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과 수연이 탄 차가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소박하고 깨끗한 콘도단지였다.
아주 멀찌감치 차를 대고 서지운은 잠시
내가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거지?
자책을 하던중.

“이제 와?”
길쭉한 다리에 훤칠한 유신우가 주차장에서 뛰어나온다.

“어. – 언제 오셨어요?” David이 먼저 허리굽혀 인사했고.
“아까부터 와서 기다렸지. Clara가 오늘 약속 안지킨건. 내가 아주 편하고 친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미안해요.”

David은 유신우와 이수연.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웃다가,
“저 먼저 들어가요. 두분 하실말씀 나누세요.”

수연은 호흡을 가다듬듯, 잠시 고개를 숙였고,

“왜. 내가 그렇게 보기싫은가?” 유신우는 여유스런 미소를 지었고.
“그런게 아니구요.”
“알았어. 그럼. 전에 차에 두고간 서류만 전해주고 난 사라질께. 들어가 쉬어.”
“아니예요. 저때문에 일부러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
“피곤해 보이는데?”

유신우는 다정스럽게 웃으며 수연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서지운의 가슴속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아...그래. 유신우가 있었지. 둘은 어떤 관계이기에...?

이수연은 피식 웃으며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들어오세요.”

유신우는 신나서 그녀를 따라들어갔고.

멍해진 서지운은.
멀쩡히 엔진에 끼워둔 차키를 두고
주머니속, 가방속을 뒤치며 한참 헤매고 찾다가.

부르릉…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엔진을 거는데,

똑똑똑…

“어헉!”
고함을 지를정도로 놀란 서지운은 소리나는 창문쪽을 돌아봤는데

씨익…웃는 David의 얼굴이 보이자.
서지운은 그자리에서 새파랗게 질려 기절을 할것만 같았다.

그냥 차를 몰고 부르릉 갈까?
그러나.
어른체면에 줄행랑 칠수는 없고…

감정을 가다듬은 서지운은 최대한 뻔뻔스럽게. 그리고 침착하게 창문을 내렸다.

“교수님. 이 동네 사세요?”
녀석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미소가 그득했고.

서지운은 그저 쓴미소를 흘려보낼수밖에 없었다.

“저. 차좀 태워주세요.”

서지운은 못이기는 척 차문을 열어줬고.

David이 차를 타자마자 서지운은 차를 몰았다.

“교수님. 오늘 되게 한가하신가 봐요?”
“한가하긴.”
서지운은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할일이 태산인데
이게 무슨 정신나간 짓이란 말인가.
이제 이런 꼬마에게 들키기나 하고 말이다.

“반가우셨죠?”
서지운은 째려보듯 날카롭게 David을 노려보았고
“우리 엄마. 여전히 예쁘시죠?”

“난 학교로 가는데. 넌 빈손으로 어딜가려고?”
“저한테 감사하셔야 하는데…?”
“무슨소리야?”

“엄마가 차에 뭘 두고 오셨다고 다시 나온다고 하셔서,
교수님 들키실까봐 제가 대신 나왔거든요.”

“들키긴 뭘?”

“저희 엄마. 이렇게 집까지 따라붙는 남자. 엄청 싫어하셔요. 모르시죠?”
“이봐."
서지운은 화가 난듯 David을 돌아보았고.

“어! 교수님! 조심하세요!”
서지운은 급하게 운전대를 바로잡았다.

David은 내내 재미있는듯 싱글벙글이었고.

“재밌냐..?”
서지운은 기가막혀서 한숨만 나왔다.

“아니…신기해서요.”

“뭐가.”

“엄마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이…서교수님이라면. 신기한거죠.”

순간 서지운은 표정이 굳어졌다.

“아. 엄마 걱정하시겠네요. 저 여기서 그냥 내려주세요.”
서지운은 잠시 그를 돌아보다가 차를 세웠다.

“한밤중에 운동도 시켜주시고. 감사합니다 교수님!”
David은 밝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꾸벅하고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서지운은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대체 David이 아는것은 어디까지 이며.
이제 이들의 관계는 어찌 될것인지..

아직 끝내지 못한 많은 일들.
오늘 수연을 쫓아다니느라 무책임하게 잊어버린 스케쥴을 생각하며 학교로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도착해보니 오피스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는데.

“교수님!”
“민혜주. 여기서 뭐해? 어떻게 들어왔어?”
그녀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울었는지 눈가에 마스카라는 온통 번져있고,
사방으로 뛰어다닌 사람처럼 차림새가 불안정했는데…

“어떻게 된거예요! 왜 전화는 안 받으시고. 연습도 안나오시고. 오늘 중요한 교수 회의도 빠지시고! 이런일 처음이라 정말 무슨일 생긴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사고나셨어요? 큰일이라도 나신거예요?”

