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가 내 입술에 키스했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분명히 나는 그의 입술의 숨결을 느꼈는데…
최우진의 눈빛도, 손길도…너무나도 생생해서…현실이라고 믿어버렸는데.

“괜찮으세요…?”

간호사가 걱정스러운듯이 묻는다.

“아직…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신건 아닐거예요. 유니씨가 그랬던것처럼, 시간이 걸릴거예요.”
 

“그래요. 시간이…걸릴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하얗게 먼 기억으로 사라질거야. 
최우진도…
오빠도…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는 만나지도 않을 사람들처럼.

마음 한구석이 텅 비고 아픈것 같은 이 기분도.
몇달. 아니 몇주만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변할거야. 
나에게는 승민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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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그래?”

“응?”

“퇴원하는거 매일 기다리더니, 막상 오늘은 별로 기뻐하는것 같지 않아서.”

“아니야. 바깥 세상 보고싶어 죽겠어. 나 이제 막 놀러 다녀도 되는거야?”

“어잉? 일에 미쳐 사는 한유니가. 놀러다닌다고? 내 귀가 잘못된거 아니야?”

“그랬지…일에 미쳐 살았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에 푹 빠져 살던 내 모습이 생소해 질만큼.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달라져 있었다.
말수가 적어졌고,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늘 가까이에서 보던 승민이가 더 당황스러워 했다.

“퇴원하자마자 회사 먼저 가본다 할까봐 조마조마 했구만.”

“나. 일 관두려고.”

“정말이야?”
승민은 너무 놀라서 들고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나는 그를 보며 웃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퇴원수속을 마치려고 바쁘게 움직이는 승민을 기다리느라 자리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긴머리를 찰랑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저기요…”

올려다보니.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되게 예쁘게 생겼네..?
“전에…우리 오빠 병실에 왔던 사람. 맞죠?”

“우리…오빠요?”

“최우진씨요.”

“네? 아…”

그 여자였다. 최우진에게 죽을 떠 먹이던… 절세 미인.

“비행기…같이 타셨다면서요?
그때 병실까지 찾아오시고..
우리 오빠가 하두 여자들한테 잘해줘서.
혹시라도…착각하셨을까봐.
만약에 오빠가 실수했으면… 죄송하다고 제가 대신 사과드리려구요.”

씨익 웃는 그녀의 얼굴이 의아 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렇게 까지 찾아와야 했을까? 잠깐 병실로 찾아간것 뿐인데?

“그런 말씀까지…안해주셔도 되는데.
착각은. 여자친구분이 하셨나보네요. 전 최우진씨한테, 전혀 관심 없거든요.”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다.

“가자. 수속 끝났어.”

최우진씨한테.

전혀. 관심 없거든요…. 라고 내뱉은 내 말이 귓가에 빙빙 돌았다.

그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조용히 웃으며 내 눈을 피하는듯 하더니,
돌아서면서 그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빔밥 먹을래?”

멍해져서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그가 나를 보던 눈길이 아직도 느껴지는것만 같았다.

“가자. 우리 유니 뭐 먹고 싶어?”

다가온 승민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비빔밥만 빼고. 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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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며칠을 바쁘게 지냈다.

미국과 한국지사를 오가는 일이 싫어졌고 비행기를 타는것이 두려워서
엄마가 그렇게 원하시던데로
한국에서 내 상점을 열기로 했다.

남의 회사에서 좋은일 해줄게 아니라 너만의 일을 시작하라고 몇년전부터 엄마는 나를 설득해 오셨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싶었고, 혼자 가게를 내는것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한번 해보고싶은 욕심이 생겼다.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건지… 전에 없던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

바쁘게 지내면서 서서히 그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랬지만,
쉽지 않았다.
늘 허전하고...왠지 마음이 아프고...

“계약 마췄으니까 다음단계로 넘어가자.” 
일을 도와주시는 박변호사님이 가방을 챙기셨다.

“뭐부터 해야할지...모르겟어요.  많이 도와주세요.”

“걱정마라. 니 어머님이 어떤분이신데. 아, 오늘…인테리어 하시는분 만나는건 알고 있지?”

