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에 특석이었다.

쓰러진 나에게 수면제를 먹여서 아주 더 쓰러지게 만든 모양이었다.

깨어나자 마자 내손을 꽉 붙들고 있는 준혁의 손부터 집어 던지려는데,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공주....공주야..."

"지수야, 걱정말고 편히 쉬어. 우리 지금 공주한테 가는거니까."

하며 그 짐승같은 놈이 배부르게 먹은 사자마냥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평상시에는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말수가 적고, 조심스러운... 그런 그에게 짐승같은 포악함이 있다는걸 아는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제 화를 낼 기운은 없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울긴..."

그때 스튜어디스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나타났다.

"깨어나셨네요. 필요하신거 있으신가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얘가 몸이 많이 약해요. 비타민 물이랑 죽..아, 지수 너 전복죽 좋아하지? 그걸로 가져다 주세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전복죽은...이곳에 재료가 없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공항 도착 하자마자 준비해 놓으라고 하시고 비슷한거라도 좀 가져오세요."

"네. 많이 걱정되시나봐요. 해물로 죽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정말 부럽네요." 하며 수줍게 웃는 그녀...

기가막혀서 눈물도 뚝 그쳤다.

"뭐 하는거야. 어디로 가는거야?"

"지수야, 미안해...내가 화가 나서...정말 다시는 너에게 아픈일 없게 하려고 그랬는데."

늘 나오는 레파토리다...그러니까 나를 화나게 하지 말지... 왜 그랬어. 진작에 나를 따라왔으면 나도 안그랬을껄...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는 자꾸 나쁜놈이 되어가잖아...등등.

"무슨짓을 꾸미냐고."

"말 험하게 하지마. 나 또 화난다."

미친놈...이란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아직은 공주가 어디있는지 모른다.

"공주는."

"지금 공주한테로 가고 있다니까?"

"어디로!"
힘을 주니 온몸이 깨지는것처럼 쑤셔왔다.
고통스럽게 찡그리는 나를 보더니, 그는 또 배부른 사자 미소를 지었다.

"그것봐...성질부리면 너만 더 아픈거야..."

스튜어디스가 죽을 내왔다.

그가 조심스레 떠주는 죽을, 물론 그의 얼굴에 확 집어 던져서 화상이라도 입히고 싶었지만,

공주를 보려면 힘을 내야한다는 생각에 꾹 참고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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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전복죽을 싸들고 그의 부하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그의 이름은 석이라고 한다. 장 석. 

"지수 아가씨, 오랫만에 뵙습니다."

내가 앉은 휠체어를 그가 밀려고 하자, 준혁이 그를 가로챈다.

"내가 밀거야."

"실장님. 사모님께서"

"쓸데없는 얘기는, 나중에 하고."

"공주는요? 공주는 어디있어요?" 내가 끼어들자 석이 순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네? 공주..요?"

"집에 있다고 했잖아." 준혁이 말을 가로채고,

석의 표정만 봐도 뭔가 잘못된 것임을 알수있었다.

집으로 들어가기전에, 

준혁은 나를 미장원에 데려가고 옷도 새로 사서 입혔다.

그는 나를 아무리 때려도 왠만하면 얼굴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내 몸속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지 못한다.

"나를 이렇게 차려입혀서 어쩌겠다는거야."

"왜그래? 이쁘고 좋잖아. 정말 오랫만이다. 이렇게 예쁜 니 모습. 공주가 얼마나 좋아할까?"

그래... 공주만 다시 볼수있다면 내가 무슨짓을 못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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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안으로 발을 디밀다가...멈칫. 했다.

"왜, 옛날 생각나서...무서운거야?"  그가 다정하게 소곤대는데, 그얼굴에 침을 뱉고 싶은걸 간신히 참았다.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 층계를 걸어서 올라가지 않고 머리채로 잡혀 끌려갔었다.

뱃속에 아기가 다칠까봐 필사적으로 배를 보호하느라 온 몸이 까지고 피가 나도록 상처가 났었다.

