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애나는 실컷 울려놓으시고...왜 이러세요.... 저 연서잖아요."

장교수가 피식 웃으며 두 눈을 감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실 윤지석은 애나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은 장교수에게 좀 화가 나 있었는데,
그 눈물을 보고는 할말을 잃고 나의 눈을 마주보았다.

장교수는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는지, 찡그리며 벽에 기대어 간신히 앉았는데,

"왜 일어나려 하세요. 좀 쉬세요." 윤지석이 장교수의 어깨를 부축해 주었고,

"지석아."

윤지석은 장교수의 눈을 마주보았다.

"애나는...괜찮을거야. 이제 더 많이 좋아질 것이고...
나는... 여행을 좀 다녀올 생각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몸도 안좋으신데"

"지영이와 약속한 것이 있어.
어쨌든...
지석아. 애나를..."

장교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부탁한다. 그리고 연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장교수는 처음으로 친절한 미소를 보였다.
이 사람이 저런 따뜻한 표정도 지을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지석이를...부탁해."

"부탁이라뇨...무슨..."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거 뭐 시아버님도 아니고...

장교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둘이 다 잘 알아서 하겠지만."

장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윤지석의 손을 붙잡았다.

장교수를 처음 만났을때...
그에대한 소문으로만 그를 알았을때...
그리고 그의 클라스에서 쫓겨날뻔 했을때,
낙제 점수를 받았을때,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너무나 뛰어나서 다른사람들을 모두 무시하는 건방지고 arrogant 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그는 상처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사랑을 잃고,
자신의 딸에게 아버지라고 한번 불려보지도 못한채 살아온...
인생을 학문에 희생했다해도 좋을정도로 책과 연구에 몰두해온 그의 지나온 시간들이,
결코 불행하다 할수는 없지만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고 느껴졌다.

그는 이제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진정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않아 지금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것일까.
지석의 누나와 한 약속이라는것은 무엇이었길래...

윤지석와 나는 병실을 나오며 한동안 병원 주변을 걸어 다녔다.

"장교수는 너를... 많이 믿는 모양이야."

윤지석이 피식 웃었다.

"당연하죠. 선배님보다는 철이 좀 들었잖아요."

"그래? 그렇다고 생각해? 내가 철이 없다는 증거는 뭔데?" 그는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요즘에 도대체 뭘하고 돌아다니시는 거예요? 그동안 애나도 장교수님에게 맡겨놓고...학교에도 얼굴 안 보이고.
공부하는것 같지는 않은데...논문을 쓰고는 계신거예요?"

"왠지 잔소리를 듣는것 같은 기분이다..."

"장교수님이 왜 저에게 부탁한다 하셨겠어요?"

윤지석이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하버드는 참 좋은 대학이지? 박사학위는 학비를 다 대주니.."

"그렇죠...그런데요?"

"박사학위 마치면 먹고 살아야 할거 아니야."

"공부를 마치기는 하실거예요?"

"Defense 했으니까.. 조금만 수정하면 끝날것 같은데"

"어쩜! 어떻게 그렇게 혼자 말도없이!"

"그럼 논문을 말로 쓰는 사람도 있나?"

"다들 떠들썩하게 난리치면서 쓰죠. 선배님은 그동안 논문 쓰는사람같지 않았는데...그래서 다들 학위 포기한 사람인줄 알았잖아요. Research assistant 도 안하고...internship도 안하고."

"애나가 내 논문이야. 그 아이가 --- 그리고 애나와 비슷하게 아픈아이들이 좋은교육을 받는것이 내 인생의 목표니까. 그 학교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는데 다른 research나 internship이 필요한가?"

순간 내가 작아지고 윤지석의 엄청난 어른스러움에 부끄럽기 까지 했다.

"왜, 너무 존경스러워?"

"조금.."

윤지석이 웃었다.

"그런데...박사학위 마치면 먹고 살아야 한다는거...무슨 뜻이예요?"

"일자리 알아보고 있다고."

"아..."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멀리 갈지도 모르겠구나..였다.

교수직을 찾는다는것은 정말 어렵고 진을 빼놓는 일이다.
물론 명문대를 졸업하면 조금 더 수월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미국 전역에 원서를 뿌리고 몇군대를 돌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어려운 selection 과정을 거쳐서 tenure track 자리를 찾으려면 여기가 좋고, 저기는 싫다는 식으로 지역을 골라잡기가 힘들다.  인터뷰를 잘 마치고도 6개월, 일년씩 기다리는 것도 흔한 일이다.

잠시 할말을 잃은 나에게 윤지석이 팔을 걸쳐 어깨를 안아주었다.

"왜...걱정돼? 누가 나같은 사람을 써줄까...싶어서?"

"아무리...어디서든 데려가겠죠."

"아...그럼 내가 멀리 도망갈까봐 그러는구나."

하며 그는 하하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붙잡는다는건 언제고.. 벌써 잊으셨나 봐요."

