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갑자기 왜 그래?"

"미안해.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연서 편안할때 물어보고 싶었는데...
자꾸 윤지석과 엮이는 너를 보면서, 더 이상 기다릴수가 없겠다 싶어."

마이크는 짧게 한숨을 내 쉬었다.

"잠깐. 앉자."

온몸이 무너질듯 피곤했지만 마이크를 그냥 보낼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못이겨 마이크 옆 벤치에 자리잡고 앉는 나의
힘없는 어깨에 마이크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나마 피곤이 가시는것을 느꼈다.

"본의일수고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벌써 넌 윤지석과 많은 시간을 보냈어. 어쨌는 너는 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윤지석의 생활에 개입하고 있고, 또 그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가고 있지. 안그래?"

마이크는 내 속마음까지 훤히 들여다 보고있는것 같다.

"장교수가 시키는데로 장애인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일을 돕다보니 그렇게 된것 뿐이야.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아."

"인연이라는거. 우연이라는거...결코 가볍게 넘길수 만은 없다고 생각해. 벌써 우연히 윤지석과 만나게 되고 함께 있게 된게 몇번째인지 알아?"

그래...마이크의 말이 맞다. 그와 자꾸 엮이게 되는건, 장교수와 자꾸 마주치는건 분명 인연인듯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신디와 나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어.
나에게는 첫사랑이어서.. 정말 마음을 다해 사랑했는데,
그런데... 윤지석이 나타났지."

마이크가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금의 너처럼...신디는 그저 우연의 연속일 뿐이라고...윤지석에게 아무런 감정없다고 나에게 당부하곤 했었지.
그런데."

표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이크의 표정에, 아픔의 기억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어느날 나에게 와서 그러더라... 윤지석을 돕고 싶다고. 그땐 몰랐어 - 뭘 어떻게 돕겠다는건지...애나에 대한 이야기는 장애인학교에 가게되면서 근래에 처음 알게 된거니까."

"그럼 그런 설명도 없이 윤지석을 돕겠다고 한거야?"

"그리고 얼마안가서 신디가 나에게 말했어. 윤지석을...사랑하게 된것 같다고."

커다란 종이 땡땡 내 머리를 치고 울리듯,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거기까지는...참을수 있었어. 그저 내가 싫어지고 윤지석이 좋아졌다면...그래. 그럴수도 있는거니까."

"그런데?"

"두달쯤 지나고 신디가 술에 잔뜩 취해 찾아왔어. 몇시간을 서럽게...정말 가슴아프게 울었지. 윤지석은 자기를 이용했다고. 나에게 미안하다고...다시 시작할수는 없겠냐고 물었어.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 나와 절친하던 친구 하나는 윤지석이 쓴 논문을 복사해서 제출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쫒겨나갔지.
하버드에서 쫓겨난다는거...상상이나 할수 있겠어?"

"그건...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했잖아...?"

"내 친구가 얼마나 힘들게 그 논문을 썼는지 나는 바로 옆에서 지켜봤어. 반면 윤지석은 하루가 멀다하고 놀러다니는걸 내가 직접 몇번이나 봤고. 심지어 윤지석의 advisor을 안하겠다고 reject 한 교수님들이 내가 아는분만 해도 몇분이나 돼."

"왜...진작에 말해주지 않았어?"

"전에 얘기 했잖아...가까이 하지 말라고...이제는, 너가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할것 같아서. 험담은 나도 하고싶지 않았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또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수 있으니까. 하지만 니가 윤지석과 가까와지는건...더 이상 못보겠어. 그래서 말하는거야."

"하버드에서 쫓겨난...그 친구분은 어떻게 됐어?"

"한동안 거의 폐인이 됐다고 들었어. 직접 연락하려해도 연락이 되지 않아."

"Mike"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진심어린 눈빛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걱정하지마. 난 윤지석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사실 아직 마이크에게 대한 감정이 어떤건지도 잘...모르겠어. 함께있으면 좋아지고 설레는건 사실이지만,
난 이런 감정에 익숙하지 않거든"

"우리 함께 시간을 보내보면서...그 감정을 확인해보는건 어때? 난 너와 해보고 싶은 일, 해주고 싶은일이 너무나도 많아. 나에게 기회를 줘. 단... 우리 둘 사이에 다른사람이 끼어드는것...그것만 아니라면 난 오직 너에게 나의 모든 정성을 쏟을거야.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그렇게 하고 싶어."

"하루만...생각해볼께."

"하루?"
마이크가 조금 실망한듯, 그러나 곧 다시 미소짓고 나를 돌아본다.

"부담가지지 말고...생각해 봐. 그리고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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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전화기가 울렸다.
오늘은 조금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는데,

"여보세요.."

"연서. 미안해...부탁이 있어."

윤지석?

"뭔데요.."

"애나가...너가 와줘야 할거같아. 정말 미안해."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입견이라는건 이렇게 무서운건지...왠지 윤지석의 목소리도, 간절함도 거짓말같이 느껴지는건
내가 보고 느꼈던 윤지석보다 마이크가 페이트해준 윤지석에 대한 이미지가 더 크게 느껴져서 그런걸까.
결국 사람은 그런것이다.  단편적인 내 경험을 믿기보다는, 오래 겪었다는 다른 사람의 경력을 더 믿게되고 마는것.

"그래요. 병원으로...가면 돼요?"

