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켓을 챙겨입고 나온 David은 씁쓸한 기분에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파트를 벗어나 주차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어…”

조금씩 어두워지는 골목에 희미한 그림자가 보였다.

“교..수님…?”
서지운이 지친모습으로 계단에 앉아있었으니,

“오랫만이네.”
“다치셨다더니…괜찮으세요?”

“그래… 보고싶었는데..” 서지운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를요?” David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닮은 사람.”

“그런소리…참 많이 들었는데... 엄마하고 진짜 닮았다고…”

David이 씁슬한 미소를 지었다.
서지운이 다정한 눈초리로 David을 보더니…

“그러고보니 니 아버지는 하나도 안 닮았네. 다행히.”

“교수님…. 알고 계셔요?”

서지운은 조금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계단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자. 이거 주려고… 여기 온거야.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네가 마침 나왔네.”

David은 말없이 서지운이 내미는 악보를 받아들었다.

“교수님이...작곡하신 곡이잖아요..?”

“그래. 니가 표절했던 그 곡이야. 이제 주인을 찾았으니까… 돌려주려고. 멜로디는 니 어머님이 쓰신것이고... 이제 음악을 하기로 했다니 네가 다시 써봐. Variation을 허락하는 편지하고 추천서도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잘 하고.”

“…감사합니다.”
David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저명한 작곡가에게 Variation을 허락받는다는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자기보다 잘 할수 있을 제자라는걸 인정해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David을 생각해주는 서지운이…
음악을 가르칠땐 혹독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늘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감동했었고.
 
어찌보면 David에게는 
서지운이 아버지같이 여겨질때도 있었는데.

서지운은 조용히 웃으며 David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엄마…만나려고 오신거 아니예요?”

서지운이 잠시 돌아서서 David을 마주 보았다.

“아까 만났어.” 서지운의 입가에 외로운 미소가 맴돌았다.

“제가. 불러 드릴께요. 잠깐 기다리세요.”

“됐어. 더 이상 인사같은거.. 하고 싶지 않거든.”
서지운은 웃는 모습을 남기고 돌아서서 걸었다.

그의 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David은 멍하니 보고 서있었다.
인사…
하고 싶지 않다는건.
이미 헤어졌다는 말인가?
교수님은 이렇게 쉽게 어머니를 포기한건가…

David은 묵묵히 서지운이 남기고간 악보를 흩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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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운은 진통제를 물과 함께 삼키고 잠시 눈을 감았다.
긴 호흡을 정리하고 집앞에서 차문을 열고 나왔는데.
못보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빼꼼히 고개를 들고 서지운을 맞이하는 민혜주.
그리고 그 옆에 점잖은 정장바지에 골프셔츠를 입은 키작은 신사.

“Hello! 이거. 생각보다 handsome한데?
우리딸 한테는 좀 아깝지만. 추남은 아니네. 응? 하하…
Nice to meet you. I’m John Min Parker . This young lady calls me daddy.”

무척이나 유쾌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털털해 보이기도 하고.
나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야…라고 가슴팍에 붙힌듯. 당당함이 몸에 베어있었다.

“Parker이란분이...한국분이신지…몰랐습니다.”
“입양아지. 한국말은 우리 와이프하고 딸한테 배웠어. 허허...
우리딸에게는 내 한국이름을 붙여주었어. 한국사람이니까.”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차타고 왔지. 우리 한번 만나야 하지 않나? 자. 문 열어. Let’s go inside.”

민혜주의 아버지가 유쾌하게 웃으며 정문으로 향하셨고,
서지운은 민혜주를 돌아보았다.

“제가…그런거 아니예요.”

“어떻게 된거야.”

“저도.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거예요.”

서지운은 이 난처한 상황에서 도망이라도 치고싶었지만.

“저희 아빠…겉으로는 저렇게 하하호호하셔도…속은…굉장히 무서운 분이예요. 제발…저 좀 살려주세요 교수님.”

