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드릴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저를 낙제를 시키시던지 학교에서 내 쫓으시던지...
저 이제 그 장애인 학교도 안나가고 싶어요. 죄송합니다, 장교수님."

"뭐가 두려운거야?"

"두렵다구요? 아니요... 그런거 전혀 아니예요. 저는... 다른 사람들 사생활에 관여하고 싶지 않고.
이곳에 공부하러 왔으니 공부만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거구요.
지금 하시는 말씀... 솔직히 이해도 가지 않고. 더 깊이 알고싶지도 않아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저 혼자의 인생도 너무 버겁거든요."

장교수가 깊이 한숨을 내 뿜는다.

"그래. 이해해... 알았어."

"죄송합니다."

사실 장교수가 그리 쉽게 나를 놔줄거라 예상 못했다.
나까짓게 이렇게 내칠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건 나도 알았지만,
내 심정은 그랬다. 더 이상 알고싶지도 않고 깊어지기도 싫고.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이것만...알아둬."

장교수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있었다.

"니 인생이 버거운건... 바로 니가 혼자이기 때문이라는거."

다시 인사하고 돌아섰다.

걷기 시작했지만 장교수의 눈빛이 계속 느껴졌고...
그리고 그의 마지막 그 한마디가 가슴에 활로 쏘인듯, 징했다.

내가... 혼자라고.
그래..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공부를 위해서, 내 성공을 위해서, 오빠를 위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나는 시시덕 거리며 놀고 연예하고 몰려다니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편하게 지낼 자격이 없었다.
친구가 없는것은 내가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이었다.
마이크가 나를 이용한다고?
처음으로 나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가 더 좋아진건지 모르겠다.
이제는 조금 맘 놓고 친구도 사귀고 연예도 해보고 싶었던것 같다.

윤지석은...
그 사람은 왠지 마음을 쓰리게 한다.
아직 잘 아는사람도 아니고 많이 겪어본것도 아닌데, 그 사람을 만나면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저린다.
그의 과거 이야기를 이제 대강 알았고, 그의 가장 아픈 한부분을 보고나니,
더 더욱 나는 그를 보는것이...., 그렇다.  사실은 장교수의 말대로... 두렵다.

"연서!"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전화기 넘어 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왜 안왔어? 장교수가 기다리는 눈치던데. 너 잊었어? 이번 리서치 제대로 안하면"

"나 안하기로 했어, 마이크."

"제 정신이야? 너 낙제 받고 싶어?"

"총장님과 한번 만나볼거야. 부당한 점수라고 항의해보려고."

"뭐? 총장? 너 몰라서 그래? 장교수가 어떤 사람인데 총장이 니편을 들어줄것 같아?"

"마이크. 나 여기 놀러 온거 아니야. 점수, 무지 중요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건 내 자신의 한계를 아는거야. 이제 곧 학기 시작이고, 계속 거기서 봉사활동하면서 나 코스 마치기 힘들어.
마이크는 이제 논문 쓰는데 그곳 활동이 도움이 되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너 transcript에 낙제점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 잊고 하는 얘기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지금 내가 튕길상황이 아니지.
하기 싫다고 안하고 귀챦다고 관둘수있는 처지가 아니야.
아무리 장교수가 해서 안돼는 부탁을 했을지언정 - 이건 개별의 문제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알았어. 갈께. 장교수가 찾으면 좀 늦는다고 전해줘.."

속상했다. 이렇게 쉽게 구부러지는 내 자존심이...
그러나 자존심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학교는 나의 생명이다.

학교에 도착하니 장교수는 나를 본체만체 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내가 자존심을 굽히고 온걸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자료를 챙기려고 오피스에 갔는데,
윤지석과 마이크가 왠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서있다.
들어가려다가 잠시 망설이는데,

윤지석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래. 그렇게 생각했을수도 있어. 하지만"

"니 변명따위 듣고 싶지도 않아. 처음엔 신디. 이제는 연서 인거야? 너 나에게만 이러는것도 아니잖아?"

"그건 무슨 뜻이지?"

"Jonathan 소식. 들었어? 너 때문에 학교 관두고 거의 폐인이 됐다고 해."

"그건!"

"그것도 너 때문이 아니라고 할거야?"

"내가 관여할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관두자. 내가 너랑 이런 얘기 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 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연서한테 접근 하지마."

