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을거면 지금... 붙잡으세요."

윤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유심히 본다.

"무슨 뜻이야"

"지금이 아니면, 저도 안돼요."

"지금 붙잡으면...?"

한동안 우리 사이에 침묵이 계속 되었다.
내가 왜 이러지...
완전 바람둥이 아니야?
아직 마이크와 정리된 얘기도 제대로 나눠보지 않고.
이러면 안돼는데.
대체 내가 왜 저 사람에게 이렇게 쩔쩔매고 있지?
그의 침묵은...뭘 의미하는거지?

순간 돌아서는 나의 팔목을 윤지석이 붙잡는다.
그의 손길이 왠지 심장을 뛰게 한다.

헉!

하고 놀라버린 순간,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힘아리 없이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바보같이...네가 좋아졌어."

"그게 왜...바보인데요?"

"좋아하면...안 되는데"

"저야말로...이러면 안되는건데..."

"애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겠지..
장교수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또, 마이크.."

"선배님을 믿으면 안돼는데...자꾸 믿어져요.
믿기 싫은데...자꾸 믿게돼요.
저도...바보같이..."

윤지석이 피식 웃었다.
나도 멍청하게 따라 웃었고...
우리는 그렇게 바보같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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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서로 눈을 마주보기가 불편할정도로 서먹해진 마이크와 나는
리서치의 topic이 비슷했기 때문에 피해갈래야 피할수가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윤지석은 뭘 하느라 그리 바쁜지 캠퍼스에는 일주일에 한 두번 오는것이 고작이었으니...
library를 가도, computer lab을 가도,
늘 마이크와 마주쳤고,
그와 즐겨가던 Red line station 에 가도 만나고,
심지어 Kennedy School에서 택하는 정치학과 클라스에서는 나는 학생이었고,
그는 교수님의 TA였다.

전같으면 둘이 팔짱을 끼고 다니며 시시덕거리고 점심을 사먹고 함께 클라스로 뛰어 들어갔겠지만,
이제는 너무나 불편해진 우리 사이가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늘 내 편을 들어주었던 마이크와 썰렁한 사이가 되어버리니,
클라스에선 특히 조금 주늑드는 느낌이 들었다.

싸다 싸...
쌤통이야. I deserve it... 하며 내 자신을 욕했다.
너무 미안했고,
바람둥이가 되어버린 내 자신을 자책할수밖에.

"Let's see. who can summarize today's case study. Miss Ha?"

이 클라스는 법학과와 비슷하게 실제상황 공부를 위주로 한다.
교수님의 스타일은 소크라테스 방법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아무나 지목하고 막 발표하게 시키곤 한다.
그때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면 점수가 마구 떨어져 나가는데...

"Umm, today's case was about a pregnant woman who went to the hospital and was refused service because of her lack of insurance and the previous incarceration history."

"That's it?"
아주 무섭게 파고 헤치는것이 주로 이 소크라테스 방법의 특성인데...
다른건 몰라도 아직 발표에는 정말 자신이 없다.

"The case also deals with discrimination against colored, I mean, African American people in the white, I mean --- Caucasian neighborhood..."

"I wouldn't use those words, Miss Ha. Especially in this setting."

흑인...백인...이런 말을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데, 떨리니까 나도 모르게 헛소리가 나왔다.
얼굴뿐이 아니라 온몸이 다 열이 나는것 같았다.
피가 온통 얼굴로 몰리는것 같이 느껴졌고,

"Perhaps she didn't read the entire material - or stayed satisfied after the abstract?"
마이크가 이렇게 말한다...
다 읽지 않은것 같다고.
중점을 요약해 놓은 abstract만 읽은것 같다고...
주위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리 우리 사이가 불편해졌지만 이렇게까지 할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의 영어가 아직 짧아서 발표에 엉성하다는걸 그는 가장 잘 알텐데.
더군다나 내가 숙제를 안하고 클라스에 참석하는 사람이 아니란걸...

"Let's move on.  Sandra, your thoughts?"

클라스가 끝날때까지 내가 나의 실수를 만회할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도, 교수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고.
클라스가 끝나기 무섭게 교수님을 쫓아가려 했지만
그는 급히 약속이 있다며 사라져 버렸다.

내 옆으로 마이크가 스치고 지나갔다.

"마이크!"

그가 무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그렇게 까지 할건...없었다고 생각해."

"난. 내가 해야 할일을 하고 있을뿐이야. 교수님을 돕는것이 내 job이고."

"내가 숙제를 안해갈 사람이 아니란건 마이크도 잘 알잖아."