그러나 나는 살면서 나를 판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경험했다.
가난해서. 고아여서. 여자여서. 아시안이라서. 영어를 퍼펙트하게 못해서.
그렇다고 내가 마이크를 믿지 않는건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 선입견으로 가득차서 윤지석을 거절하고 싶은 나자신을 나는 단호하게 걷어 찬것 뿐이다.

병원에 도착했을때,
내 눈앞의 광경은 참으로 가슴아팠다.

장교수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고,
윤지석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마중나온 윤지석의 팔목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피가 흥건히 고여있었다.

"어떻게 된거예요? 또 다치신거예요? 애나가?"

"너를...너무 보고싶어해. 미안하다."
잠시 땀으로 범벅이된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가엾다. 나는 그를 동정하고 있다.
결코 그에게 좋은 감정이나 설레이는 마음이 있지는 않다,
라는 확인을 하고 나서,
나는 윤지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들어가서...애나에게 이렇게 설명해줘.
애나가 크고 아름답게 자라나면, 그때 만나러 오겠다고...그렇게 인사만 해줘. 더이상 기다리지 않도록.
울고 매달리면...그때 내가 들어가서 말릴테니까...작별인사만 해줘. 부탁이다."

그렇게 말하며 윤지석은 조심스럽게 진주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병실안에 들어서자 마자,
애나는 나에게 뛰어와 안겼다.
그리고 그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왜 안왔어! 기다렸어. 애나 기다렸는데..."

장교수가 깊이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애나에게...
윤지석이 시킨대로 작별인사를 한다는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흔들릴 거라는 사실을, 장교수는 알고있었을까?
그래서 처음 그 목걸이를 나에게 준것이었을까?

"애나...또 올께. 자주 올께. 애나가 건강해질수만 있다면...언제든 올테니까...그만 울어...
울지마..."

"정말이야? 정말이지.." 애나는 계속해서 반복하며 그렇게 울다가 웃다가 한참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나는 애나를 무릎에 앉혀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그날 점심을 함께먹으며 그림을 그려주었고
정말 이상하리만치 정상적인 애나에게 비드로 팔찌를 만들어주고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병실바깥에서 장교수와 윤지석은 분명 말다툼을 하는지, 희미하게 높아졌다 낮아지는 대화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저 다른것을 잊고 애나와 함께 있는 시간에 묘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이유없이 사랑한다는것이...이런 느낌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자신의 존재감마저 잃어버린 애나의 모습에서, 조금은 어릴때 내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애나는 평온한 모습으로 낮잠을 청했고, 나는 그녀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병실밖을 나왔다.

윤지석과 장교수가 순간 침묵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두사람, 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내가 나타나자 입을 다무는 분위기였는데,

"너" 장교수와 윤지석이 순간 함께 버벅거렸다.

나는 풋...하고 웃었고,
윤지석은 한숨을, 장교수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장교수는 은근슬쩍 뺑소니를 치려한다.

"처음부터, 계획하신건가요?"
장교수와 윤지석이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애나의 치료를 위해서...저를 이용하신거냐구요."

윤지석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피했고,
장교수는 오히려 피식..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용당한다...글쎄. 아주 좋은일을 위해 나의 인생을 신께서 사용하신다...뭐 그렇게 볼수도 있는거 아닌가? 그런 목적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사람들, 나는 많이 봤거든."

"낙제점수를 핑계로 저를 끌어들이셨고, 그것도 모자라 윤선배님과 저를 엮으려고 하신게, 저를 사용하기 위해서? 장교수님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착각하고 계신거 아닌가요?"

"다 너를 위한거야."

"고맙습니다, 장교수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나중에...너도 알게될거야."

"아직 제가 모르는것이 남아있나요?"

"남아있지. 아주 많이."

장교수가 잠시 윤지석을 바라보더니,
"내 할얘기 할만큼 했으니. 나머지는 두 사람 할얘기 해."

장교수는 뚜벅뚜벅 걸어나갔고,
나는 한참 고조된 감정을 억누르느라 애를 썼다.

"선배님도...다 알고 있으면서 쑈하시는거예요? 처음부터 이러려고 저한테 잘해준거 아니예요?"

"나는 똑같은 실수를 두번 하고싶지는 않아."

"무슨...의미죠?"

"니가 궁금해 했지, 신디와 나와의 관계.
애나가...신디를 많이 따랐어. 그래서 내가 신디에게 부탁했었어. 도와달라고...
나는 그냥 부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신디는...그 이상을 바랬고...
애나가 너를 애타게 찾는것이 안타까와서...
전에 한번 만났으니까...그냥 작별인사만 부탁하고 싶었어.
미안하다."

"차라리 솔직하신 장교수님이 훨씬 낫네요. 선배님은...비겁해요.
저도 신디처럼 선배님을 좋아하게 될까봐 미리 걱정하는거예요?
아니면, 이번에도 하필 마이크의 여자친구라서 일부러 피하는척 하는거예요?
그냥 부탁하면 안돼나요? 우리 애나의 친구가 되달라고.
제가 마이크의 여자친구면 어때요, 그저 애나의 친구면 안돼는건가요?"

윤지석이 아무대꾸없이 내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잠시 나를 멎적게 만들었는데,

"그래...그래준다면...고맙겠다.
그렇지만...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을거야"

"왜 안돼죠?"

"마이크가...원하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그리고, 뭐요?"

"내가, 너를 붙잡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