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집에 도착해보니 할머니는 주무시는데 공주는 여기저기 낙서를 하며 뒹굴고 있다.

"공주야 - 아직 안잤어? 이렇게 늦게까지 안자면 어떻게 해?"
사실 공주의 피곤해서 풀어진 눈빛이라도 볼수있어서 고맙긴 하다.

졸려 죽겠는데도 엄마가 너무 반가와서 공주는 활짝 웃는다.

나의 천사...나의 희망.

꼭 안아서 왔다갔다 몇번만 하니 금새 스르르...잠에 든다.

이제 18개월. 많이 아프고 힘들었던 첫해를 지나고 이제 제법 말도 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

공주야 미안해...

버릇처럼 늘 중얼거리는 한마디.

너같이 예쁜 천사를 지워버리려고 했어.

내 인생이 싫어서 그랬어. 

니가 미워서가 아니라...

이렇게 망가진 엄마에게 너를 불러오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너도 망가질까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렇게 울었는데도 아직 남아있었나? 눈물이라는것이 참 끈질기다.

임신한 사실을 알고 머리채를 쥐어잡힌채 병원에 끌려갔던 기억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에는 나도 그냥 그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하려고 했다.

그런데 왠지 오기가 생겨,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이곳, LA.

현실에 닥치고 보니 

먹을것도 없고 갈것도 없고,

병원비도 없었다.

숨어 지내며 아이를 혼자 낳아 기를 생각을 하니 말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 혼자 눈물을 질질 흘리며 다시 클리닉으로 발걸음을 옮기고야 마는 내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 곳에서 나는 생명의 은인을 만났는데...

바로 지금 옆에서 코골며 주무시는 할머니.

그 날, 클리닉으로 터벅터벅 향하는 내 손을 슬며시 끌어내시던 할머니.

"학생 - 이렇게 예쁜 학생이 애기를 낳으면 엄마 닮아 아주 많이 예쁠거야."

질질 울고있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영문도 모르시던 할머니는 그렇게 말을 꺼내셨다.

"네? 제가...애기..지우려는거...아셨어요?"

"에그..뻔하지 그럼.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이런곳에 오는게...다 그 이유잖아. 

내가 오늘 시장보러 이시간에 나온것도. 바로 아가씨를 만나기 위해서 였어보다." 

"그게...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젊을 적에...아기를 낳을수가 없었어. 그렇게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우리에겐 아기가 생기지를 않았어. 

그래서 나는 일부러 이 마켓으로 장을 보러오지.

가끔 아가씨같이 울고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거든.

내 살아있는 동안에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한 두번 이라도 생각 더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오지랖이야. 늙은이 오지랖..."

그렇게 말하며 웃으시는 할머니의 눈가에 선한빛이 비췄다.

"할머니...저는. 이 아기 지우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돈도 없고. 갈곳도 없어요."

엉엉...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울며불며 털어놓았다.

순간 할머니 표정이 굳어지시더니, 입술을 굳게 다무시더니,

"그래? 그럼..."

"전 나쁜엄마예요. 예쁜 아기...가질 자격이 없어요."

"울지마. 우리 만난건 다 하늘에서 계획한 인연이니까. 애기... 내가 키워줄께. 우리집으로 가자."

"네?"

너무나 말도 안돼는 상황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기반잡고 애기 좀 크면...그때 독립하면 되잖아. 당분간은 우리집에서 몸조리하고, 애기 낳고...돈 좀 벌 동안 내가 애기 키워줄께."

거짓말. 이런 일이 있을수나 있나?

"말도...안돼요."

할머니가 선한 눈빛으로 웃으셨다.

"자. 이리 와. 괜찮다니까"

어차피 나는 갈곳이 없었고 혹시나 이 할머니가 거짓말을 하는 나쁜사람이었다 해도 잃을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할머니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공주는 태어났다.

천사 할머니 덕분에 태어난 나의 아기는...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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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가게문을 여는 날인데, 

벌써 문이 활짝 열려있다.

어제 밤에는 급해서 그냥 갔지만, 어젯 밤, 그 젊은이가 누군지 오늘은 꼭 알아내야지...

어라?

"일찍 오네요?"

그는 팔을 걷어부치고 내가 어제 청소해 놓은 바닥을 다시 닦고있다.

식당을 살펴보니 지저분한것들은 싹 없어지고 아주 몰라볼 정도로 깨끗하다.

"이게...뭔 일이예요? 대체 누구신가요?"

그가 나를 보고 피식.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이신우라고 해요. 같이 일해도 괜찮겠어요?"

"네? 같이...일을 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서 오셨어요?"

"보스턴에서 왔어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분명 부티나는 귀공자 타입이었는데...?

그는 말없이 청소를 계속한다. 그 후로는 말을 걸어도 별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아니요... 그 정도 뿐이다.

"여기서...잤어요?"

그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본다.

나도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하는데,

아... 그만 좀 하란 뜻인가?

싶어 돌아서는데,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지수요. 윤지수."

"그쪽 말고, 아줌마는 언제 오셔요?"

"네? 아줌마요?"

"주방일 하는 젊은 청년 하나 하고...요리하는 아저씨, 웨이트레스 두분, 그리고 또 주방일 하는 아줌마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아....제가. 그 아줌마네요."

