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너까지 오게해서."

"저야 뭐...선배님이 힘드시겠어요."

그가 나를 힐끗 돌아본다.

"그렇게 친절한 말도...할줄 알아?"

그랬나? 내가 너무 친절했나?

"Mr. Yoon! Mr. Yoon!"
간호사가 억지로 소리를 낮추며 이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윤지석이 돌아보자,

"Anna is awake. Doctor thinks it might be best that you go in and calm her down. We can't give her any more sedatives at this point."

안정제도 듣지 않는 모양이다.
그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얼마나 충격이 되었길래...

"저도 같이 가면...도움이 될까요."

"아니야. 미안하다, 데려다 주지 못해서."
윤지석은 말도 제대로 잊지 못하고 간호사를 따라 서두른다.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애처롭다.
자세한 사연은 알수없지만 몸도 마음도 지쳤을 그의 늦은밤 뛰고있는 발걸음이 무거워만보인다.

나도 피곤이 쏟아져 왔다.
어서 집에 가고싶은 맘이 간절했는데,
그래서 아직 넘을 산이 남아있는 윤지석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누르려는데,
장교수가 나 대신 먼저 버튼을 누른다.

"어머. 아직...안 가셨어요..."

"음."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지. 더 이상 많은것을 알려고 하지 말아야지...
나는 공부하러 이곳에 왔으니까 내 할일만 충실히 하면 돼.
시키는것만 열심히 하면...

"잠깐 얘기 좀 할까."

장교수는 말없이 스타벅스안으로 들어갔다.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내빼고 싶은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치긴 했으나..

그래도 나는 테이블을 싹 치우고, 코코아를 붙잡고 느릿느릿 까다롭게 음료수를 시키는 장교수를 기다렸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석이는...?"

"애나가...깨어났는데. 진정제를 더 투약할수 없다구요...진정시켜달라고...간호가가 부탁했어요."

장교수가 두눈을 아래로 깔고 작게 한숨쉬더니 커피를 마셨다.

"교수님...괜찮으세요? 안색이..."

"하버드 오니까... 좋아?"

"네?"

"한국사람들 하버드 최고로 좋아하잖아... 미국사람들도 그렇지만. 유럽에서도 호들갑 떨긴 마차가지더군."

"그건 왜요..."

"근데 하버드 졸업하고 나면 그럴거야...
내가 정말 잘난 사람인가?
하버드 이름앞에 내 이름이 먼저인지... 하버드가 먼저인지...
사람들이 내 앞에선 박사님 박사님 하며 존경하는듯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어떻게든 흉을 보려하지. 지가 박사면 다야?
또는 아니 하버드가 어떻게 그것도 몰라?
요즘엔 개나 소나 다 하버드라니..."

"왜...갑자기 그런 말씀을...하세요?"

"하버드가 별거인줄 알아?
특히나 대학원은 말이지...
합격과 불합격의 차이가 정말 우습지도 않아.
모든 시험에 만점을 받은 아이들은 오히려 너무 흔해서 눈에 띄기가 힘든 편이고.
오히려 조금 특이한 친구들을 눈여겨 보게되지.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자료가 뭔지 알아?"

"Statement of purpose 요?"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장교수...술먹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왜 저리 횡설수설이지? 
이 늦은밤에 나를 앉혀놓고 대체 입학과정 이야기를 왜 하는건데?

"너의 Statement of Purpose."

아... 내 입학 원서를...

"Admission Committee 라는 제도가 있어. 학교마다 다르지만, 우리 학교는 committee가 입학생들을 뽑지. 교수들, 현 학생들 그리고 admission office director들이 함께...너도 머지않아 한번쯤은 하게 될거야.
내가...마지못해 committee 를 처음으로 한번 해보았고..."

"이런 얘기..."

"물론 하면 안돼지. 누구든 입학원서에 대한 내용을 disclose해선 안돼. 그런데 나는... 좀 급하거든."

"뭐가...급하신데요."

"바쁘다고...해두지. 어쨌든."

"왜 이런 얘기를 하시는건지..."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해. 연서는 입학할수있는 조건이 충분히 있었어. 뛰어난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를 강력히 추천했던 이유는... 네 statement  때문이었어.
중학교 3학년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나뿐인 오빠가 공부를 시켜줬다고...그랬지.
그리고 논문은... 부모없이 자라난 아이들의 두뇌개발과 성취감에 대해서 쓰고싶다고...후로 그런 아이들의 카운셀링과 복지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다고."

"네..."

"지석이도...중학교 3학년때 부모님을 잃었어.
그리고 하나뿐인 누나가...공부를 시켜줬지...
너와 논문이나 리서치 관심분야도...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할말을 잃었다.
장교수가 왜 이런말을 나에게 해주는건지도...
마음한구석이 쓰리고 저려오는건
나의 아픈 기억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윤지석이 겪었을 아픔을 희미하게나마 동감했기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뭐요...?"

"너는 지석이를 바로잡아 줄수 있을거라 믿어."

"네? 제가...왜요? 전 그 분 잘 모르구요, 그리고 다른 사람 바로 잡아주려고 이 학교 온것도 아니예요. 교수님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저 지금 무척 불편하네요.."

손발이 떨리고 입술이 말라올 정도로 나는 당황했다.
소개팅이라도 하라는거야 뭐야.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나에게 윤지석을 붙혀주려고 하는지,
또 윤지석이 그걸 원하는지 장교수 자신도 모르면서, 더군다나 나에 대하여 너무 깊은 진실까지 다 알고있는 장교수..
그것들이 무척이나 나를 화나게 했다.

"오늘, 애나 일도 그렇고. 저에게 목걸이 걸게 하신 일 말이예요. 윤지석씨가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시는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제 statement 이요? 그 정도 우연은 얼마든지 많아요. 같은 한국인이라서요? 왜 저 한테 이러시는지... 제가 장교수님, 지금까지 존경해왔던 모습과는 너무나 틀린 상황이네요. 저 이만 가봐야 겠어요. 죄송합니다."

장교수가 일어서는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얘기 끝까지 들어."

무슨...할얘기가 아직 남았는데...

"마이크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 이용하는거야...
그리고 지석이는."

내 귀를 의심할수 밖에 없었다. 마이크가...나를 이용한다고?
장교수가 망설이는듯 하더니..

"지금. 누군가 잡아 주지 않으면 안돼."

"그게...왜 저라고 믿으시죠. 잡아주지 않으면 왜 안돼는데요? 윤지석씨와 장교수님은 대체 무슨 관계이시길래... 마이크가 절 이용한다는건...무슨 뜻이죠? 왜 그런 말씀을하시는건지."

"그건... 아직 말할수 없어. 내가 지금 이 말도 안돼는 짓거리를 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말은...
너에게.
부탁을하고 있는거야.
지석이를...
도와달라고."

힘이 쏙 빠지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겁게 들고있던 방패를 내려놓는듯한 기분이었다.

"왜...저에게"

"너는 그 아이의 아픔을 이해할수 있을거야. 동정이 아닌 동감으로...
너도 똑같은 아픔을 가졌으니까.
아니...그런데 지석이는 너보다 훨씬 더 깊은 아픔이 있지... 사랑하던 누나도 없으니까... 그 누나가 남겨놓은 애나는...
지석이가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을 되돌려줄지 모르는 아이니까..."

"제가...어떻게 하길 바라시는거죠.."

"곁에...있어주기를...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