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민은 기다리다 못해 내가 있는곳으로 걸어 나왔다.

돌아서는 최우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의 손을 꽉 잡아 쥐더니,
“가서 앉자. 피곤하지?” 하며 승민은 최우진을 노려 보았다.

승민의 다정한 목소리. 그의 따뜻한 손길이 오늘따라 세삼스럽게 느껴졌다.
정말…승민이가 그 사람이 말하던 박태식이면…어떻하지…

승민과 마주앉은 테이블은 전과 다르게 모두 흰색과 핑크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맘에…들어?”

“응? 어…니가…주문한거야?”

“그래. 너 흰색하고 핑크 좋아하잖아.”

“고마와…뭐 먹을까. 전에 먹었던거. 괜찮았는데…”

별다른 얘기 없이 식사를 함께 했다.
박태식…
승민이 그 사람을 알까.
그냥 그 아저씨가 거짓말로 만들어 낸것일까…
너무나 절실하고 진실해 보였던 그 아저씨의 눈동자.
그러나 늘 친근하고 다정한 승민…
그런데 정말이라면… 나는 어떻게 하지. 승민이는…
승민도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뭔가 깊은 생각을 하는지,
늘상 수다를 떨며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승민이.
오늘은 좀 달라져 있었다.

“승민아… 너. 오늘 왜 그렇게 조용해…?”

“여러가지… 많은 생각때문에.
기분나쁘지만… 그 녀석이 어저께 했던 말…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말.”

“정말 니가 나에게 뭔가. 아쉬운게 있었던건지…내가 너한테 뭘 잘못하고 있는건지…”

“미안해…괜히 너 신경쓰게 해서.”

“일부러 여기서 만나자고 그랬어. 그 바람둥이 같은 자식.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 나쁜녀석 기를 확 죽여주고 싶어서.”

“어…?”

“근데 너도. 오늘 많이 조용하구나. 무슨 일 있었어? 참. 아침에 경찰서 다녀온건. 잘 해결된거야?
아까 미팅 하느라고 전화 못해서 미안해. 일본에서 바이어들이 왔거든. 어머님은 괜찮으시고?”

“어… 그게…그 범인을 만났거든… 그 사람이… 박태식이라나…뭐. 그런 사람을 찾고있데.”

“박태식이 누군데?”

되뭍는 승민의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너무나 순수해 보이고 진심어린 그의 눈동자를.

정말 그가 박태식이었다면 화들짝 놀라지 않았을까.
그 눈동자가 조금은 흔들리지 않았겠어…
승민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건. 정말 미안한 생각이었다.
한번도 내 앞에서 그 흔한 white lie를 한적도 없다.
너무 어린애 같이 순수해서 오히려 돌아다니면서 늘 손해를 보고 다녔는데...

“왜 그래? 아.. 내 얼굴에 뭐 뭍었냐?” 승민은 의아하다는듯 냅킨으로 입 주위를 열심히 닦아냈다.

“어. 이 쪽에. 소스 뭍었잖아…”  조심스레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하필 그때.
“후식 메뉴입니다.”
최우진은 다정한 연인들이 서로 얼굴을 닦아주는것을 보았을것이다.

“아. 저기, 아까 부탁한 후식, 지금 가져 와요.” 승민이 마침 잘 왔다는 듯, 최우진을 보고 말했다.

최우진은 말없이 사라졌다가 예쁜 케이크를 하나 들고 와서는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돌아서 걸어갔고.

그 케�恙〈�.
너무나 아름답게 장식된 핑크색 꽃다발 위로 예쁘게 걸쳐진…
반지가 있었다.

저 바람둥이 같은 녀석의 기를 팍 죽인다더니…
이러려고…?

“유니야.”

승민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너 외국으로 출장 안다녀도 돼고…
나도 이제 회사에서 자리 잡혔고…
우리 사귄지 3년이다… 오늘.

이것보다 더 멋지게 프로포즈 하고 싶었는데…
나를 다 주어도 너에게 표현이 안돼..
나의 부족한 사랑은…더 이상 기다릴수 없어서.

우리 이제…
그만 기다리고
결혼하자”

“승민아…”

그의 진심어린 사랑을 나 혼자 의심하고 있는것일까.
나의 이 흔들리는 마음은 과연 그 박태식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것인지.
아니면 내가 승민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럴리가…없는데.
승민은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가장 믿었으며 오랜시간을 사귀어 온…
나의 승민. 나의 남자친구잖아…

“너…”

“왜그래, 유니야?”

“넌 날…왜 사랑하니?”

승민은 잠시 나를 보곤 좀 민망한듯, 웃었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봐라. 넌. 왜 살아있니…라고.”

“왜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데.”

“너가 없이는…살수 없으니까. 너를 위해서 숨을 쉬고, 일을 하고,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싶어.”

내 마음은 복잡했다.
그의 프로포즈는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 나는 그저 마음이 무거웠을 뿐이었다.

“유니야…너도. 날 사랑하지…?”