"걱정마. 원서는 딱 한군데에만 넣을거야."

"네? 그게 무슨...적어도 열군데는 해 놔야 확실한 자리가 한두개 나온다 그러던데요. 그 중에서도 인터뷰하고 경험과 맞는 과목에 테뉴어 자리 찾으려면..."

"내가 교수직을 알아본다고 했어?"

"거의...그렇잖아요...교육학 전공한 사람들. 아니었어요?"

"곧 알게될거야."
하며 그는 미소짓고 나의 두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자신쪽으로 돌렸다.

"왜...요...?"

떨리는 맘으로 그를 올려보니, 그의 눈빛속에서 아름다운 밤하늘의 광경이 그려졌다.
빛나는 별들...어두움을 꿰뚫고 나를 마주보는 한가락의 빛줄기..

"고마와...나를 믿어줘서.
믿기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나를 믿어줘서.
말로는 차가웠지만,
니 눈빛은 거짓말을 못하지..
그리고 그 눈으로 넌 늘 나에게 말했어.
나를...믿는다고."

"선배님도...
겉으로 보기엔... 안그런것 같았지만,
선배님의 눈을 보면,
분명 진심이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애나를 사랑하는 그 모습이...
그 눈빛에서 본 진실 그대로 였으니까."

추운바람이 순간 우리사이를 지나치며 불어왔는데,
윤지석은 품에 나를 끌어 안아주었다.

따뜻하다...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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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트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장교수의 알약.
그것은 신경 안정제라고 했다.
panic attack증상이 심한 사람들이 먹는 약이라고 아는 언니가 슬쩍 알려주었다.
늘 곧 죽을사람처럼 쓰러지고 헐떡거리던 그는...공항장애를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장애의 특이한점 한가지가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라고 했다.
실제로 팔다리가 마비되고, 어지러움을 느껴 쓰러지기도 하고.
또 한동안 정신을 잃기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늘 그렇게 시간이 없다고 말한거였는지..
그럼 장교수는 괜찮은걸까?

장교수는 말도 없이 사라진 후 연락한번 없었고,

정말 그의 말대로 애나는 하루하루 진도를 보였다.
나와 만날때마다 한동안 울며 엄마를 찾긴 했지만,
그래도 약물치료와 물리치료, speech therapy 등에 잘 적응해 나갔다.

윤지석은 논문을 마치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듯 했고, 나 역시 학교 공부에 매달려 정신없는 몇개월을 보냈다.

어느덧,

보스톤에 여름이 왔다.
밤중에 헉 하고 깨어날 만큼 더운 여름.
온몸이 찐득거리도록 땀이 나지만,
풍성한 햇빛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시내한가운데를 가득 채우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여름날.

클라스를 모두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는데,

메일박스에 두개의 봉투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professor Jang 이라고 써있었고,
다른 하나는 윤지석이 보낸것이었다.

어느것을 먼저 열어봐야 하지?
망설이다가,
장교수님이 보내신 봉투를 먼저 열어보았다.

어머나!

너무너무 놀랄일이었다.

6개월만에 처음듣는 그의 소식.
장교수가 보내온 봉투안에는 청첩장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노트.

'이번 Sabbatical 동안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영이와 했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와....
그럼.
장교수가 지영씨와 했던 약속은 꼭 새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로 한것 이었을까...
상상도 못했던 그의 결혼소식에 조금은 황당하고...
어떤사람을 만났기에...
진정 그 짧은 시간에 사랑이 시작된건지, 아니면 미리부터 키워온 사랑이었는지.
어쨌든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쁘기도 했다.

윤지석은...뭘 보낸걸까.
이 사람도 아주 황당한걸 보냈으면 어쩌지...?
못만난지 벌써 이주일이 거의 되가는데,
원서는 하나만 낸다더니,
뭘하느라 그리 바쁜거야?

봉투안에는...
바로 그 하나의 원서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지?


이름: 윤지석

나이: 35세

성별: 남자

직업: Director of Special Education Research at Rand Corporation

연봉: XXXXXX

몸무게, 혈액형, 피검사 결과, 은행잔고등...

푸웃...
웃으며 그의 원서를 읽어 내려갔다.
맨 아래 사인칸에는
그의 흘겨놓은 글씨로 이렇게 써있었는데...

연서야,
나, 네 남편 해도 돼?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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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쓰는동안에 고민이 참 많았고, 수정할 시간이 없어서 있는 그대로 올린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늘 받아주시고 용기주신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구요,
너무 서둘러 끝나 버린듯 하여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싸우는 연서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뭐라 한다하여 휩쓸려가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믿는 진심에 나의 마음을 맡기는 내 자신, 그리고 독자님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또 천재와 바보는 백짓장 차이라는 말처럼 -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누구든
결국 비슷비슷하더라...는걸 제 느낀대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무조건 저를 믿어주시고 끝까지 읽어주신 한분한분께
정말 큰 절 올리고 싶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