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서지운은 집안에서 문을 잠궈놓고 피아노를 쳤다.

 

민혜주. 그녀의 아버지.

수연..유신우..David.

그 아무도, 그 아무런 생각도 하고싶지 않은데,

치는 곡마다 그들의 기억을 불러왔고,

마음을 저리게 하지 않는곡이 없어,

피아노를 친다기 보다 음악속에서 헤맨다는 표현이 맞을것이다.

 

“서교수!”

 

“아…”

서지운은 찡하게 울려오는 머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두손 가득 잔뜩 보따리를 들고 서계셨다.

 

“언제…오셨어요?”

 

“너 또 피아노 치다가 잤니?

이게 뭐야. 날씨도 추운데. 너 퇴원한지 얼마됬다고 이러고 있어?

어릴때는 열쇠소리만 딸랑대도 잠이 깨더니. 에미 들어오는것도 못듣고…어디 아픈거야?”

 

“왠일이셔요?”

 

“너. 학교 그만뒀다는 소리 듣고 괜찮나 싶어 와본거야.”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 혜주란 아가씨 아버지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더라…

사람이 좀…무례하더라고.

그래서 긴가 민가 했는데.

학교에 연락해보니 니가 진짜 사직서를 써보냈다고…”

 

어머님이 부엌으로 향하시더니

잠시 후 젖은 손을 타올로 닦아내시며 식탁으로 밥과 국을 가져오셨다.

서지운이 일어나 국그릇을 받아 들었고.

 

“왜…그랬어? 무슨일 있는거지?”

“…너무..신경쓰지 마세요….”

“신경쓰지 말라니. 이런 교수자리 찾는게 어디 쉬워? 요즘 다들 직장이 없어서 난린데…

다 알만한 나이에 너 대체 왜 그러는거야?”

 

“죄송해요...”

“혹시. 수연이 때문이야? 그래서 너 그 아가씨 결혼 마다하고. 사직까지 한거야?”

 

어머니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계신듯 했다.

 

“그런 말까지…들으셨어요…?”

“들은게 반이고 내가 추측한게 반인데. 맞는가 보구나. 내 말이 맞는 모양이야.”

 

“수연이 얘기는..누구한테…?”

 

“니가 사고나서 병원에 입원했을때. 그 혜주란 아가씨가 묻더라. 니 첫사랑이 누구냐고.

사고나기 바로전에 니가 그랬다면서. 첫사랑을 만났다고.

혜주란 아가씨는 그래서 자기는 안될거라며 자포자기 하고있더구나. 너를 많이 좋아하면서도.”

 

서지운은 할말을 잃었다.

그래서 그냥 수저를 집어 들었는데,

 

“무슨생각으로 그러는거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수연이 하나때문에 인생 망칠 생각이니? 고등학생이라서 그럴수 있다고 생각했다치고. 피아노고 뭐고 때려쳐도. 난 이해하려고 했어. 그런데 어른이 다 되서도 니가 이렇게 흔들려야 겠니? 잊을만큼 세월도 지났고, 안그래?”

 

“어머니,”

 

“수연이때문에 두번이나 니 인생 망치는거. 난 못 본다!”

 

“사람들은…나쁜일이 생기면 누구에게든 탓을 하고 싶어하죠…?”

 

“뭐?”

 

서지운은 조용히 웃으며 국을 한입 떠넣었다.

 

“괜한 사람 탓하면. 어머니 마음에만 상처 남아요. 그러지 마세요.”

 

“저런…저런 바보같고 속없는것이 또 있을까….에그. 이럴줄 알았으면 열명쯤 데려다라도 키울껄…왜 하나만 낳아가지고 내가 이 속을 썩어…썩길… 쯧쯧쯧….”

 

“어머니도 드시죠.”

 

“어떻게… 안돼는거야? 꼭 학교 관둬야 하는거야? 수연이는 또 널 떠나갔다면서...

민혜주란 아가씨는…그렇게 싫은거야? 결혼…못하겠냐고..?”