가뜩이나 심각한 순간인데,
그때 와장창! 꽝!
소란스런 소리가 카페 입구쪽에서 들려왔다.
손님들 모두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최우진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절세미인은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데로 그에게 집어 던졌다.
주위에서 말리려고 달려들었으나, 그녀는 얼마나 기운이 센지…
화가 너무 치밀어 올라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어쨌든 인정사정없었다.

최우진은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애썼고, 그녀는 소리쳤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길은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 나쁜 놈아! 내가 그런다고 널 놔줄거 같아? 나 없이 니가 잘 살거 같니? 내가 평생 따라다니면서 괴롭힐거야!”

승민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기가막히다는듯 허… 콧바람을 뿜었다.

“와… 정말 나쁜 놈인가 보네… 연약한 여자가 저렇게 까지 할 정도면… 바람둥이 정도가 아니라 완전 사깃꾼아니야? 야. 나가자. 이런데서 음식 먹다가 큰일 나겠다.
에이. 간만에 폼잡으려다가 완전 망했네.  내 질문에 대답은… 좀 이따 해 줘도 돼. 이런 소란스러운데서 분위기없이 하고싶은 얘기는 아니잖아.”

승민은 미안한듯 웃고 일어서서 의자에 걸쳐있는 나의 겉옷을 챙겨주었다.

정말 최우진은 나쁜 사람인가…?
심지어 내 꿈에서도 그는 스스로 말했었다.
자긴 별로 좋은 사람 아니라고.

승민과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카페 옆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누가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려 슬쩍 돌아보니,
그녀는 이제 아주 엉엉 울고 있었다.

최우진이 흐느끼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어깨를 잡은채 마주 보고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고,
그 절세미인은 그를 뿌리치며 발길질까지하며, 통곡하며,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아주 난리 부르스를 치고 있었다. 정말 같은 여자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어휴… 저 자식도 나쁜 자식이지만. 저 여자도 상당히 무섭다, 야…”

“왜 저럴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까지?”

“뻔하지. 저 녀석은 생긴것만 봐도 뺀질거리는게, 아주 인상이 딱이야. 내가 살면서 바람둥이라는 놈들 몇놈 봤지만,  딱 그 스타일이라구 – 그래서 저 놈이 너한테 접근하는거 보고 내가 더 속상했다는거 아니냐… 에이. 나쁜 자식.”

바람둥이라고… 뺀질거린다고…?
나는 지금도 내 꿈속의 최우진때문에 실제의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수 없는걸까?
왜 나에겐 그가 속깊고 진실한 사람으로 느껴지는지.

“지 입으로도 그랬잖아. 자긴 미친 바람둥이라고. 참…뻔뻔하기까지 해”
나와 승민이는 차를 향해 걸으면서도
씨름하고 있는 최우진과 그 여자에게서 시선을 뗄수 없었다.
그 만큼 그녀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니.

“잠깐! 거기!”
난리치던 그녀가 우리쪽으로 고함을 질렀다.

“거기 서봐요. 두사람.”

승민은 나? 하며 자신을 가리키며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최우진은 두눈을 감으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그녀가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쫘악!

이게.
무슨 일이지.
별이 반짝. 얼굴에 불이 났다.

“미쳤어요?”
승민이 그녀를 말리려는데,
갑자기 그녀는 나의 머리를 두손으로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고 애쓰는데,

“지선아!”
최우진이 그녀를 말리려고 뛰어들었고,
그 순간
갑자기 승민이 최우진에게 주먹을 한방 날렸다.

“이게 누굴 건드려?”
그녀가 이번에는 승민의 정강이를 구두로 세게 찼으며,
승민이 쓰러지면서 옆에서 그녀를 말리는 최우진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그만! 그만!!”
소리 지르며 어쩔줄 몰라하는 나에게 또 다시 그녀가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최우진이 그녀를 뜯어 내는데,

“뭐야! 이 여자 끌어내지 못해?”
하며 승민이 다시 최우진에게 주먹을 날렸다.

삐요삐요…
어머나…
급기야는 경찰차가 동원되고

잠시후
우리는
동네 깡패아이들처럼

4명이 나란히 경찰서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계신 한유니씨만 일방적으로 피해자이시고
나머지는…”

“우리 오빠도. 그냥 말리기만 했는데요…”

“최우진씨. 사실입니까.”

“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른분들은 그냥 보내주시죠.”

“바람둥이 주제에 잘난척은.” 승민이 아니꼬와서 최우진을 노려보았고.

“우리 오빠 바람둥이 아니거든!”
지선이라는 그여자가 톡 쐈다.

“뭐. 크게 다친분도 없고 하니, 다들 나가요, 그럼.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린애들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창피한줄 아세요.
다음에 또 소란피우면 그냥 안넘어 갑니다.”

우리 넷은 민망함에 어쩔줄을 모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입술이 터지고 머리카락이 빠진곳이 너무 아프고 화가났다.

“어? 우리 유니 봐라. 야, 너 괜찮아?”

