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줘. 난… 지운이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래.”
이수연이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너는. 지금 내 앞에 있는데.. 우리 다시 만난건 우연이 아니잖아? 지나간 일도 아니잖아?”

“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거야. 이곳에서 내가 해야할일은 끝났으니까.”

서지운의 마음이 쓰려왔다.
“해야…할 일…?”

“David의…친 아버지를 찾아주는일 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찾았으니까…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

“무슨 소리하는거야.”

“David은.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야.”

“뭐?”

“유신우씨는….”

서지운의 가슴이 먹먹해 지면서 그의 호흡이 가늘게 떨려왔다.
수연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David의 아버지...야…지난 20년. 난 그 사람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거야.”

‘Clara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서교수님이라 해도 말이죠’
당당하던 유신우의 눈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대단한 인연이로군.
그가 그렇게 당당하게 사랑한다는 이 여인이.
바로 자신의 아들을 키워주며 지난 20년을 찾아헤매고 있었다니…

“너도… 유신우씨를…”
차마 자신의 입으로 인정하듯 내뱉을수가 없어 서지운은 이내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운명이라고…받아들이려 하고있어.”

말끔하게 회복됬다고 믿었던 가슴팍이 심하게 저려왔다.
서지운은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막아내려고 가슴을 움켜 쥐었다.

“교수님!”

갑작스런 민혜주의 목소리에
두사람은 꿈에서 깨어난 듯
문쪽을 돌아보니,

서지운과 이수연의 모습을 보고
민혜주도 놀라 자빠지기 일보직전이었고.

대강 짐작이 갔는지,
그녀도 자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첫사랑을 만났다고 하시더니… 저 여자인가…

“나.. 이만 갈께.”
이수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지운은 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잠깐만.”

그의 강렬한 눈빛에 빨려들어갈것 같았다.

민혜주의 눈에는.
처음 보는 서지운의 모습이었다.
한 여자를 저렇게 마음 아프도록 바라보고 서있는 서지운은.
정말 처음이었다.
민혜주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도 붉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된거예요. 교수님.”

서지운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얘기하지.”

“Probation…”
민혜주는 단단히 맘을 먹었는지…
“저 때문인거…맞죠.”

“얘기 나눠. 중요한 이야긴것 같은데.”
이수연이 웃는얼굴로 서지운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뇨. 제가 갈께요. 두분. 말씀 마저 나누세요.”
민혜주가 그제서야 돌아서려고 하는데

이수연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아니예요. 우리 얘기… 끝났어요. 민…혜주씨죠…?”

민혜주와 서지운은 둘다 놀라서 이수연을 돌아보았고,

“어떻게…제 이름을 아세요…?”

수연은 그냥 따뜻한 미소만 남기고, 조용히 돌아섰다.

천천히 희미해지는 그녀의 발자욱 소리를 들으며
민혜주와 서지운은 얼음조각이 된듯 움직이지 않았는데.

“따라가지…않으실거예요…?”
민혜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운명이라…”
혼잣말을 되내이며 서지운은 힘없이 피식 웃었고.

“교수님…Probation이라면서요…”

서지운이 고개를 돌려 민혜주를 마주 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가…정말 잘못한거 맞는데…피해자는. 교수님인거 맞는데…”

“넌…이제 어떻게 할거야.”
서지운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 Recommendation 없이 너 취직할수 있을거 같아?
아주 한적한 시골 대학에서도 몇십대 일 정도의 경쟁이 있는 자리인데.
이제 너와 내가 사귀는 사이가 되버렸으니.
내가 써주는 Recommendation이..이제 얼마나 우스워질지….”

서지운은 혼잣말 하듯 한숨을 쉬듯…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듯…그렇게 말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접근한 교수님은…
정말 파렴치한 교수가 되버린거죠…. 저때문에….”
민혜주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런거…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교수님까지 이렇게 될줄…저도 몰랐어요…”

서지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까 챙기던 짐을 듬성 듬성 박스에 챙기고는,
몇가지 악보만 골라 가방에 집어 넣었다.
아직도 그의 머리속에는 수연이 남기고 간 이야기들과
그녀의 체혼이 느껴져 다른것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너 졸업은.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시킬테니까…너무 걱정말고.”