 

곧 눈물이 터지기라도 할듯…어머니의 진짜 속마음이 나오셨다.

차라리 화를내고 욕을 하실땐 마음이 편했는데..

이렇게 애절하게 물으시니 가슴 깊은곳이 저려왔다.

 

“결혼은…비상통로가 아니잖아요. 급하다고…미안하니까…또는 나의 앞날을 위해서… 싫지 않으니까 그냥 같이 살다보면 정이 생기는거… 그런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사랑해서 결혼하고 잘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니? 또! 사랑해서 죽고 못산다고 결혼해서 헤어지는 사람은 또 얼마야? 니가 몇살인데 사랑 타령이냐? 결혼은 현실이야. 서로 비슷비슷하게 맞고. 또 어울린다면. 그렇게 살다가 도토리같은 자식들 낳아봐라. 그 이쁜것들 키우는 재미가 행복이고, 그렇게 서로서로 맞춰가면서 추억을 꾸미는게 사랑이야. 인생 금방이야! 이렇게 시간낭비하고 사랑타령만 하다가 외로운인생 혼자보내면. 그게 사랑이야 그럼?”

 

“그런 사랑도 있겠죠”

 

그때.

 

띵동.

벨이 조금 요란하게 들렸다.

 

“누구냐. 이 아침에?”

 

서지운도 이상한듯. 수저를 놓고 문쪽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문밖에는 유신우가 와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서지운이 먼저 인사를 하려는데,

 

“혹시 David이… 여기… 오지 않았습니까?”

 

“네…?”

 

유신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고,

그는…말없이 작은 편지 하나를 내 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금…Clara는 반쯤 정신이 나가서… 제가 대신 찾아다니고 있어요. 혹시 연락이오면…알려주십시오.”

 

유신우가 그렇게 말하며 내민것은, David이 쓴 편지였다.

 

 

‘엄마.

내가…사랑하는거 알지..?

 

이제 나로부터 자유해. 그래야 해…

난 괜찮으니까 걱정말고.

유럽은 가지 않을래요.

여기서 혼자 힘으로 해보고 싶어.

그리고 아버지…

아직은 그분에게 기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엄마는 바보같은 결정만 할것 같아서.

미안해. 속썩여서.

나중에 만나면…

마음껏 혼내주세요.

사실 지금은…

나도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

 

유신우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Clara는…내가 여기 온거 몰라요. 이 편지도…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겁니다.

그 만큼. 서교수님께 부담주지 않으려고…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혹시나 해서… David이 서교수님께…혹시나 찾아오지는 않았을까 싶어서요.”

 

서지운은 씁쓸하게 한숨을 내 쉬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유신우를 바라보았다.

 

“David이 언제…나갔습니까.”

 

“그러니까…벌써 일주일 전이네요. 한참 시험기간이라는데…학교도 계속…안 나간 모양입니다.”

 

서지운은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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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힘겹게 일어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어지러운듯 잠시 휘청거리다,

의자를 잡고 침착하게 물컵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물을 부으다가…

 

따르릉..

소리가 나자

따르던 물을 바닦에 그대로 떨어뜨리고 전화기로 향해 뛰었다.

 

“여보세요! Hello!”

 

“Good Morning. Is this Mrs. Han? I am in your area today inspecting windows. Do you have double pane windows?”

 

수연은 한숨을 몰아쉬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연락은…해줘도 되잖아. 어디있는지 말 안해도…잘 있다고 얘기는. 해줄수 있잖아….”

 

그때 벨이 울렸다.

급하게 정문을 열었는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서있는 사람은.

 

“지운아…”

 

서지운은 조용히…아주 미세하게 웃어주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내가 도와줄테니까…

울지 말라고.

 

수연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왠…일이야.”

집안 곳곳에 박스들이 쌓여있었다.
유럽으로 가기위한 준비가 아직 한참이었던 분주했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직. 이사 안했구나.”

