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쳐달라는 수연의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서지운은 잠시 말없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미안해…내가 미쳤나봐… 어서…알아보고 가자. 피곤할텐데.”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후회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서지운은 여전히 수연을 가슴아픈 눈길로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하듯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수연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서지운의 피아노치던 모습이 늘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 말이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그를 떠나겠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다시 붙잡고 싶은건가.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말이었다.
말없이 수연을 바라보는 서지운을 뒤로하고 수연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먼발치에서
한가닥.
친근한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그 옛날,
수연이가 수줍게 만들어 들려줬던 멜로디를 치기 시작했다.

간단했던 그 멜로디는 곧 날개를 단듯.
높은 화음에 하늘로 치솟듯 했고,
잔잔한 파도가 어루만지듯, 멜로디를 더 넓은 바다로 보내주었고,
그 넓은 바다에서 더 깊고 더 풍부한 아름다움으로
그윽하고 기품있는 소리를 냈다.

치유와 용서의 음악이었다.
수연의 외로웠던, 아팠던 모든 기억들을 모두 씻어내고도 남을만큼.
넓고 깊은 사랑의 목소리같이 들려왔다.

하모니가 단조에서 장조로 옮겨가면서
슬픔을 뒤로하듯,
이제는 눈물보다
웃음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처음 지운과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배우던 햇빛 찬란했던 그날.
선선한 바람이 불던 오후에 지운이의 어깨에 기대 앉아 좋은 책을 읽던 그날.
지운에게 주려고 맛있게 만들었던 음식들.
고맙다며, 맛있다며 배불러도 먹고, 또 먹던 서지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수연의 가슴이 먹먹할때마다 늘 조용히 웃으며
천사들의 연주같은 피아노소리를 들려주던 서지운의 아름다운 옆모습… 그의 신비로운 손가락…
그리고 그 손이 처음으로 수연의 손을 꽉 잡아주었던 낙옆가득한 골목길…

잊으려고. 지우려고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 숨겨버렸던 그 예쁜 기억들이
하나…둘씩 반짝거리는 빛을 타고 수연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그 뒤로 있었던 아픔과.
역경과
어려움의 고통도 그 찬란한 하모니에 실려 날아가듯이...

서지운은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단 한번 만들었던 소박한 멜로디에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었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멜로디는.
이제 그 날개를 펼쳐 아픈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수있는 심포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지운의 연주가 끝나고 한참 후에도.
이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은
서러움과
아픔과
초라한 고통을 씻어보내는 과정을 지나
상처를 덮어주고
감사로 기쁨을 얻은,
감격의 눈물로 변해갔다.

눈물이 마를정도로 울고 난 수연은 옆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는 서지운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너와의 약속 지켰는데….”
서지운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너는…언제 날 찾아 올거야…?”

“내가 뭐라고…나 까짓게 뭐라고 그런 약속을 기억해…”

“피아노를 포기하고…음악을 다 그만뒀을때…
이 멜로디가 나에게 다시 희망을 줬어.
너와 한 약속을 지켜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작곡을 시작하게 된거야.”

서지운은 웃으며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잠시 있어봐.  근무실에 한번 가보고 올께.”

서지운이 성당 뒷쪽으로 위치한 근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Mr. Tyler? Are you there?”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Mr. Tyler?”

문을 두드리던 서지운은 한숨을 쉬고 돌아서서 수연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문쪽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살짝 돌려봤는데.
문이 스르르. 쉽게 열렸다.

“David!”

서지운이 소리를 질렀고,
놀란 수연은 미친듯이 서지운이 서 있는 문쪽으로 뛰어갔다.

근무실안에는 셀수없을 만큼 많은 술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고,
Mr. Tyler은 곤드레 만드레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졌는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고 있었다.

David역시 쓰러져 있었는데, 그는 자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고, 정신을 잃은듯,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수연은 소리를 지르며 David을 껴안았는데, 그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열이 나! 심한것 같아. 병원으로 옮겨야 겠어!”

이렇게 온통 난리가 났는데도 Mr. Tyler은 태평하게 잠에 빠져있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서지운은,

“내가 업을께.”

David을 업고 뛰면서, 서지운은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David에게서 펑펑 풍기던 술냄새…
자기가 마신게 아니고 실수로 엎은거라던…
표절문제로 정학을 시키려고 했을때 술까지 취해서 찾아왔는줄 알았었는데.
그때도 아마 이 녀석은 이 성당에서 Mr. Tyler과 신세타령을 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