“제가 졸업 못할까봐 울고있는줄 아세요?”

서지운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잠시 민혜주를 보았다.

“저하고…결혼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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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다녀와요? 여기 책장에 짐은 우리가 다 쌌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유신우와 David이 짐을 싸고 있었다.

자연스런 부자관계까지는 아직 멀었겠지만.
두 사람은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그리 고통스럽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했는가.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때문인지
두 사람은 오히려 신기해 하고, 놀라와 하고.
또 이 상황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이수연은 두 사람이 함께 웃으며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움켜쥐고있던 무언가가 허무하게 조각조각 부서지듯.
알지모를 서운함과 서러움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것만 같았다.

“엄마. 피곤해 보여. 짐은 우리가 쌀테니까. 엄마는 좀 쉬어요.”

우리…
우리라는 말이 너무나 생소하게 들려왔다. 우리…
이수연은 밀려오는 생각들을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David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조금씩 David을 유신우에게 보내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수연이 방안으로 들어가고.

유신우와 David은 조용히 박스를 정리했다.

“엄마는… 서지운 교수님을… 못 잊으실거예요.”

“20년이나 지난 일이야. 그냥 어린애들이 잠깐 서로 좋아한거라며. 그렇게까지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 안해. 엄마는 강한사람이니까 현실에서 가장 행복한 길을 찾아 나갈거야.”

“그렇게 생각해요?”
“응?”

“어린애들이. 잠깐 서로 좋아했다고…” David은 왠지 슬픈 표정으로 유신우를 쳐다보았다.

“고등학생때 만났다면서.” 유신우는 순간 당황했고.

“그럼 내 친어머니와 당신도. 그냥 그랬었나요. 잠깐 서로 좋아하다가 어쩌다 내가 생긴거예요?”

유신우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있던 책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미안해요… 아직은. 아버지란 말이 생소해서…당신이라고 불렀네요. 죄송합니다.”

David은 피식 웃으면서 떨어진 책들을 박스에 챙겨넣고,
수연이 들어간 방으로 노크하고 들어갔다.

유신우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은.
 후회는 해도 다시 주워담을수는 없었다.
그랬지…
자신도…그런 어린 사랑을 했었지. 어릴때 잠시 한 순간이었다 할수 있을..
그리고 그런 그녀를 잊지못해서 결혼을 하고도 결국 이혼을 하게 되고 말았고…
혹시나 그 때 아이가 태어났을까. 잠못 이루던 밤을 셀수도 없었지…

“엄마. 왜 그렇게 힘이 없어?”
David은 웃으며 이수연이 앉아있는 침대옆에 앉았고.

이수연은 일부러 웃어보였다.
“힘이 없긴… 그냥 피곤해서 그래. 널 보면…미안하기도 하고…”

“참 나… 이거 곤란하네…”

“응?”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난데... 내가 제일로 고마운 사람이 나한테 미안하데네..?”

“무슨소리야..그게…”

“내가 오늘 얘기 안해서 또 까먹었구나?
내가 어제도 그랬잖아.
오늘도…
다시 고마와.
그리고 엄마가 다시 까먹고 미안해 하면.
또 다시 말해줄께.
고마와.
고마와 엄마.”

David은 웃으며 수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의 눈가에 희미하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냥 나를 버리지… 미련하게 멀쩡한 처녀가…
 애를 데리고 다니느라 손가락질 당하고. 욕먹고. 천대받고…
그렇게 바보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엄마밖에 없을껄…
이미 죽어버린 사람하고 약속을 지킨다고.
자기 인생을 버리고 이렇게 외국까지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그래놓고 미안하다는 그런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냐구…”

David의 두눈가에 눈물이 가득 담겼다.

“너는…몰라…”
이수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너를 만났을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았다는 죄책감의 무게를 견딜수가 없었어.
세상에 남겨진 가족이라고는 나를 술집에 데려다 팔려는 오빠 하나밖에 없었고…
나의 삶의 이유를. 내 존재가치를 알수가 없었어...

그때 나에게
너가 준
희망은…
말로 다 표현 못해.

너의 신기하고 작은 손과 발을 보면서…
천사같이 아름다운 니가…
나같은 고아가 되지 않게하려고
정말 굳게 결심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