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멍해질정도로 울었다.
최우진은 무슨일이냐고,
괜찮냐고,
그만 울으라는등의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서 가끔 물을 마시며 나를 기다렸을뿐.

한참이 지나 조금 진정이 되고나니
눈물에 가려 희미해지는 그의 모습이.
순간 겁이 났다.
또 저렇게 가물가물 해지며 물거품처럼 내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건 아닌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모습마저 꿈이라면?

“최우진씨.”

“네. 한유니씨.”

그의 눈동자에 빨려들어 갈것같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의 곧게 선 콧날과 입가…
섬세한 눈썹…

그는 내가 하는데로 가만히 내버려두더니
이내 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왜요. 내가 헛것으로 보여요?” 하며 잡은 내 손을 더 꽉 쥐어주었고.

“나. 지금 또 꿈 꾸고 있는거 아니죠?”

최우진이 피식 웃는다.

"그런데 정말...병원에서 깨어났을때...내 이름을...불렀어요?"

"그랬나봐요."

"왜요?"

"글쎄요?  아침인사 하려고 그랬나?"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그랬지. 그날 밤 자기전에 그렇게 말했으니까.
잘자라 유니야.
내일 아침에 보자...

"그렇게 웃는거 보니까... 내가 꿈꾸는거 아닌가 싶네.."
하더니 정신 차리려는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정말 나와 같은 꿈을 꾼거예요? 비행기 사고 나서...섬에서 우리 살던거..."

"나도 믿을수가 없어서...현실이 더 꿈같아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어요."

"저도... 그랬어요."

"정말 내가 미쳤는줄 알았죠. 한유니씨가 나를 알아볼것이라고... 상상도 할수 없었고."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왜 그런 꿈을 꾼걸까요?"

"이렇게...다시 만나라고...그랬겠죠."

"왜...나한테 반말 안해요? 섬에서 우리 그렇게 편하게 지냈잖아요."

"그건 꿈이었고. 이건 현실이니까... 사실  우리는 서로를 아직 잘 모르잖아요."

"그렇네요...

지금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최우진씨도…
내가 꿈에서 만난 그 사람은 아니죠...
우리는 외딴섬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는,
그저 다음 끼니를 염려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가족이 있고
사회가 있고…
연인…도 있는”

“그럼 우리 외딴섬으로…갈까요?”

“지금 장난이 치고싶으세요?”

“장난 아닌데…”

“완전 망가진거…알아요?”

“아. 제 이미지요?  오늘 많이 구겨졌나요?”

“얼굴이요. 피나고…멍들고…”

그가 입술을 다물고 잠시 나를 공부하듯 바라본다.

“한유니씨에 비하면 멀쩡하죠.”

“제꼴이…그렇게 우스워요?”

“마음이…다쳤잖아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왠지 엄청난 위로의 힘을 얻게한다.


“손님, 식당문 닫을 시간입니다.”
야속한 주인아주머니.
잠시 더 이러고 있고 싶은데…


“일어날 힘은 있나요…?”
최우진이 나를 부축하려고 다가온다.

“됐어요.” 나의 못난 자존심. 그가 잡아주기 전에 먼저 일어나려다가,
엄청난 어지러움에 잠시 중심을 잃었다.

그의 듬직한 두 손이 나의 두 팔을 잡고있다.
그는 내가 차에 앉을때까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3년을….
3년이란 세월을…속았다는거…
제가 바보인거죠?
나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던 승민이가…
조강지처와 자식을 버리고 온…유부남이라는데,
그런 승민이를 믿었던 저는… 멍청한거죠?
나하고 결혼하려고…”

다 울었는줄 알았는데 또 다시 흐르는 눈물.
참 이상하다. 눈물샘은 대체 어디서 이리 솟는건지.

“나쁜녀석이네요…”


“최우진씨도…나쁜놈이잖아요.”

그가 말없이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거짓말 하고… 지선씨도 있으면서 나한테 접근하고..”

“거짓말은…한적 없는데.”

“사실을 다 말해주지 않은것도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예요.
선이씨…그리고 지선씨얘기.
그 섬에서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 한번도 얘기 안했잖아요.”

