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비행기가 서울에 도착할때까지.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자는척을 했다.
왠지 그 사람 마주보기가 창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고…
꿈인지 생시인지 헤매다가 눈을 뜨니 창문밖으로 인천공항 활주로가 보였다.
그 사람과는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 인사하려고 돌아봤는데,
서류작성과 짐정리에 모두 분주해서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비행기에서 내리니 어질어질했는데.
“유니야!”
승민이가 나를 확 잡아 끌어 안았다.
“아… 승민아~”
“너 비행기에서 퍼 잤구나?”
“어떻게 알았어? 나 엉망이야?”
“엉망이면 어때!” 그는 나를 꼭 껴안고 놔주지 않았다.
켁.켁… 기침이 나올정도로.
“엉망이라도 예뻐. 너 보고싶어서 죽는줄 알았어 쨔샤.”
“아유…승민아…” 숨을 쉴수 없어서 그를 살짝 밀어내었다.
이때쯤이면 또 느끼한 그의 대사들이 시작될것이다.
“너가 없는 세상은. 껍질없는 바나나야.
한달 묶은 땅콩이고. 미지근한 커피야. 정말 재미도 없고 살맛도 안났었다.”
“승민아, 근데 나…있잖아. 머리가 좀 아프다. 집으로 곧장 가야 할라나봐….”
“무슨소리야? 우리가 얼마만에 만난건데! 피곤하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거아냐?”
“어? 밥? 아… 알았어. 어디 갈까? 너 뭐 먹고 싶어?”
그제서야 기분이 풀려 헤헤하는 승민을 자세히 흩어보았다.
그는 검정색 가죽쟈켓에 진한색 청바지. 내가 좋아하는 Armani 체크셔츠를 입고 있었다.
썬글라스는 그의 조각같은 얼굴에 환상이었고,
루이비통의 오버 사이즈 가방을 어깨뒤로 맨 센스있는 모습은 환장하도록 멋있는 코디였다.
“여전하구나.” 싱긋웃곤 그의 믿음직스런 팔을 끌어 안았다.
그도 씨익 웃으며 내 머리위로 키스했고.
강승민…
그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밖에 몰라서…
나는 왠지 그에게 늘 미안하다.
아파트 앞.
“유니 너…직장말이야…”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그렇게 피곤해? 나… 잠깐 커피마시고 가면 안돼?”
“커피? 어. 그럼…들어가자”
커피를 열심히 만들며 짐정리하는 나를 훔쳐보는 승민은 행복해 보였다.
왠지.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든다는건…나 역시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것이다.
“자… 넌 피곤하니까 우유마셔. 거품내서 달콤하게 댑혔어.”
“고마와.”
웃는 내 모습을 보고 그도 따라 웃었다.
“내일 아침에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 있다고 했지?”
“응. 좀 자고 일어나서 준비해야 해.”
“내가 도와줄까?”
“아니야. 괜찮아.”
“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좀 쉬어. 난 여기서 네 짐 정리좀 하고 세시간쯤 있다가 깨워줄께.
너 일하는거라도 도와줘야 너하고 함께 있을수 있잖아.”
“너… 회사일은?”
“오늘 너 오는 날이라서 그냥 쉰다고 말했어. 우리 팀장님한테 내일 좀 혼나겠지만. 괜찮아.”
“그러지 마.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하면. 직장을 빨리 바꾸라니까?”
할말이 없어 그가 들고 온 따뜻한 우유를 받아 마셨다.
그 달콤함과 함께 몸이 나릇해졌다. 많이 잤는데도 피곤한걸 보니 몸살이라도 왔는지…
“나… 그럼 좀 있다 깨워줄래?”
“그래. 편하게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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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먼데서 그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승민이. 얘가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고 이러지?
희미하게 눈을 떳는데…
최우진.
“꺄악!” 너무 놀라서 소리를 냅다 질렀다.
“왜그래요?”
“여기가…어딘데요? 당신이 왜 또…”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모래사장이 보였다.
햇빛이 따스했고.
나는 아까 비행기에서 그 사람이 쓰던 담요위에 누워있었다.
으앗.
또 꿈인가?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먼곳을 바라보았고.
그의 어깨에 상처. 다리에 묶은 붕대. 아까 꿈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하다…”
“정신이 좀 들어요?”
“아….”
꿈을 연속으로 꾸나. 참 별일이 다 있네.
“귀는… 이제 잘 들리나요?”
“그럼요.”
그는 다행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니까. 뭐…
“최우진씨 다친데는...아. 참. 걱정 마세요. 꿈에서 아프면 더 오래산데요.”
최우진 그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걱정 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와… 최우진씨… 그 표정! 정말 잘 생겼다. 우하하하… 꿈인데 뭐 어때. 최우진씨도 기분 좋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이. 걱정 마여!” 나는 털털하게 그의 어깨를 팍 두들겨 주었다.