그 계단들은 거짓말 같이 하얀빛을 내며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현관안으로 들어서는데, 

공주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준혁이가 거기까지 날 속인건 아니었구나!

정말로 공주가 있구나!

정말이었어!

순간 고마와지려고 까지 했다.

나의 공주와 다시 만날수 있다니!

"예진이 눈좀 가려줘."

예진이?

"네, 도련님."

"싫어, 싫어!" 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는 공주의 목소리를 따라 뛰어들어가려는데, 

준혁이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방에서 놀게 데려가."

"네."

공주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그래도 공주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따라가려는 나를 준혁이가 다시 잡았다.

"왜 이래!"

"인사 먼저 드려야지."

돌아보니 준혁의 부모님이 소파에 앉아계신다.

순간 식은땀이 맺혔다. 

"너 무슨..."

"어머니 아버지, 저 왔습니다. 지수. 기억하시죠?"

그분들도 놀라실법 한데, 덤덤한 모습이다.

"여기 앉아라."

사모님의 차분한 목소리.

떨리는 몸으로 비틀비틀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여전하구나. 인사도 할줄 모르고."

인사? 그녀를 노려보았다. 

사모님도 내 눈길을 피하는듯 하더니,

"우리집에서 식모일을 하고 싶다고?"

"네?"

놀라서 그녀를 올려다 보는데,

"근데 집안에서 일하는건 좀 곤란하고...예진이가 혼란스러울테니까."

"예진이? 예진이가 누구예요?"

"목소리 못 들었니?"

"공주...공주가 예진이라구요?"

사모님이 소리내어 웃으셨다.

"얘...공주가 뭐니? 요즘세상에 촌스럽게. 어쨌든. 밖에서 정원일이랑 그린하우스 농사 정도. 그리고 장보는 일.. 여기서 식모 아주머니 시키시는대로 보조하는 일이나 해라. 집안에는 절대로 발 들여놓지 말고. 예진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다시 보내버릴테니까. 한 일년이면...예진이가 널 싹 잊겠지. 그때부터는 부엌일도 좀 보고. 아... 그치만 새 애기 보는자리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

"무슨...말씀 하시는거예요?"

"여기까지만 하자. 준혁아, 위원님이랑 난 이만 피곤해서."

그의 아버지는 나를 잠시 돌아보시고는 혀를 끌끌 차셨고...

"무슨...일이야? 너 대체 무슨 일을 꾸민거야?"

"공주, 니 손으로 키우게 해주는거.. 이방법밖에는 없었어."

"뭐?"

"나 결혼했어."

기가막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짐승같은 놈이 나말고 다른사람과 결혼을 했다니 차라리 다행이지만,

"그런데? 왜 나랑 공주를 여기로 데려 온거야?"

"공주. 내 딸이야. 그런곳에서 너같이 살게 할수는 없잖아?"

머리가 띵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들 하나 더 낳아주면... 그때는 너 가고싶은데로 가게 해줄께."

눈앞에 보이는것이 컵이라 그걸 집어 던지려고 하는데, 석이가 내 두 팔을 잡았다.

"어디다 손을 데?"

하며 준혁이 말렸고,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따귀를 때렸다.

"이런 경거망동은...오늘까지만 봐줄께. 응?" 그가 웃으며 나의 턱을 집어 들었다.

"뭐? 경거망동? 넌 짐승이잖아. 짐승은 말로 안통해."

"그래. 너같이."

"당장 공주데려와. 떠날거야."

"내 아내의 집안은...우리 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사돈이거든...그래서 내가 효도 한번 했어.

 근데 글쎄 아기를 못 가진데...지난 삼년간...그렇게 노력했는데 안 생기길래...요근래 알게됐어."

삼년...?

머리끝까지 불이 타는 심정이었다.

"그래서...날...찾아왔단 말이야?"

"넌 세상에 천사가 있다고 믿지?"

"무슨 소리야!"

"할머니 말이야. 넌 지금까지 그 할머니가 천사라고 생각했지?"