“여자친구가 있다고는 얘기했죠. 그리고 거기서는…우리 주로 먹을거 얘기하느라 바빠서..”

“핑계대지 말아요.”

“그때는... 이 세상에 한유니밖에 없었으니까."

“바람둥이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네요. 딴 여자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을거 같아요.
그래서. 깨어나 보니 저 말고도 여자가 너무 많으셨나요?”

최우진이 마침 신호등에서 차를 세우고, 나를 돌아본다.
작게 한숨짓고,

“나를 못믿겠어요?”

“아무도.”
또 다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무도 못믿겠어요.
최우진씨도. 세상도. 다 믿기 싫어요.”

최우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다시 차를 몰고 출발한다.

“많이 힘들구나..”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마음속 한구석을 깊이 찌른다.

그 후로 운전하는 내내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집앞에 도착하고.
그가 나를 돌아보는데,

“…화 났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슬쩍 물어보니,

최우진이 피식 웃는다.
일어서더니,
내 쪽에 차문을 열고,

“그 정도로 화 안나니까 걱정말고 화풀이 해요.”
한다.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그와 너무나 가까와진 거리가. 숨이 막힐듯하여
순간 가슴이 마구 뛰었는데,

최우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나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아준다.

“내일…만나면 또 모른척 해야하는거 아니예요?”

최우진이 눈을 조금 찡그리며 나를 보는데,

“아까 그랬잖아요. 지선씨가 오늘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걸로 알고 간다고.”

“지선이는… 친동생같은 아이라서… 투정 부리는거예요.”

“최우진씨가 친동생같다고 그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잖아요.”

“그애가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도 그래야 하는것도 아니죠.”

“지금까지 최우진씨가 받아줘서 그런거 아니예요?”

“비슷한 처지에서 나 같이 마음아픈..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준거예요. 늘 그렇게 얘기해왔고.”

“그럼 평생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돌봐줄건가요? 그렇게 책임없는 말이 어디있어요?”

“너를 만나기 전에는."

잠시 그가 헛 기침을 하더니,

"한유니씨를 만나기 전에는...
선이가 그렇게 가고나서…내가 다시 누군가를…”
그가 말을 잊지 못하다…

"선이가 죽고나서… 폐인으로 살았어요.
디자인일도 안하고…그냥 카페에서

먹고 살만큼만… 하고 살았죠.
그 3년동안 폐인같은 나를 좋다고
운명이라고 믿고 따르는 지선이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한유니씨를 다시 찾는데 시간이 걸렸고…
찾은 다음에도…아무말도 할수 없었어요.”

“그런데 왜 이제와서 지선씨와 헤어진다고 그 난리를 치는건데요?”

“유승민씨가 찾아와서 카페에서 청혼할거라고 하더군요.
한유니씨는 유승민씨와 결혼할거라고 생각했고...
깨끗히 포기하려고 마음 먹고나니… 지선이와도 헤어질 용기가,
이제와서 내 자신에게 솔직해질 용기가…생긴거죠.”

바로 그때.
갑자기 담벼락에서 그림자가 확 덮치는듯 하더니,
“솔직하지 못한거. 너도 마찬가지네.”

하아!
하며 최우진이 옆구리를 잡고 허리를 구부렸다.
뭔가에 찔린듯…

“최우진씨!”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로 달려드는데,

갑자기 최우진의 목을 조이는 날카로운 칼날이 보이며,
어두운 등불에 희미한 승민의 얼굴이 비취며 소름이 돋았다.
그가 최우진을 어두운 골목으로 끌어당겼다.

“승민아! 너 미쳤어? 제발!”
울부짖으니,
쉿….하는 손모양을 하며 승민이 최우진을 끌고 간다.

“조용히 해.”

“승민아! 너....!”
두려움과 놀라움에 나는 온통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번쩍였고,

최우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는데,
옆구리에서 고인 피가 흘러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겠니, 승민아!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 놔 줄래?”

“나를… 믿어 줘.”

거친 숨을 몰아쉬며 최우진의 목을 더 조이는 승민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