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석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마이크 편을 들어줘야 하는거...아니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그의 얼굴을 되돌아 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쓰리고 온 몸이 굳어지는것 같았다.

"우리 하던 얘기...들었잖아. 니가 궁금해 하던 얘기이기도 하고."

"선배님이 바람둥이에 실없이 시간낭비하는 방탕아...뭐 그런 얘기 말씀이세요?"

"근데 왜 나를 따라 나왔어?"

"너무 감격하실건 없어요. 마이크의 진심이 알고싶어서 그런거니까."

"역시 냉정하군." 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윤지석은 자신의 차에 정중히 나를 태웠다.
역시 여자들에게 잘 해주는것 - 몸에 밴듯, 자연스러웠다.

차를 타고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는 운전하느라 나를 볼수 없지만, 나는 그를 무안할정도로 바라볼수 있다.

"마이크와 신디가...사귄다는건 아셨어요?"

"알게됐지."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됐다는 말씀이네요?"

"그래."

"신디를...좋아했어요? 선배님도?"

윤지석이 차를 세우더니 나를 돌아본다.

"병원 다 왔다. 밖에서 기다릴래?"

"대답 피하시는 거예요?"

"면회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래. 미안."

"같이 들어가면...정말 안돼요?"

윤지석이 망설인다.  "왜?"

"그냥. 문밖에서 기다리기만 할께요. 그래도 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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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많이 밝아진 표정으로 윤지석을 맞아주었다.
그날 이후 아직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유리창뒤에서 애나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기웃거리기만 하는데,

내 옆에서 문이 확 열리더니 장교수가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선다.

"윤지석!"

윤지석이 돌아보니,
장교수가 그를 노려본다.

"나가시죠. 애나 앞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그렇게 애나를 위하는 놈이. 이따위밖에 못하겠어?"

"나가서 얘기 하시자구요."

"아저씨...엄마...언제 또 와?"

윤지석도
장교수도
할말을 잃고 그대로 굳을수 밖에 없었다.

애나가... 저렇게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적이 있었던가?

"애나...그건..."

"아저씨가 데려왔어. 그렇지?" 애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또박또박하다.

윤지석의 두 눈에 눈물이 짖게 맻혀온다.
장교수의 두 손이 부르르 떨리며, 애나의 갸날픈 두 팔을 잡아준다.

"애나...내가...누군지 알아?"

"엄마...언제 또 와?"

장교수는 조심스럽게 애나를 부둥켜 안고 소리없이 울기 시작한다.
윤지석은 어찌할바를 모른다. 기뻐해야 할지...애나의 마음을 가지고 모험을 벌인 장교수에게 화를 내야할지...

"우리 애나...정말 착하구나...이렇게 기다릴줄도 알고. 너무 예쁘구나.."

"언제 또 와?"

애나는 그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 한다.

곧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윤지석과 장교수는 병실을 나온다.

나오자 마자 장교수는 윤지석에게 고개를 돌린다.
밖으로 나가자는듯 고개로 신호를 하더니,
몇발자국 뒤로 따라가는 나를 봤는지 안봤는지...

"이래도...고집을 피우겠어?"
밖으로 나오자 마자 장교수가 호통을 친다.

"달라진건 없습니다."

장교수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는 표정인데,

"나도 참을만큼 참았어. 이제 내가 도울차례야."

"아직은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해요."

"니가 뭘 알아?" 급기야 장교수가 소리를 지른다.
윤지석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나는 지난 3년동안 오로지 이 연구에 매달려 왔어.
애나에 대한 일이라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연구증거도 나는 알아냈고, 여러가지 확실한 정보가 있어.
지금까지는 니가 잘난 그 보호자 자격으로 허황된 짓거리를 하는걸 내가 다 지켜봤지만
더 이상은 안돼. 더 이상 이렇게 니 한심한 치료방법에 맡길수 없어!"

"그래서...애나가 충격을 받던 말던. 신경이 다치던 말던 - 그 어린아이를 절벽까지 밀어넣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무식한 놈. 그 멍청한 생각으로 애나를 치료할수 있다고 생각해?"

"자폐는 장애입니다. 치료할수 있는 병이 아니예요. 치료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그러니 내가 너를 멍청하다 하는거야! 자폐가 아니야. post traumatic autism이 아니라고!
너 귀머거리야? 방금 애나가 하던 소리 못들었냐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말했어. 또박또박!"

"장교수님 천재이시죠. 맞습니다. 모르시는게 없는 대단한 분이시죠. 저, 멍청한 놈이라도 좋습니다. 하지만 애나는 저에겐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고! 장교수님 역시 애나를 많이 아끼신다는거 압니다. 이렇게 까지 관심가져 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랑은 달라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애나는! 내... 딸이야."

순간 시간이 멈추고 불던 바람마저 꼬리를 감출만큼.
고요한 정적이 주위를 사로잡았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아무도
감히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못했다.

"윤지석...너에게...배려한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그래서 니가 하는데로 내버려 뒀고.
물론 니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왔다는것도 알아."

"잠깐... 잠깐만요..."

윤지석은 차가운 길거리에 힘없이 주저 앉았다.
두 주먹으로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며,
울고있는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