“너 살리는거. 어떻게 하는건데?”

“그냥…대강 넘어가 주세요…아직 아버지랑 긴 얘기도 못 나눴어요. 저도 기회가 없었다구요.”

“대강 넘어가는게 대체 뭐냐고.”

“서교수! 뭐해? 어서 문 열지않고.”

어색하게 소파에 민혜주. 서지운이 나란히 앉았고.
마주보고 앉은 민혜주의 아버지는 씨익 웃음을 짓고 계셨다.

“우리 혜주가. 그렇게 좋았어?”

“아빠…” 민혜주는 금새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갈듯한 표정이었고.

“아주 많이 좋으니까. 교내에서 그렇게 소문 퍼뜨려가며 행동했겠지?”

서지운이 말없이 고개를 들어 Parker을 바라보았다.

“교수로 있는 사람이, 학생에게 그런 관심을 보였다는건. 뭔가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으로 봐야하는거지?”

민혜주가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고.

“따님은…제가 아끼는 제자이고. 가능성있는 친구입니다. 함께 일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고.
진심으로 훌륭한 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Parker의 표정이 미묘했다. 화가 난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난 자네가 맘에 들어.”

“네?”

“일이던, 사랑이던. 적극적인 사람. 맘에 든다고.
그러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시작한 일을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민혜주를 그렇게 적극적인 사람으로 키우신건가…

“그런 우유부단하고 책임없는 사람들은 Professor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특히나 나의 alma mater이고. 내 아버지, 할아버지, wife. 그리고 이제는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나올 학교니까. 우리 학교의 brand name을 위해서라도. 그런 사람은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낼거야.”

“아빠! 그러니까요. 교수님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서지운이 담담하게 그리고 진실한 눈빛으로 Parker을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그럴 필요가 없길 바래.”

“저를 적극적으로 밀어내시려면. 학교기관 복잡한 절차도 있고. 법적 소송이 필요하실수도 있고. 저뿐아니라 저와 관계된 교수님들도 많이 기분이 상하시겠죠. 아무리 저희 대학에 많은 기부를 하고 계신다해도 negative publicity를 피하실수는 없을것입니다. 친분이 깨질수도 있겠죠. 더구나 극히 사적인일이고. 그 일로 인해 권력을 남용하는것처럼 보일수도 있으니까요.”

“What is your point?” Parker의 얼굴에 심한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다.
민혜주는 눈을 꼭 감으며 얼굴을 감쌌고…

“따님과...긴시간은 아니었지만 함께 일하면서, 정말 에너지가 강하고, 똑똑한 학생이라는것. 또 그 누가 봐도 훌륭한 Musician이라는것…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열심인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고. 또 뭐든 돕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늘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민혜주와 Parker이 말없이 서지운의 다음 나올 말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모든 도움과 정성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진심으로.." 

Parker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지운을 노려보았다.

“제가 사직서를 내겠습니다. 혜주의 advisor이 자연스럽게 교체될것이고. 그러면 recommendation letter이나 훗날 reference에도.  아무 이상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질없는 교수 처리도...되시겠죠.”

“교수님!”

“그러니까. 결국엔 내 딸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짓을 하고 다녔단 말이지? 결혼할 마음도 없었으면서!"

"아빠! 그런게 아니구요.”

“어떻게…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 커지기 전에 어서 사직서를 접수하시게.”
Parker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Wait! 아빠! 그런게 아니예요! 제가 그런거예요. 교수님은 아무 잘못 없으시구요! 제가 교수님 좋아한거예요!”

