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이 열여덟살때.
수연의 오빠가 서지운을 심하게 다치게 했던 그날 이후.. 한달쯤 지났을까.
서지운의 아버지가 그녀를 시내 식당으로 혼자 부르셨다.
그녀는 조금 짐작 할수있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때임을.

겉옷을 챙겨입고, 간단하게 짐을 싸서 집을 나오려다가.
그녀는 연습하고있는 지운이를 몰래 훔쳐보았다.

“아…” 지운이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손목을 붙잡고. 무척이나 아픈듯 했다.
수연의 오빠에게 폭행을 당한지 한달이 지났는데도.
의사말로는 완벽히 회복됐다고 했는데도.
지운이는 전처럼 연습을 하지 못했다.
처음 한두시간은 괜찮았지만 서너시간이 넘어가면 그는 괴로와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서지운이 애를 쓰고있다느걸 수연은 알고있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아시면 수연이에게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의 손목이 예전같지 않음을 숨기려했다.

그러나 매일 그의 연습을 지켜보던 수연은 믿고싶지 않아도.
그 사실을 눈치 챌수 있었다.
죽고싶었다.
피아노는 서지운의 인생이었는데.
지운이의 손목을 망쳐놓은것이. 바로 자신의 오빠라는 사실때문에.
그런 폭행을 당한것도.
바로 자신 때문이었다는 자책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지운에게 더 큰 피해가 오기전에.
이미 떠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지운의 아버지가 부르신 시내 식당에 가보니,
그녀의 오빠가 불량스런 태도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정도 가지고…되겠습니까? 그동안 제 동생이 몸종같이 섬긴것 같더만. 이거. 너무 각박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준비할수있는건. 그것이 다입니다. 부디 수연이. 학교 공부도 마치게 돌봐주시고. 나쁜일 당하지 않게. 잘 지켜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에이…뭐…별수없죠.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제가 싸나이로써 약속은 꼭 지킵니다.”

“오빠!”
이수연이 울부짖으며 봉투를 가로챘다.

“야!” 그는 사납게 소리쳤고,

그녀는 봉투를 아저씨 손에 쥐어드렸다.

“이런거. 필요없어요. 안주셔도 돼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저씨…”
이수연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지운의 아버지도 착찹하신 마음에 깊은 한숨을 쉬셨는데…

“야! 너 미쳤어?”
이수연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사나운 오라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이게!” 그는 그녀의 손을 내 던져 버리듯 팽개쳤고,

“제발 이러지마. 오빠. 이러지마!”
하며 다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거 못 놔?”

“이거 봐요!  시끄럽게 이러지 마시고 나가주십시오!”
하도 소란을 피우니까 식당주인이 나섰는데,

“아저씨. 어서 가세요. 더이상 이런모습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어서…가세요.”
“수연아…”
아저씨는 그녀를 안타깝게 불렀고.

“안녕히 가세요. 아저씨.”
그녀는 고개숙여 인사했다.

“안돼겠다. 아저씨랑…다시 집으로 가자.”
“아니요.. 아니예요. 오빠랑 갈거예요. 그렇게 할거예요.”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어. 같이 아저씨랑 집으로 가자.”

수연이는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오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저씨와 수연이를 번갈아 보다가,
삐딱하게 웃고는,

“그럼. 또 뵙죠. 아…그리고 그 봉투…”

“꼭…수연이 위해서…써줘요. 부탁입니다. 정말 착한 아이인데…”
“걱정마십쇼. 제 동생인데요. 뭐.”

아저씨는 순간 망설였다.
수연이만 생각하면 얼른 따라가서 그녀를 다시 데려와야 했고.
그러나.
지운이를 생각하면 못 본척 돌아서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치만 아무리 내 자식이 귀해도 양심적으로 이건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연이를 찾으려 뛰기 시작했는데.

그녀와 그녀의 오빠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수연은 그날.
극적으로 오빠에게서 도망쳤다.
끌려갔으면 아마 술집에 팔려갔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그녀는 오빠를 피해 먼 시골로 갈수있었다.

몇개월을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노숙자같이 생활하다가.
겨우 작은 진료소에서 잔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진료소에는 예쁜 여자분이 늘 누워지내고 있었다.
임신말기였고, 곧 아기가 나올것 같았는데.
얼굴이 갸름하고 목소리가 고운 그녀는 혈압이 위험하게 높아.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지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했지만,
그녀는 가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소리를 들으면 금방이라도 온세상이 밝아질것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참 예쁜사람이었다.

“노래를…참 잘하시네요?”
“고마와요…”

그녀의 이름은
최연주라고 했다.

“아기도…엄마 닮으면 노래를 잘하겠어요…”
“우리 아기는…노래를 가르치지 않을거예요.
음악은 하지 못하게 할거예요…”

“왜요?”