“어…괜찮아…”

“이봐요. 대체 우리 유니를 왜 때린겁니까? 미쳤어요?”

“우리 오빠를 홀렸잖아요.”

나머지 세사람이 동시에 지선이라는 그여자를 돌아 보았다.

“무슨…소리예요..?”
내가 제일 황당했는데.

“그렇지않고 우리 오빠가 나하고 헤어지자고 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선아. 나한테 얘기해. 화가 나면 나한테 풀어.”
하고는 최우진이 우리쪽으로 돌아서서,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하는데
그는 걷는 내내 옆구리를 잡고 있었고, 입가가 찢어져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어머. 많이 다쳤네요.”
나는 앞뒤 상황판단도 안하고 얼른 그의 입가에 내 손수건을 가져다 댔는데.

휘잉~~

서부 영화에 보면 가끔 보이는 그 휭 하는 회오리 바람과 휘파람 소리가 들리듯.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지선의 시선과
분노로 끓어오르는 승민의 표정이 느껴지면서
주위가 엄청 고요해졌다.

“아. 제가… 간호사 지망생이었거든요. 다친사람. 그냥 못 지나치는 이 못난 버릇…”
허허…어색하게 웃는데,
이 망할놈의 횡설수설…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죠?”
지선이 팔짱을 끼고 무척 기분나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본다.
싫다고 하면 또 죽을 힘 다해 나에게 달라 붙을것만 같아서,

“네…그러죠.”
해버렸다.

마침 중국집이 바로 옆에 있어
어색하게 짜장면을 네개 시켜놓고 마주 앉았다.

“제 이름은 황지선이라고 해요.”

최우진은 고개를 딴곳으로 돌리고 앉았고.

승민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녀를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

“우진오빠는… 저하고 5년 전에 만났죠.”

“그래서요?”
승민이 기분나쁜듯 대꾸하는데,

“제 남편은. 우진오빠 사촌 형이예요.
우진오빠의 아내는 저의 둘도없는 친구였구요.”

유부녀야? 그리고 유부남이었어?

“근데 제 남편이 날 두고 먼저 갔어요.
그리고 같은 해에 거짓말처럼....
우진오빠의 아내가 떠났죠. 결혼하고 몇달만에 교통사고로..

우리의 관계는 운명이예요.
오빠는 내가 친하던 형의
전 아내였기 때문에 망설여 왔겠지만,
내가 늘 의지하는 사람이었고, 나 외에 다른 여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병원에서
처음 의식이 돌아온 순간에. 오빠가 한유니씨 이름을 불렀죠.
유니야… 라고.”

머리에 망치가 꽝.
놀란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지나치게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순간 묵묵히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최우진.
시도때도 없이 감동받은 나의 눈가에 주책없이 �셜榻� 눈물.

승민은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보았다.

“뭐야. 둘이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비행기 안에서?”

이제는 최우진도.
나도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가 의식을 잃었던 내내 함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더 이상 부인할 필요를 느낄수 없었다.
꿈이었던 환상이었던간에
우리는 함께였으니까.

“그러니까! 바로 거기 저 여시같이 순진한 척하는 한유니씨가. 우리 오빠를 꼬신게 아니고 뭐겠어요? 우리오빠는 나 외에 다른 여자는 만난적이 없다구요!”

“지선아.”
최우진이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우리 모두 확실히 하고 넘어가죠.
어떻게 된건지 말해봐요.
한유니씨하고 오빠.
저기 앉아있는 한유니씨 남자친구.
당신은 또 뭔지.”

“유니는! 나를 사랑해요. 우리는 결혼할뻔. 아니 결혼을 곧 할것이고.
유니는 이 사람을… 그렇지, 유니야? 잘…모르는 사람이라고 그랬지?”

승민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그때 최우진이 벌떡 일어섰다.

“이만 가자, 지선아. 할만큼 했어.”

“아니. 아직 안 끝났어. 한유니씨의 대답을 듣고싶어.”

세사람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선씨도
최우진도
승민도…

순간 나는 더이상 내마음을 속일수가 없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승민을 마주 보았다.

“승민아…
너…혹시 필리핀에…
올해 세살이 되는…아름이라는 아이…
모르니…
충남에서 식당 하면서 성실하게 돈모아 잘 살던 최성철이라는 분…
그 집에 예쁜 여동생이랑 결혼했다던 박태식이라는 사람…
너… 모르니?”

갑작스런 질문이어서 마음의 준비를 전혀 못했던걸까.
아름이라는…
그의 딸 이름에
오래전에 뭍어버린 양심이 잠시 되살아 흔들렸던 것일까.

승민의 눈동자와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너도…미쳤니? 저 여자한테…옮았어?
지금 너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야?”

“우리 엄마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고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있는 최성철이란 분 말이야…
그 분 여동생은 
새벽부터 어두운 밤까지 힘들게 노동일을 하면서
혼자 아름이를 키우신다는데…
넌… 전혀…모르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