 3년전에."

윤지석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그는 찬물을 가지고 오더니 단숨에 마셨다.
잔을 내려놓더니.

"자. 이제 그만 가도 되지?"

아직...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를 물끄러미 보고있다가,
그래...너무 많은걸 알려고 하지 말자.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인걸...
괜히 이 사람 상처만 건드리는거잖아...
아. 이거 하나만 더 묻고.

"마이크랑은...무슨 사이신가요? 두 사람 사이에...무슨 일이 있었나요?"

흠... 웃음비슷한 한숨을 쉰다.

"그건... 마이크한테 물어봐. 둘이 친하잖아"

"마이크한테는 이미 들었어요."

"그럼 됐네."

"사람일이 그렇잖아요. 두쪽 얘기를 다 들어봐야"

"재판하려고? 아니면 마이크를 못 믿는거야?"

"선배님은...마이크가 선배님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좋은말은 못 들었겠지. 그렇다고 마이크가 틀린말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럼 정말 공부에는 관심없고 빈둥거리며 놀고다니는 명문대 최고 미스테리. 바람둥이가 맞아요?"

윤지석이 웃으며 커피를 마시려다가 문득 바깥 유리문쪽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표정이 굳어지는데,

"왜요?" 나도 등뒤 유리밖을 돌아봤는데,

나의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정말 기.가. 막혔다.

Cindy가 펑펑울며 마이크에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고,
그런 그녀를 마이크는 가슴아픈표정으로 꽉 끌어 안았다.
이건 연인정도가 아니라
아주 10년쯤 결혼한 부부같은 한 광경이었으니...

"어...마이크..."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더니 자리에 앉힌다.

"내비 둬. 우리 이렇게 마주 앉아있는것도 얼마든지 오해할수 있는 상황이야."

"그래도!"

"나가서 뭘 어쩌려고? 당당하게 사귄다고 말도 못할거면서."

어... 어떻게 알았지?

"나중에 물어 봐. 뭔가 사정이 있었을거야."

여자의 직감이라는게 정말 있는걸까?
처음 마주쳤을때부터 신경이 쓰였었다.
Cindy 라는 옛 여자 친구. 그는 아직도 못잊었던것 같다.
멍하게 바라보다가 힘이 쪽 빠져서 자리에 주저 앉았다.

"너...마이크...정말 좋아하는구나."

잠시 생각하던 윤지석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조용히 내 어깨에 자신의 두손을 올려 놓더니,
길게 숨을 쉬고 날 보다가,
내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간다.

"왜 이래요?"

"Hi Cindy, Hi Mike."

나를 붙잡아다 세워놓고,
윤지석은 영화의 한장면을 연상케하는 그들에게 그렇게 툭. 말을 건넨다.

"Oh my gosh! Hi Jisuk!"
Cindy가 서둘러 눈물을 닦고,

마이크는 까무라칠듯 놀란다.
"연...서...?"

"여기서 둘이 뭐해? 영화찍어?"

마이크는 무척 당황하면서도 불쾌한 모습이다.

"신디 어머니가...많이 안 좋으셔. 병원에 갔다 오는길이야. 넌 왜 여기에 연서하고 있는거야?"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해도... 내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착한 마음의 마이크가 신디를 도와주는건 이해가 갔지만, 그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신디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것 같았기 때문에...

"니가 바쁘다고 사라졌잖아. 난 그냥 조사받던 중이었는데...?" 하며 훗 웃고 나를 쳐다본다.

"조사?" 마이크가 되묻자.

"그냥. 궁금한게 몇가지 있었어. 바쁠텐데 가봐, 마이크.. 나도 이제 집에 가봐야 겠네." 일부러 마이크에게 웃어보였다.

"아니야. 연서...잠깐만."  마이크가 내 손을 붙잡는다. 신디가 뚫어져라 보는데도 아랑곳없이.

"이렇게 만났는데, 나랑 같이 가. 잠시만 기다려줘."

이럴때 됐어. 그냥 갈래...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난 그냥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주기만 바라면서.

마이크는 신디를 저쪽으로 데리고 가서 몇마디 주고받는듯 했다.
신디는 내쪽을 자꾸 훔쳐보며 괜찮다는듯 싱긋싱긋 마이크를 향해 가지런한 이를 내보였고.

"잘 가라."
윤지석이 한마디 하고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때, 마이크가 윤지석을 거의 밀쳐내듯 우리 가운데로 끼어들더니,

"미안...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연서. 그리고...여기서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 저녁...먹으러 가도 괜찮겠지?"

"어? 글쎄...오늘은 좀 피곤한데..."

"그래? 그럼 저녁은 to go 하기로 하고...나랑 잠깐 어디 좀 가도 돼겠어?"

"어..."

"자. 가자, 연서."

마이크는 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의 손이 따뜻했고, 그의 웃어주는 표정이 포근했다.
고향...내 고향에 온것같은 편안함이었고 설레임이었다.
온갖 생각이 내 머리속을 복잡하게 했지만,
어쨌던간 지금.
마이크는 신디가 아니고 나를 택한거니까.