숨이 멈출것 같았다.

"내가 부탁드린거야. 난 너를 포기할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지...그냥 결혼생활이 안정선에 들어가면...찾아가서 널 가끔 보려고...그리고 공주는 내 자식이니까. 그랬던것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줄은 나도 몰랐어. 우리 부모님은 아직 구식이거든. 입양보다는...내 자식을 원하셨던 모양이야."

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이성을 잃었다.

그런 나를 석이가 입을 막고 바깥으로 끌어냈고,

한참동안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윗층 창문에, 밝게 웃으며 정말 공주같이 차려입은 공주가 보였다.  

식모아주머니와 비서실 아가씨, 그리고 내가 모르는 아주 예쁘고 세련된 여자가 공주를 서로 안아보겠다 난리였고, 공주는 너무나 행복하게 웃으며 누군가가 손에 들려준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다.

"공주야...공주야..."

그제서야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무나 놀래서,

너무나 아프고 황당해서 울지 못했던 눈물이...

끓을만큼 끓은 국수국물처럼 이제 뚜껑을 열고 펄펄 쏟아져 나왔다.

"공주만 데려올수도 있었지만... 네 생각해서 너도 데리고 온거야. 그러니까...내 사정도  봐주기 바래."

바닥에 엎드려 하염없이 우는 나를 길거리 개 바라보듯 내려보며, 준혁이 말했다.

"말 안들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건 니가 더 잘 알지? 나도 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제발 도와줘."

"공주를 키워주는 대신, 나는 노예생활을 하라는거야? 여기 니 집안에서?"

"내가 널 사랑한다는건...정말 믿어줄수 없는거야?"

"그건 개소리고, 공주...데리고 가서 내가 키울거야. 니 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는 내가 알지만 이 썩어빠진곳에서 내 딸 자라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나 오늘 많이 참은거 알지? 이제 그만하고...믿어줘. 난 정말 너 없이 못살아. 그래서 이렇게라도 너를 곁에 둘수있게 하려고...내가 얼마나 우리 부모님을 설득했는지 알아? 처음엔 절대 공주 안된다고 하셨어. 공주 이집에서 정말 최고의 모든것을 누리며 자라게 될거야. 모든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너는 내가 죽을때까지 사랑할거고. 모두에게 좋은거 아니야?"

"결혼했다면서. 무슨 죽을때까지 사랑이야?"

"넌 드라마도 안봐? 나같은 재벌아들이랑, 너...절대 결혼 못한다는건 지나가는 애들도 다 알아. 

이렇게 한집에 같이 살수있다는거...그게 최선인거지. 그리고 우리 부모님 돌아가시면..."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아니, 증오해. 그리고 이곳에서 노예같이 일할 마음, 전혀 없어. 

지금까지 푼돈을 벌었어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돈, 내 딸 키우면서 열심히 살았고. 난 그렇게 계속 살거야."

"너 머리 나쁜건 이미 잘 알고있어. 그런 바보같은소리 집어치워. 더 이상 날 화나게 하면 곤란해. 너 더 때릴데도 없어."

야!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려는데, 또 석이가 나를 막았다.

이번에는 나를 질질끌고, 정원뒤 아주 작은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잠궜다.

"야! 뭐하는거야! 이거 열어! 어서!"

"아가씨...죄송합니다. 전...시키시는데로 해야해요... 죄송합니다. 지내시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실겁니다. 그 안에 옷이랑...샤워도 있습니다. 음식은... 저기 음식은... 일하기 시작하시는데로 제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죄송합니다."

"석이씨! 아시죠? 저 짐승같은 놈이 지금까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요? 경찰에 고발이라도...아니. 그냥 나 좀 풀어줘요. 공주데리고 도망치게, 나 좀 도와줘요!"

"그럴수가...없습니다. 꼬마 아가씨는 집안에서 돌보는 사람만 세분 인걸요. 자꾸 이러시면 저만 쫓겨납니다. 그럼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