“오늘이요? …”

휴…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았다.
한시간 후에 근처에서 승민을 만나기로 해서..

“내일로 미루면 안될까요?”

“미안하다 유니야.  내가 좀 바빠서. 아. 저기 벌써 오셨네.”  

“이렇게 서두르고 싶지 않았는데…” 챙기려던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다시 시계를 보았다. 얼마나 걸려야 하나…계산하며 잠시 생각하는데,

“어머님께서 디자인부터 건축까지 최고로 하라고 하셔서. 정말 어려운분으로 모신거야."

“그래도 꼭 오늘….”
끝말을 흐릴수 밖에 없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보는 사람.

“어서오십시오. 바쁘신데, 정말 감사합니다.”  
박 변호사님이 급하게 일어나 그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유심히 문고리를 살피다가, 박 변호사를 보고는 옅은 미소를 짓고 악수를 한다.
그의 눈도. 
나의 눈과 마주치자 차갑게 얼어 붙었다.

왜. 
최우진이 내 앞에 나타난거지.
또 꿈을 꾸는건 아닌지,
나도모르게 내 입술을 살짝 꼬집어 본다. 볼을 잡아당기면 너무 표가 나니까.

박 변호사가 뭐라 뭐라 하며 혼자 껄껄 웃으시는데,
나에겐 최우진의 굳어진 표정만 보였다.

“이렇게 작은 일을 맡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동안 일을 안하셨다고 해서, 해주실지 잘 몰랐습니다. 저번에 부산 항공 프로젝트도 안하셨다고…”

“몇년…쉬었습니다. 이제 정신 좀 차려야죠.”

윈도우카페에서…
일한다더니.

“안녕하세요.”  그의 친근한 목소리.

“윈도우 카페에서…일한다고…” 말을 흐지부렸다. 꿈이었던가. 생시였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박 변호사님이 좀 놀라신듯 웃으셨다. 
“유니도 알아? 나야 워낙 건축에 관심이 많지만, 유니도 그 쪽에 보는눈이 있을줄 몰랐네?”

멍청히 박 변호사를 바라보는동안,

최우진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더니,

“그럼. 일부터 시작하죠.”

“윈도우 카페가 뭐예요?” 
최우진을 보며 물었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섬에서 아무재료나 집어서 척척 집을 만들던 사람.


“최우진씨 작품이지. 몇년전에 큰 상도 받았고… 그리고 그 후엔…영 일을 안하셔서. 은퇴했다는 소문만 돌았었는데..” 
박 변호사님이 대신 대답하셨고.

“거기서…일하신다 더니.”

최우진은 말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조용히 연필로 큰 정사각형을 그리고는.

“궁금하시면, 한번 놀러 오셔요.” 하고 피식 웃었다.

“난 그만 가볼께. 최우진씨께 잘 설명해 드리고, 어려운길 오셨으니까 식사대접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최우진이 대답했고.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박변호사님은 서둘러 갈길을 떠나 가셨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텅 빈 가게안에.

작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세개.

그와 나는 그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지금…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지…가슴이 떨려왔다.
최우진은 말없이 연필을 계속 움직였다.

“무슨 색을…좋아하세요…?”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뭔가를 스케치 하며 물었다.

“흰색...이요.”

“어렵네…”
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차가움과 따뜻함. 섬세함과 흐트러짐.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

“섞인게 좋은데요.”

“동그라미. 세모. 네모중에는 뭐가 좋아요.”

“혹시…알고 오셨어요?”

최우진이 스케치를 하다 말고 나를 올려 보았다.

“제가…여기 주인인걸…아셨냐구요.”

“글쎄요. 이름 듣고…그럴수도 있겠다… 생각은 했어요.”

“가방 디자인하는 한유니가. 꽤 흔한가요?”

그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잠시 곰곰히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질문은… 뭘 의미하시는건지…제가 먼저 여쭤봐야 할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고 해야… 기분이 안 상하시겠죠?”

그렇다고 해야…니가 화를 안내겠지? … 하던 그의 말투가 스치고 간다.