“멀쩡해. 쓸데없이 걱정말고 집에 가봐.”
서지운은 피곤한듯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으려 팔을 뻗쳤는데,
순간,
민혜주가 그의 등뒤로 들러붙었다.
아니.
그녀는 서지운의 등뒤로 달려와 애절한 포옹을 한것인데
서지운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뭔가가 들러붙었다고.

화내며 떼어내기에는 조금 미안했고.
그렇다고 내비두자니…

“왜…이래…?”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걱정돼서….미치는줄 알았어요. 전. 교수님. 다쳤는줄…사고났거나. 죽었는줄…”

서지운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무도 어디계신지 모른다하고. 한번도 안빠지시는 연습도 안오시고…
중요한 회의까지… 정말…큰일… 났는줄 알았어요…흐흐흑…”

“그래… 알았어. 진정해. 멀쩡하쟎아.”
아기를 진정시키듯 달래서 보내는게 가장 빠를것 같았다.

“무슨…일이었던 거예요…?”
“누굴 좀. 만났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민혜주는 서지운을 빤히 쳐다 보았다.
눈을 한번 뻐끔 하더니..
그녀는 화장지를 찾아 냅다 코를 풀었다.

“David 이요…?”

“니가 그걸…”
“아까. 학교에서 David이랑 나가시는거 봤어요.”
“아…”
“근데 학생 하나를 만난다고...세상에 이런 중요한 스케쥴을 다 잊으신다는게. 말이 돼요?”
서지운은 할말이 없어 또 깊은 한숨만 쉬었다.

“저한테…거짓말 하시는거…처음인거… 아세요?”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자… 진정하고 어서 집에 가봐.
넌 비실비실한 애가 그렇게 잠도 안자고 쉬지도 않으니까 이렇게 쓸데없이 눈물이 질질 나오지.”

민혜주는 무척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서지운을 바라보았다.

서지운은 너무나 어색한 이 상황을 마무리짓기 위해 불편한 미소를 지었는데,
순간 이었다.
그녀가 서지운의 입술에 기습을 한것은.

그리고 그때 문이 확 열린것은.
운명이라고 해야하나.

“Uh…Sorry! Sorry professor! The… the door. The Door was open, so, I thought… Oh man!”
당황한 학생은 재빨리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순간 서지운은 민혜주를 밀어냈고,
“너!…제 정신이야?”
“겁이 났어요. 서교수님. 다시는 못만나면 어떻게 될까.
오늘 처음으로 상상해보니까.
못살것 같애요.”
민혜주는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교내에서!”
“교수님은. 그런게 그렇게 중요하세요?”
민혜주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봐. 민혜주. 내가 전에 얘기했지? 나는. 너에게”
“저는...진심이예요."

“난 너를 그냥 좋은제자로 생각한다고 했잖아”
“제가 교수님 좋아하는거. 알고계셨잖아요.”
“그만하자. 늦었어.”

서지운에게 무척이나 긴 하루였다.
수연이 일만으로도 벅차고,
또 무책임하게 저질러놓은 오늘의 일을 마무리하기에도 벅찼다.

“데려다 줄께. 나가자.”
피곤하고 복잡한 심정의 서지운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한없이 쌓여있는 일들을 쉽게 포기할 서지운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곧 쓰러질듯.
심하게 지친 온몸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다고 엉엉 울고있는 민혜주를 혼자 덩그러니 놓고 나갈수는 없었기 때문에…

민혜주는 순순히 서지운을 따라나왔다.

민혜주를 차에 태워 그녀의 아파트에 내려주려는데.
이미 서지운은 온몸에 기운이 빠져버려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골아떨어질듯 몸이 피곤했다.

“교수님.”
침착해진 그녀의 목소리였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어.”
“오늘. 무슨일 있으셨던 건지…저에겐. 말씀해줄수 없는건가요?”
서지운이 힘없이 그녀를 돌아보았고.

“첫사랑을 만났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쉽게 내뱉은 말이었다.

“첫…사랑…이요…?”
“그래. 그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녔어. 오늘 하루종일.”

민혜주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믿을수 없지만.
그러나 분명 사실임을 그녀도 부인할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첫…사랑…” 민혜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지운은 내색을 안하려했지만 점점 눈앞에 시야가 흐려졌다.
식은땀이 웃도리를 적시기 시작했고.

“내일 보자.”

민혜주는 차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잠시 서지운을 돌아보았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서지운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어서 들어가.”

“교수님! 왜 이렇게 땀을 흘리세요? 지금 덥지도 않은데!”

“괜찮다니까!”

민혜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차문을 닫고 떠나가는 서지운을 바라보았다.

서지운은 차를 돌리며
땀이 흘러내려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던 순간,

끼이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쿵!
운전대에서 Air bag이 펑 터져나왔고,
서지운의 옆 창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파편이 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엄청난 소음과 먹먹한 아픔이 느껴지면서
그는 그 오래전 그때와 같이 자신의 귀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죽나?
이렇게 죽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