 “가진것도 없고 할줄 아는것도 없는 사람이 노래를 하면…정말 아픈 세상이 열려요..
우리 아기가 아빠를 만날때까지는. 행복해 지기 전에는 절대로. 음악을 가르치지 않을거예요… 절대로.”

수연은 그녀를 이해할수 있었다.
서지운 덕분에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결국 그의 음악을 망쳐놓은 자신이 너무 죄스러웠고,
노래소리나 피아노 소리만 들어도 서지운이 생각나고,
또 그가 그리워서 견딜수가 없었기 때문에.


최연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조용히 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와서, 이수연도 함께 웃을수 밖에 없었다.

왜 혼자 아기를 가지고 이런 시골에 와 있는지. 수연은 무척 궁금했다.
최연주는 이 동네에서 태어나 쭉 살아온.. 고아라고 했다.
어릴때부터 노래하는 목소리가 고와서 이곳저곳에서 노래를 하고 살았다.
술집에도 다니고 길거리에서 헤매며 품돈을 벌기위해 전전긍긍하던 그녀가,
어쩌다 어느 교회합창단에 들어가 합창 경연대회를 하러 전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는데,
얼굴도 예쁜그녀는 천상이 준 목소리를 타고난 아름다운 소프라노였고.

서울에서 만난 한 청년을 깊이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그 청년은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촉망받는 테너였고.

그의 이름이 유신우라고 했다.

임신한 사실을 알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유신우는 그녀와 결혼을 하려했다.
그의 부모님이 허락할리가 없었고.
결국 그는 강제로 해외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최연주는 그래도 아기를 낳으면.
그를 찾아 어디든지 갈것이라고 했다.
세상 어디라도 그를 찾아 다닐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혈압으로 고생했던 그녀는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이수연에게 눈물어린 유언을 남겼다.
“유신우…그사람을 찾아줘… 내 아들…부탁할께…나에겐 이제 수연이 너 밖에 없어…”

그녀를 대신하여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유신우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 이수연.
유신우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온갖방법을 동원하여 미국에 왔고,
먹고 살기위해 간호사 공부를 하며 바쁘게 살면서도 유신우의 행방을 쫓아 이곳까지 오게되었다.

그러나 유신우가 있다는 Los Angeles로 이사했던 즈음.
이수연은  

서지운. 그를 먼저 만났다.

처음 간호사가 되고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할때,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서지운.
바로 그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는것을 알게 된것이었다.

수연은 그의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서지운이 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자가 됬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가 황금기에 3년동안이나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고.
그때 다친 손목 때문이라는걸,
다른사람들은 몰라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서지운을 보며.
그녀는 그를
한없이 그리워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유신우가 나타났다.
이수연이 일하던 병원에
제 발로 나타난것이다.
그는 맹장수술을 하기위해 입원했는데.
병원 기록에 그의 이름과 그의 신체사항.
그의 혈액형과 나이.

이수연이 20년을 찾아 헤매던 David의 아버지가.
드디어 나타난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20년동안 그저 David의 아버지를 찾아줘야 한다는 목적 하나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를 만났을때
그녀는 처음으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만큼
괴로왔다.

이제 David이 없이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 David을 그의 아버지에게 넘겨줘 버리면.
그녀는 죽을것만 같았다.
자신만 알고있는 이 비밀을.
사실을 말해줄 용기가.
David을 아버지에게 보내줄 용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만약에 유신우가 David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면?
만약 그는 이미 결혼했고 다른 자식들이 있으면?
David이 받을 상처는?....

언젠가는 닥칠일이라고 늘 각오했는데도
도저히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오늘은 말해줘야지…
용기를 내고. 얘기해야지…하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혼자 괴로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신우가 점점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잠시 결혼했었지만 이혼한 경험이 있었고,
독신으로 살려고 마음먹었는데
Clara가 나타나서 낭패라며,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금씩 거리를 두고 알아갈수록 참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왔다.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유신우를 받아들이고.
David에 관한 사실을 밝히면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서지운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사랑으로 남을.
서지운.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서지운.
아직도 변함없는 눈길로 
수연이의 마음을 흔드는...

그리고 유신우는 David과 여행을 가고싶다고 한다.
아들인지도 모르면서.
여행을 가겠다고.
그의 재질을 키워주겠다고…

이수연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작 용기내어 David이 하루라도 더 일찍 마음껏
아버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수 있게 해주지 못한것이 미안했고.
유신우씨에게도 죄스러웠다.

그러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것 처럼 고통스러웠기때문에.
오히려 화를 낼수밖에 없었고,
자신이 내주기도 전에 유신우가 미리 빼았아 가는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유신우가 밉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온것이다.
더이상 피해서도. 숨겨서도 안됀다.

“유신우씨는…”

이수연이 고개를 숙이고 혼란스러워하는 David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너의… 아버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