“응? 이사…아…그거…”

“David이… 사라졌다고”

“어떻게 알았어…”
수연은 창백한 얼굴로 서지운을 올려보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핏기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다 큰 녀석이 충동적으로 그럴수도 있지, 수연이 너는 왜 그러고 있어. 다 포기한 사람처럼.”
서지운은 나무라듯 말했지만,
수연에게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 어떻게 알고 온거야…?”

 

“그게…중요해? 어쨌든. David을 찾는게 먼저잖아.”

 

“네 상황도…힘들다고 들었어.” 수연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얘기해봐. David은 언제 어떻게 사라진거야.”
서지운은 수연의 눈동자를 흐트러짐없이 마주보았다.
자신이 어떻게 됐건. 자신에게 닥친일이 어쨌건. 그런건 전혀 관심도 없어 보였다.

 

“돈도… 안 가져갔어. 은행에 돈도 그대로구… 크레딧카드도 전혀 안썼다는데…친구들 아무한테도 연락안했나봐. 옷도 챙겨가지 않았고. 차도 두고가고... 밥은 제대로 먹는지…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전화도 안할 아이는 아니거든. 내가 걱정할까봐. 꼭….전화는 할 아이거든. David이…이럴리가 없는데…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일주일이야. 그런애가...아니거든.”

 

그녀는 참지 못하고 희미하게 솟구치는 눈물을 닦아냈다.

 

“…돈도 없고 차도 없다면. 오히려 가까이에 있을수 있겠네…"

 

“안 가본곳이 없어.”

 

“학교에 한번 가보자.”

“이미 몇번…가 봤어.”

“학생들에게서 정보라도 얻을수 있지 않겠어?”

서지운의 표정이 진지했다. 왠지 신뢰가 가는 그의 눈빛을 의지하여,
수연은 있는힘을 다해 그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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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서지운을 따라 캠퍼스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두사람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며, 여러 학생들과 교수들이 서지운에게 인사를 했다.

 

서지운을 보고는 무척이나 안타까와하는 교수님들과,

또 놀라는 학생들도 많았다.
한참 시험기간인 그 때,
병가라는 이유로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서지운 교수가 대학교 한복판을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으니,
이상할만도 했다.

 

“I thought you were totally bed-ridden!  How come you took a medical leave? Are you okay?”

 

 

서지운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고, 만나는 학생마다, 교수마다, David의 소식을 물었다.

그 아무도 David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본사람도 없었고, 그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저녁이 늦어졌다.

수연은 무척이나 침착했지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서지운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지운아...오늘…고마왔어.  이만 가봐, 난 혼자 갈께.’

수연은 힘없이 웃었다. 포기한듯. 미안한듯…

 

“한군데만. 더 가보자.”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지었다.

서지운을 보면… 온통 마음속 한구석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마음이 아파오기도 했다.

 

“오늘은 그만해. 지운아. 너 몸도 좋지않은데…지치잖아…이만 가서 쉬어.”

망설이는 수연을 잠시 바라보던 서지운은 그녀의 한쪽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아 주었다.

 

“David을 찾아야 너도 쉬지... 피곤하면 여기 카페에서 기다릴래?”

 

서지운의 눈동자가 맑았다. 참으로 따뜻하고도 믿음직 스러웠다.

그 눈동자안에 비추인 자신의 모습이 오랫만에 안정된 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서지운을 따라 수연이 도착한 곳은 음악학과 빌딩 옆 골목에 자리잡은 작은 성당이었다.

희미한 불빛아래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가 보였다.

 

“David이 주로 이곳에서 연습했다고 들었어. 전공이 아니기때문에 연습실은 빌리기 힘들었을거야.”

서지운은 나지막히 설명하며 피아노 뒤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 피아노 뒷쪽으로 있는 근무실에 청소부 아저씨가 한분 계신데… 그분이 혹시 David을 보셨을지 몰라.”

 

“지운아.”

 

수연이 지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서지운이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눈물 가득 맻힌 눈으로 그를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아노…한번만 쳐주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