"글쎄. 요즘에 어떻게 지내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공부안하는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니...숙제를 안했을수도 있지. 아까 한 발표는...정말 창피할 정도 아니었어? 딱 윤지석 수준이던데."

"실망이야...마이크...이런사람인지 몰랐어."

"실망? 그래. 다행이네. 그럼 우리 이제 비긴거지?"

"뭐?"

"나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서로에게 실망한건... 마찬가지니까."

순간 마이크의 표정이...예전의 따뜻하던 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니가...자꾸 날 피하는거 같아서...왜 그러는지 나도 알아. 왜 미안해 하는지 이해해...
근데 이제...그만 미안해 하라고. 너에게 못되게 굴테니까...지나가면 째려보기라도 해."

안도의 한숨이 세어나오며, 조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알았지? dirty look이라도 주라고... 그렇게까지 피할거 없단말이야."

"미안해 마이크...정말...난, 마이크의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 그래서 피한거야."

"알아...안다고..." 라고 말하며 마이크는 애써 웃어주었다. 그런 그의 눈가에 조금 눈물이 맻혀왔다.

마이크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나도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짧은 인사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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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의 병실에 찾아갔는데,
오늘은 윤지석이 없고 장교수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봐 연서."

"네."

"오늘이. 마지막이야."

"네? 무슨..."

"들어와 보면 알아."

"무슨 말씀이세요?"

대답은 않고, 장교수는 내 팔을 잡아 당겼다.

내가 들어가니 애나는 활짝 웃으며 뛰어와 안겼다.

몇달사이로 그녀는 놀랍게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제 발작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고,
책을 읽기도, 쓰기도 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것도 많이 나아져갔다.
점점 눈동자를 맞추고 얘기하는것도 좋아지고,
행동하는것에 자유로움도 놀랍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근데 마지막이라니...

"애나. 이 사람은."

애나와 내가 동시에 장교수를 돌아보았다.

"니 엄마가 아니야."

나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고,
영문을 알수없는 나는 순간 애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니 엄마가 아니라고."

애나의 두 눈에 공포가 가득찼다.

"엄마야."

"아니야. 엄마가 아니고 하 연서라는 사람이야. 하. 연.서."

"엄마야. 엄마지?"
애나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제발 도와주세요....하는 소녀의 간절한 모습이었다.

"어...애나...나는..."

"니 엄마는 돌아가셨어. 니 언니는 니 친구야. 하 연서라는 친구라고."

"엄마야. 엄마야!"
애나는 소리를 지르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 품안에 꼭 안았다.

"애나..괜찮아. 괜찮아.."

"엄마야! 엄마야!"
애나는 귀를 두 손으로 가로막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니야!"

"교수님! 그만하세요!" 내가 말리는데도 장교수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애나는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듣고 놀란 간호사들이 뛰어들어왔지만,
장교수는 손을 들어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고,
그들 또한 장교수의 말을 호락호락 알아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가버렸다.

애나는 장교수에게 뛰어들어 손으로 발로, 차고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장교수는 오히려 나를 떠 밀었을뿐, 애나가 하는데로 화풀이를 하게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그렇게 싸웠을까...
나는 지쳐서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었고,
애나는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장교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갈대같이 힘을잃고 쓰러진 애나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 손과 팔목에도 물어 뜯긴 자국이 여기 저기 말도 아니었다.
옷도 거의 찢어진 상태였다.

"교수님...왜....?"
나의 한마디를 듣고 잠시 나를 돌아보던 장교수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더니 비틀비틀 돌아섰다.

"교수님,"

"소란떨지말고 조용히 나와. 애나 잠들게."

병실밖을 나오니 장교수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왜 그렇게까지...꼭 그래야 했어요? 요즘에 정말 많이 좋아졌는데...그렇게 충격을 주셔야"

"좋아졌다고? 겨우 그걸가지고 만족하라고? 애나는 완벽하게 정상이야. 모든걸 정상으로 되돌려 놔야해."

"정상이라구요?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런 말씀을"

"그 아이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지. 그러나 그 뇌에서 일으키는 작용은...그리고 감정. 생각...그런것들은.."
장교수는 숨이 가빠져 말을 잇지 못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장교수가 스르륵...
옆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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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석이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그와 나는 걱정스럽게 쓰러져 눈을 뜨지 않는 장교수를 보고 있었다.

"의사는...뭐라고 해?"

"아무말도 해줄수 없데. 장교수가 그걸 원한데."

"왜 그러셨을까.."

그때,
조용히 장교수가 눈을 뜨더니....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지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