Parker은 아무말없이 문을 꽝 닫고 밖으로 나갔다.
곧 울고있는 민혜주를 뒤로하고 부르릉…떠나가는 차소리가 들렸고,
민혜주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서지운을 돌아 봤는데…

“교수님! 바보예요? 미쳤어요?
아니지..
제가 미친거죠… 괜히 교수님 붙잡고… 결혼해달라고 해서..
그래서 이러시는거예요? 저랑 결혼하기 싫으니까… 차라리 교수자리 내놓으시겠다구요?
저는 진심으로 교수님 사랑해서 그런건데…
이렇게 까지 저를 비참하게 만드셔야 겠어요?
이런식으로 그만두시면 제가 어떻게 살아가라구요? 제가 교수님없이…
어떻게…”

민혜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는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어.
이렇게 사랑하시는 부모님도 계시고
실력도 있고
아름답고…
너 아주 많이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지금. 저 위로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와 억지로 결혼하면. 네가 행복할거라고 생각해?”

“억지라도 좋아요. 전 교수님이 없는 제 세상을 상상할수가 없어요!”

“넌 왜 네 자신을 그렇게 과소평가 해?”

민혜주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과소평가 하는거 아니예요. 저 좋아하는 남자들. 세상에 깔렸다구요. 지긋지긋할정도로 많아서. 그래서 결혼 안한거라구요.”

“나는… 좋아하는 여자가.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어서… 결혼 안한거야…"

“그치만... 그 여자분은. 교수님을 떠나갔잖아요.”

서지운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마음아픈 표정을 보자 민혜주도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그랬지…”

“그런데 왜”

민혜주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찾고. 떠나고. 또 헤어지고. 만나고 하실건데요? 어린애도 아니고. 이제 젊지도 않잖아요. 그렇게 떠나간 여자가 뭐가 좋다고”

서지운은 힘없이 웃었다.

“민혜주.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것 보다 훨씬 강하고.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란거. 확신해.
물론
지금은 조금 힘들겠지만. 화도 나겠지만…
지나고 나면
지금의 선택이
너에게도 최선이 될거야.

내가 그렇게 믿도록 허락해 준다면.
너나 나나…
서로 미안한 마음 없이.
헤어질수 있겠지.”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교수직은. 그만두지 마세요.”

“네가 나에게 미안한만큼. 나도 너에게 상처줘서 미안하다는 표시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래도!”

“나 싸우는거 잘 못해. 예전에 한번 싸우려다가…손목만 다쳤거든. 이제 네 말대로 젊지도 않은데…
너의 아버님이랑 싸울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제가…말려볼께요. 우리 아버지는 제가 설득할께요.”

“교수가 되고나서…한번도 쉰적이 없어. 그 흔한 안식년도 지내보지 않았고..
그래서 잠시. 쉬고싶어서 그러는거야.
왜.
내가 하고싶으면 언제든 다시 취직 못할것 같아?
내가 얼마나 실력있고 유능한지.
민혜주. 모르나?”

민혜주가 풀이죽어 고개를 숙였다.

“교수아니라도. 하고싶은일…많이 있어.
사실 근래에 점점 작곡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고민도 많이 했고.
나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교수님이 안계시면… 이 학교 작곡과가 말이 돼나요…?”

“빈자리가 생기면. Postdoc fellow에게 좋은일 아닌가?”

“교수님!”

“잘 할수 있다고 믿어."

민혜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서지운은 자신의 모든것을 포기할만큼
그녀를 사랑한다는것을..
그리고 그 사랑을 되돌릴수 없다는것을
이제는 민혜주도 확실히 알수 있었다.

"그래요. 교수님. 저 그만할래요.
이렇게 물고 늘어지는거. 제 스타일도 아니고...
이러다가 아빠한테 쫒겨나면...
대학교때도 그래서 내내 유럽에서 돈 한푼 없이 살았는데...
저 좋다는 남자는 다 싫고.
제가 좋다는 남자는 저를 싫어하고.
저 사랑같은거. 이제 안 할래요."

"넌 아직. 사랑을 한게 아닐거야."

서지운이 웃으며 민혜주의 어깨를 붙잡아 주었다.

민혜주는 그에게 와락 안겨버렸고.

"마지막이니까...내버려 두세요... 저 이제 이런짓 안한다고...약속드리는거예요... 마지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