"어려...보이는데?"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히 어려보이죠. 이제 21살인데.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진 못했다.

공주엄마... 주인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까먹으시고 곧잘 공주 엄마..라고 부르셨는데.

이 사람은 그걸 그냥 '아줌마'로 기억한거다.

식당이 깨끗하게 치워졌으니 내가 할일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주방에서 그릇을 정리하고 반찬을 꺼내오고, 장을 보러 나가려는데,

"어디 가요?"

"장 보러요."

"나도 가요, 그럼."

"이것 보세요. 대체 누군지 자세히 알아야, 제가 일을 같이 할것 아니겠어요?"

"주인 할아버지...손자예요. 

할아버지...

.. 돌아가셨어요."

순간 그의 표정이 많이 안좋았다.

그 말이 하기 싫어서...힘들어서, 그랬구나...

"어떻해요. 찾아 뵙지도 못하고. 죄송해요... 전. 연락도 못 받고."

"그동안 식당일 맡아 해줬다면서요? 고마와요."

"아니예요. 그동안 할아버지가 정말 잘 해주셨는데..."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닦아낼것이 없어 두리번 거리는데,

그가 허리에 둘렀던 셔츠소매를 건내준다.

"아..아니예요. 좋은거 같은데."

"어차피 빨아야 해요. 괜찮아요."

얼른 내 소매로 닦아내 버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이제부터 이 가게 주인이신 거예요?"

그가 잠시 생각하는듯 하다가 고개를 내젖는다.

"아니요. 아니예요."

"그럼...파신거예요? 가게?"

"주인은. 아마 저희 숙모가 가져가시겠죠."

"아...그럼 당분간 여기 계신거구나."

"글쎄요.."

"보스턴에서 오셨다면서요. 학생같아 보이는데..?"

"학비가 없어서 학교는 휴학했어요."

"학비가...없다구요?"

그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물어보기가 미안했다.
그만큼 그의 표정에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어찌된것인지는 내가 다 알수 없으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사람의 표정만 봐도 그 심정을 알아본다.

나는 그의 아픔을 볼수있었다.

장을보고 이것저것 들고 가게로 오려면 내 팔이 빠지도록 아프다.

그런데 오늘은 이 사람덕분에 아주 편하게 다녀왔다.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멀리서도 반짝일만큼 깨끗한 구두가 먼저 눈에 뜨인다.

"신우야."

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쁜 옷과 액세사리로 장식한 아름다운 여자분이 서 계시다.

신우란 사람은 한숨을 먼저 쉬고는 고개숙여 인사하는데,

"오셨어요."

"왜 너가 여기에 와있니?"

날카로운 목소리에 내가 다 흠칫하는데,

"네가 있을곳은 아니잖아?"

"그런가요?"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뭔가 다른 뜻이 있는듯.

"그쪽은 부엌일 하는 공주엄마...맞죠?"

"아...네..."

"들어가 보세요. 오늘 주급드리러 왔어요. 잠시 얘기 마치고, 뵙도록 하죠?"

"네..."

부엌으로 들어가며 신우라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데,

그는 무척 씁쓸한 표정으로 그 여자분을 마주보고 서있다.

"여기서 니가...일이라도 하겠다는거야?"

그가 한참동안 말이 없다.

"숙모는...니가 여기 있는게. 용납되지 않는다. 니가 뭘하고 살아도 난 상관없는데, 내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잠시 그녀를 노려보는듯 하다.

그녀가 가소롭다는듯 미소짓더니,

"아니...갈 곳이 없어서 온거야? 하긴. 지금 상황에 니가 어디를 가겠니..."

부엌창문으로 슬쩍 내다보니, 그의 주먹이 약간 흔들리는듯...참고있는 그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지내던지. 청소나 좀 하고. 설겆이도 좀 하고. 다른청년은 내 보낼테니까. 니가 하던지.

근데..너. 설겆이가 뭔지는 아니?"

그가 분노를 참으려고 숨을 들이키더니,

"네. 그러죠."

"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 해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니네 엄마같았으면 우리 정우에게 이렇게 해줬을까?"

그여자는 그의 눈길을 피하는데,

"아, 공주엄마. 여기 주급. 그리고 그 민수..라는 청년은 이 봉투 전해주고, 이제 그만 나오라고 하세요. 아버님 말씀대로라면 공주엄마가 믿을만하다고 하시던데, 믿어도 되죠? 여기 요리사 아저씨 주급도 두고갈께요."

"네..."

"그럼 믿고 가요. 아, 참...그리고 여기 신우... 일 좀 잘 가르치고, 게으름 피우거나 잘 못하면, 연락 해줘요. 알겠죠?"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는데 피식 웃더니, 

식당 밖으로 나간다. 

숙모...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젊어보이는 여자다.

내가 전혀 알수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왠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이신우. 그를 돌아보는데, 그는 어이가 없다는듯 의자에 주저앉는다.

"공주... 딸이름이...공주예요?"

"아..." 화제를 바꾸고 싶은가 보다. "네. 공주 맞아요. 우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예요. 전 첨엔 좀 맘에 안들었지만...할머니가 지어주신거니까...전 할머니 말씀은 뭐든지 듣거든요."

그가 피식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