"너야말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 하고 다니지 마. 소문을 퍼뜨리려거든. 제대로 알고하던지."

"니말은 근거가 없어. 나는 네가 놀다가 차버린 내 첫사랑, 신디의 말을 믿어. 너의 논문을 훔쳤다는 누명으로 쫓겨난 Jonathan, 그 녀석은 그렇게 쫓겨나고, 너는 이렇게 멀쩡히 있는것도, 나는 참을수 없어. 다 장교수가 너를 뒤에서 챙겨주기 때문이라는거, 난 알고 있어."

"신디는 나와 사귀지 않았어. 그리고 Jonathan...그래... 그 자식이 왜 그런일을 저질렀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것이 있다면 되돌려 놓고 싶지만...내가 할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내가 그 논문을 썼다는것은 열두명의 패널리스트가 모두 증명해 낼수 있는 사실이었고!"

"Jonathan은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어. 너따위의 논문을 훔칠 사람이 아니었다고. 난 너를 믿지 않아. 그리고 신디...그것도. 니말은 믿을수 없어. 그 열두명이라는 패널리스트 모두, 너와 한통속 들이지. 모두 장교수의 측근들이고. 어쨌든 한가지만 기억해라. 연서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믿지 않는다면서. 경고는 왜 해?"

"내 경고가 우스워?"

"일부러 접근한적 없고, 일부러 피할생각도 없어."

이 상황에 갑자기 뛰어들수도 없고, 내 얘기를 하는데 무시하고 지나칠수도 없었다.
드디어 왜 마이크가 그렇게 윤지석을 의식했는지 이제야 알게되었고,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그 순간 나는 그저 내 마음이 기우는쪽으로 가기로 결정을 해버렸다.

"Hi, Mike."

나는 일부러 저 멀리 뛰어갔다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늉을 했다.

"아, 연서." 마이크가 나를 보고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고.

윤지석은 말없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려고 했다.

"어젯밤,"

나는 순간 그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

"별일 없었나요? 애나는... 좀 어때요?"

윤지석이 할말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이크가 옆쪽에서 윤지석을 노려보는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괜찮지.. 그래, 별일 없었어."

"선배님은...많이 피곤하셨겠어요."

"아니야."
윤지석이 나의 잡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내려 놓는다.

"미안하다. 난 병원에.. 가봐야 해서."

"저도 같이 가요."

"연서! 무슨 소리하고 있어? 우리 리서치는?" 마이크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고.

"어제도 신디가 도와줬다면서. 병원 갔다와서 내가 정리할께. 그래도 되지?"

윤지석이 더 많이 곤란한 표정이다.
마이크는 폭발 직전이고.

"너...왜 그래? 갑자기... 혹시... 우리 얘기 들은거야?"
마이크가 더듬거린다.

"응? 무슨 얘기?"

"아...아니야. 그래. 그럼 병원 다녀와. 애나...어떻게 지내는지... 나에게도 알려줘."

마이크에게 싱긋 웃어보이고 잠시 머뭇거리는 윤지석을 뒤로하고 먼저 문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윤지석이 따라 나왔고.

"병원엔... 나 혼자 가야 해."

"그래요 그럼. 병원 가는길만 같이 가요."

"무슨일...있었어?"

윤지석을 돌아보았다.

마이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윤지석은 비열하고 이기적인 바람둥이에 불과하고,
장교수가 그를 뒤에서 늘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는것은 사실이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윤지석은...
나와 똑같은 아픔을 지닌 고아.
자폐아 조카 애나의 삼촌.
하나밖에 없는 누나를 잃은 동생
세상이 아파서 더 아픈 사람에게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아무도 그를 믿지 않는다면
내가...믿어 주면 되지 않는가...
결국 장교수가 원하던 대로 그의 곁에 내가 있다면
우리는 둘다 혼자가 아니어도 되지 않는가...

장교수의 부탁은 화가날정도로 기분나빴다.
나의 속마음까지 움직이려는 그의 의도가 탐탁치 않았다.
그러나 윤지석의 두 눈동자안에 비취는 나의 모습은
상처를 감추려고 발버둥치는
그저 둥지잃은 새 한마리 같았다.
그리고 왠지.
그의 눈동자 속의 나는
오랜시간 잊고 있었던 보금자리를 찾은듯 안도의 한숨을 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