마이크는 내 손을 잡고 예쁜 악세서리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흠...열심히 뭔가를 찾더니,

"Can I see this one, please?"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었다.
아까 낮에 본 그것과 비슷했지만 새것이라 그런지 그 매끄러운 광채가 달라보였다.

"왜그래..마이크..? 뭐하는거야?"

"내가 사주고 싶었어. 이 목걸이...받아 줄거지?"

내 머리속으로는
신디를...완전히 잊은거야? 나를 택한거 맞지?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저 멍청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이크와 함께 있으면, 나는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따지기도 잘하고, 실례가 되더라도 꼭 정확히 답을 얻어내는 편인데 말이다.

나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마이크는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그의 향긋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이는데,

"정말 예쁘다.."

심장이 멈출것 같이 떨려와야 하는데 왠지 가슴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신디때문일까? 아니면 마이크의 행동이 별로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였을까...

마이크의 차를 타고 아파트에 도착한후,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자는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의 초라한 커튼방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것도 있었지만,
왠지 그가 서두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쁜가봐..?"

"응. 아까 장교수가 시킨 인터뷰 정리를 아직 다 못했어."

"내가 도와야 하는거 아니야?"

"아니. 신디가..."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디가 봉사하는 교실에서 자료를 전해주기로 했거든. 별거 아니야, 내가 끝낼수 있어."

"마이크."

그가 미소지으며 나를 올려다 본다.

신디하고 무슨관계야? 왜 나에게 이 목걸이를 사준거야?
이 말이 차마 떨어지지가 않았다. 치사하게 따지고 질투하는 내 속마음을 보여주기가 싫었다.

"잘가. 목걸이...고마와."

터벅터벅
왜 나는 바보가 된걸까...생각하며 아파트문앞에 도착했는데,

"하악!"
놀라 자빠질뻔 했다.

"교...교수님!"

장교수가 층계에 기대어 앉아있다가,
주섬주섬 몸을 가누며 일어선다.

"지석이는?"

"네? 선배님은...윗층에 사시는데."

"그걸 누가 몰라? 어디있냐고 지금! 아까 같이 나갔잖아."

"모르는데요. 한번...올라가 볼까요? 먼저 오셨을지도"

"아니. 됐어."

그가 층계를 올라가려 하는데 갑자기 휘청거린다.
얼른 가서 그를 부축했다.

"왜...이러세요? 괜찮으세요 교수님?"

"됐어."

"괜찮으시겠어요?"

잠시 윤지석의 아파트앞에서 장교수가 나를 돌아본다.

"잠시만 있어봐."

좀 이상했지만 싫다고 할수도 없고...
그러겠다 하고 서성거리다 보니,
어느새
윤지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우리 둘을 목격한다.

뭔가 이상한듯, 윤지석이 성큼성큼 다가오며 뭍는데,

"무슨일이예요?"

"애나가" 장교수가 차마 말을 잊지 못한다.

윤지석의 두 눈이 커지는데,

"병원에 있어. 여기 연서도...함께 가봐야 할것 같아."

윤지석의 표정이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낮에 일이...충격이 심했던 모양이야."

아...어쩌다가 내가 이 일에 엮이게 된거지?
장교수는 왜 나까지 가야한다는건지...

윤지석이 아무말없이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다.
애나는 수면제를 맞고 잠들어 있었지만
잠시 안정을 위해 아무도 만나면 안됀다고 했다.

윤지석이 침울한 표정으로 장교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렇게까지 충격이 클지는 몰랐어."

"몰랐다구요? 이제 8살 어린애예요. 엄마라는 존재를 가지고 아이를 놀린거나 다름없다구요.
더구나 저 아이의 마음은 유리같이 맑고, 또 그 만큼 잘 깨진는거. 몰라요?"

"니가 고집을 부리니까 그렇지.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

"원하는게 대체 뭔데요!"

"나에겐 시간이 없어. 저아이에게 해줄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봐야겠다구!
그 한심한 재활프로그램? 애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약물은 위험할수도 있다잖아요!"

"위험하다고 고치지 않고 평생 저렇게 살게 내버려둘거야?"

"고칠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해보지도 않았잖아!"

"당신이 뭔데!"

급기야는 윤지석이 소리를 질렀다.

장교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고,
늘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의 눈가에도 촉촉한 그늘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격해진 감정으로
내가 옆에있다는걸 잊은듯 하다. 난 그저 벽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장교수와 내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헉. 숨이 멎을듯 놀라서 얼른 고개를 숙였는데,

장교수는 무슨말을 하려다가 참고,
한숨을 쉬더니 나를 스치고 지나 뚜벅뚜벅 걸어 나갔는데.

윤지석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고 벽에 기대 쓰러지듯 바닥에 앉았다.

한참을 그냥 기다리다가
나도 지쳐서 그옆에 주저 앉았다.

우나?
싶어 자세히 살펴보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돌아본다.
헉!

"괘...괜.찮아요?"

"미안하다. 피곤하지?"

"아니요. 전..."

"가자..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