“저기, 혹시요…”

물어볼까? 나 처럼….긴 꿈을 꾸었냐고…어때. 아니면 아닌거지. 

그런데 그 순간, 그가 손목에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이 정신 나간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아… 라는 표정으로.

“바쁘신가 봐요.”

“아뇨. 아닙니다…”

“질문하시던거…마저 하시죠. 저…동그라미. 세모. 네모. 다 섞인거 좋아해요.”

“그래요? … 그럼. 우선 여기서 좀 골라보시죠.”
최우진이 스케치북을 내쪽으로 돌려 보였다.

지금 막 스케치 한듯 한데, 
우리가 앉아있는 빈공간과 똑같은 모양의 설계가 다섯개 그려져 있었다.

그 다섯 설계는 대강 스케치로 느낌만 표현했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렸다는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뭘...고르라는 말씀인지..?”

“어떤것이 제일 눈에 띄는지 느낌만 말씀해 주세요..”

그의 얼굴을 무심코 쳐다 보다가, 

그가 했던말이 자꾸 떠오른다...

꿈이라면... 
그럼 나를 봐도 모른척 하겠구나...?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면 안돼.  현실과 꿈도 구별 못하는 멍청이... 바보...


“아…전 이거…이게 눈에 띄는데요.” 

그는 스케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일을 같이 하려면 느낌이 먼저 통해야 나중까지 쉽게 풀리거든요. 한유니씨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따라가면서 제가 믿는 형태를 지켜야 하니까요.”

“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난걸까.
꿈은 그렇다 쳐도.

그때 비행기에서 만났고,
함께 병원에서 사경을 헤맸고.

이렇게 다시 함께 일을 하게 됬는데 저렇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 일만 할수가 있는건가?

“한유니씨는…건강하죠?”

그는 스케치를 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왜요.”

“웰빙 재료를 쓰면. 값이 좀 비싸지만… 특히 건강에 신경 쓰신다면 투자할만 하거든요.”

기가막혀서 훗. 하고 웃었다.

난 또… 병원에서 만났으니까… 아니…혹시라도 나를 걱정해 주나 했는데.

“비싸도 돼요. 웰빙, 좋죠.”

최우진이 나를 올려다 보더니, 
다시 스케치를 시작했다.

"특별히 알레르기는...없으시죠?"

알레르기는...오빠가 전문이잖아.. 

하는 말이 혀끝에까지 와 닿았다.

“일 하시는 스타일이. 혼자 잘 알아서 하실것 같은데,
여기 사이즈 재 보시고, 설계도 완성되면 연락주세요.”

벌떡 일어나서 서둘러 가방을 챙기는데,

“어디.. 가세요?”

“여기. 열쇠에요. 아직 물건도 없는 가게니까. 그냥 닫고 가시면 돼구요.
건축끝날때 까지 이 열쇠 쓰세요.”

“제가…뭐 실수 했나요?”

잠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아뇨. 그런게 아니고…제가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나와서 문을 닫는데,
갑자기 참았던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나를 모르는 그 사람이. 왜 이렇게 야속하게 느껴지는 건지
엄청난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가슴떨었던 나에 비해
별 관심없는 그의 표정과
성의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가 왜 이렇게 서운하게 생각되는지.
무슨 색을 좋아하냐고?
건강하냐고...
알레르기가 있냐고...?

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러지… 그냥 꿈이 었을 뿐인데.

눈물을 닦고 서둘러 차 키를 챙기는데, 
내 어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의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최우진은
미안한듯,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한유니씨…가 주인이라는거… 알고 있었어요.”

할말을 잃고 그를 보는데...
그때,

"유니야! 유니야!"
박변호사님이 헐레벌떡 뛰어오신다.

"변호사님! 왜 그러세요?"

"너... 지금 나랑 같이 가줘야 겠다. 최우진씨, 실례하겠습니다."
변호사님은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셨다.

"왜요. 무슨일인데요?"

"가면서 얘기할께. 시간이 없어."

최우진을 잠시 돌아보고, 급하게 변호사님을 쫓아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