“내 꿈에 자꾸 나오는걸 보니. 나한테 강한 인상을 남긴 모양인데. 행운으로 알아요. 응?”
나혼자 낄낄대며 웃었다.
아. 정말 이상하다.
그때였다.
그가 쉿!
하며 내 입술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고.
드드드드드….하며 시끄러운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머리위를 보니 나무틈에 여러 박스를 모아놓고 벽과 지붕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왜요..?”
그는 나를 거의 안다시피하고 내 옆자리에 숨을 죽이며 누웠다.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면서, 굵직한 근육의 움직임이 내 팔옆으로 느껴졌다.
“우와… 근육…”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입을 꽉 틀어막았다.
어? 켁켁…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의 관념이 사라진 상태여서 잘 알수가 없었지만,
한동안 나는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숨을 죽이고 누워있었다.
그를 자세히 흩어보며…이 사람을 내가 이렇게 또렷히 기억하나?
어떻게 이렇게 콧털까지 보이지?
“왜 그래요? 괴물이라도 있어요?”
“원주민인것 같아요. 비행기에서 떨어진 물건들을 가지러 온 모양인데… 그냥 보기에는 좀 위험해 보여요.”
“아…” 하며 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니, 그는 뭔가 기대되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알겠다. 생각 났어요. 뭐랄까… 타잔 스토리랑 블루 라군. 그리고 포카 혼다스를 섞어놓은것 같아요. 와. 재밌겠다.”
“정신 좀 차려요!”
그는 좀 화가 난듯했다.
아…그럴만도 하지. 그래도 내 꿈인데 같이 장단좀 맞춰주면 안돼나?
“와…화내는것도 멋있다. 헤헤..”
“이봐요. 한유니씨. 지금 충격이 큰건 알겠는데…
그래도… 한번만 기억하려고 노력해봐요.
기억… 안나요?”
“무슨 기억이요? 아까 꿈이요? 기억나죠! 이렇게 연속으로 꿈꾸는거. 처음이예요! 완전 재밌어요.”
“그래요… 꿈이라면…좋겠죠.”
어…? 꿈이…
아닌가?
“밤이 되기 전에.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봐야 겠어요. 일어설수 있겠어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아닌데. 꿈이 맞는데…
다리가 굳은듯, 잘 움직여지지 않았는데, 그가 나를 번쩍 일으켰다.
“괜찮아요?”
다리가 후들거렸다.
“걸을수 있겠어요?”
“정말… 꿈 아니예요?”
“꿈이던 아니던. 지금은 자리를 옮겨야 해요. 저한테 기대세요.”
이상하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 그의 말대로 내 몸을 그에게 맡겼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의 부드러운 숨소리가 느껴졌다.
꿈이 아니라면. 내가 부린 추태는? 잘 생겼다는둥. 와, 멋있다는둥…
창피해서 어쩌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꿈이 아니면 진짜 죽느냐 사느냐…
“정말… 꿈이 아니라면. 한번 꼬집어 주실래요?”
그가 나를 돌아보고 기가막히다는듯 웃었다.
“안 깨우는게 나을지 모르겠네요. 그냥 편한데로 생각하세요.”
그와 함께 아름다운 해변을 걸었다.
아름다왔지만 뭔가 불안스러운. 곳곳에 아직도 많은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내가 팍 기대어 걸어서 그런지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다리도 절뚝거리면서 나를 부축하여 걷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미안해요. 힘드시죠?”
그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땀을 닦았다.
“저쪽에. 저 동굴안에… 제가 들어가 볼께요.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으르렁! 하며 사자가 튀어나올것만 같은 동굴이었는데,
순간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고,
“조심…해요.”
불안했다.
곧 그가 다시 나타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괜찮은것 같아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보죠.”
동굴안은 어두웠는데,
그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웬수같은 담요도 챙겨와서 내 앞으로 깔아주었다.
“근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그럼. 살아남은 생존자끼리. 잘 지내야죠?”
“아...그래도 저 같이 예쁜여자랑 살아남아서 참 행운아…아니지. 이게 꿈이 아니라면… 이런 말은… 하면 안돼는건데. 그죠?”
그는 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을수 있다는건. 분명 행운이 맞네요.”
바로 그때.
투투둑.
하는 소리가 들리며 땅이 속으로 꺼지는듯,
아아악!
동굴안에 어딘가로 그와나는 한없이 떨어져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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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야! 야! 유니야!”
깨어나 보니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지, 승민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눈앞에 앉아있었다.
“왜 그래? 나쁜 꿈 꿨어?”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살펴보니.
내 방안이었다.
“어…꿈. 정말…이상한…꿈.”
승민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괜찮아. 꿈이니까… 괜찮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는 나를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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