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끝까지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어.."

"그게...무슨 소리죠." 
윤지석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저러다 쓰러지지 싶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 지영이와...내 사이에서 태어났어. 애나는."

"어떻게 그럴수가..."

장교수가 깊이 한숨을 몰아쉬더니 잠시 나를 돌아본다.

그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나를 까맣게 잊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장교수는 내내 나를 의식하고 있었던것이다.

"법적으로, 유전자로 밝힐수 있었지만... 그렇게 까지 해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단 한가지야. 애나를...
내게 맡겨."

윤지석은 혼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릴수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받쳐줘야 쓰러지지 않을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서있는 모습 자체가 불안했다.

"아니. 한번 해봐요. 법적으로, 유전자로.
나는 당신에게 절대로 못 맡겨. 절대!"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궁지에 몰리면 더 독해지는 사자처럼 그는 울부짖었다.

"내일 다시 오지. 지금은 너무 충격이 큰가보니.."

"모두 그런식인가? 애나에게도. 나에게도...우리 누나에게도...그렇게 충격을 가해서,
결국 장교수님 하고싶은데로,
원하던 데로 해온건가?"

장교수의 표정이 차가운 돌같이 굳어져 있다.

장교수는
돌아서는 윤지석의 어깨를 조용히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왜 이래요."

"지석아.
나에게 맡겨. 애나를...내가 고쳐봐야 겠다."

"이거 놓으세요. 교수님."

"비겁하다 해도 좋고
미친놈이라 해도 좋아.
이것만큼은 더이상 양보할수 없겠다."

"무슨 말씀이세요."

"니 누나...지영이는 너를 위해 니 자형을 택한거였어.
연구밖에 모르고...공부밖에 할줄 몰랐던 나보다는
돈이 많고 자비가 흘러넘치는 그 사람이
너에게 도움이 됐으니까.
니가 사경을 헤맬정도로 아파 입원했을때..
나는 논문을 마감해야 했고, 돈은 물론 없었고.
치료비가 없어 울부짖던 지영이는
니 자형에게로 갔던거야.
너를 위해 그 사람을 택했다는 지영이를...
나는 붙잡지 못했어."

윤지석의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않으려고, 입술을 악물었지만
소용없었다.

"결혼식 이틀전...지영이가 나를 찾아왔었어.
우리는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고...
애나가...
태어났지."

윤지석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두 눈을 감았다.

"이래도 법적으로, 유전자 밝혀내라면. 그래...
그렇게라도 한다."

장교수는 한숨을 길게 쉬고, 돌아 서려다가, 휘청거렸다.
윤지석이 그를 받아 주려는데,
장교수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연서는. 내가 오늘 빌려가야겠다. 넌 혼자 가라."

장교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교수님..."

"운전..할줄 알지?"

장교수는 주머니에서 차키를 빼들더니, 내 손에 철퍼덕. 쥐어 주었다.
그러더니 앞만보고 걷기 시작했다.
잠시 윤지석을 돌아 보니,
그는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 곧 뒤돌아 섰다.
눈물흘리는 모습을 똑바로 보여주기 싫었을것이다.

장교수의 운전석에 앉고나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괜...찮으신거죠?"

"내가 한 소리 다 들어 놓고 괜찮냐는 소리가 나와?"

"아니...그게 아니라...안색이 창백하셔서요.."

"난 원래 피부가 하얘."

이 상황에...농담이 나오나...? 하여간 예측할수가 없다.

"어디로...가죠?"

"아무데나."

어쨌든 엔진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장교수는 눈을 감더니, 낮잠이라도 잘듯한데

"전에 내가 했던 말있지..."

"네? 무슨 말이요...?"

"니 원서얘기... 지석이랑 니가 가까와 져야 하는 이유...그 나부랭이 말이야."

"그게.. 왜요."

"사실은... 사실은 말이지."

운전을 하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어 장교수를 힐끗 돌아보았다.

"너...
지영이를 닯았어."

하마터면 사고를 칠뻔 했다.
브레이크를 밟는다는게, 엘셀러레이트를 밟았다.

"무슨..."

정신이 흐릿해져서 더 이상 운전을 하면 안될것 같았다.

"또 다시 나는...
윤지석 그 녀석에게 지영이를 뺏기는 느낌...
모르지.
아마 아무도 모를거야."

장교수는 살짝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감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교수님. 제대로 말씀 좀 해보세요. 저 운전 못하겠어요."

장교수가 눈을 뜨고 나를 본다.
그의 눈가에 짙은 눈물이
내 가슴을 찌르듯.
아프게 한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있는건가.
그러니까...
내가 윤지석의 누나를 닮아서
지금까지 나를...
이용한거야?
애나를 위해서...? 그런데 나를 뺏긴다는건 무슨 의미인지...
무슨...
소리인지.

"걱정 하지마.
넌 지석이에게로 가게 될거야.
나에게는...
애나만 있으면 돼. 너는... 지석이에게...
지영이가 그랬던것처럼"
장교수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창백해진 안색에 입술빛이 파랗다.
그는 고통을 참는듯, 안간힘을 쓰며 입술을 깨문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어
물도 없이 알약을 집어 삼키고,
물병을 찾아 헤맨다.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교실에서 그가 떨어뜨렸던 약통...
그리고 사방에 흩어졌길래 내가 하나 주워 넣었던 알약...
그게 내 코트 어딘가에 아직 있을텐데?

아직도 물을 못찾고 헤매는 장교수 -
얼른 옆에 보이는 물병을 가져다 댔는데,
장교수가 나의 손을 붙잡는다.

너무 놀라서 소름이 끼치려고 했다.

그런데...
장교수는
조용히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아직은...
내가 할일이
남아 있어...
아직은...
할일이...많아..."

아무런 말도
할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오열을 지켜보며
나는 뭔가 내가 해야하는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
조용히...
내 손을 붙잡고 우는 그를
감싸주는것.
그리고
나도 모르게...그와 함께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