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는데.
흐릿하게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윤세준인가?
“선배님…?”
“괜찮아? 야. 정신이 들어?”
민우석이다.
이마를 짚어보니 그가 젖은 수건을 얹어놓았다.
“선배님이 여길 어떻게…”
“윤세준이…알려줘서 왔어.”
“…네?”
“다른 생각 말고. 우선 푹 쉬어. 탈수증도 있고. 놀라고 지쳐서 많이 허약해 졌데.”
“선배님은. 연습하셔야죠. 공연 해야 되잖아요.”
“괜찮아. 원래 공연 전날은 쉬잖아.”
공연 전날이라고?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대체 언제인지. 몇시인지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몇마디를 나누고. 나는 다시 지쳐서 눈을 감았는데…
꿈인가…
왜 민우석의 국수집 고소한 냄새가 나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의 하숙방이 아니었고 민우석의 식당에 딸린 방이었다.
일어나 앉으니
옆에 내 짐을 챙겨놓은 가방이 보였다.
대강 옷을 갈아입고 식당 쪽으로 들어갔다.
“아이구. 일어났구만.”
아주머니가 나에게 서둘러 달려오신다.
“아…안녕하세요…제가 어떻게 여기로…”
“학생집은 하도 조사를 한다고 난리를 쳐서 우석이가 이리로 데려왔지. 그것도 기억이 안나?”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큰일 날뻔 했구먼…”
아주머니는 내가 씻을수있도록 욕실을 준비해주시고,
대강 씻고 나오자, 커다란 대접에 국수와 만두를 말아 주셨다.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서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아마도 너무 울어서? 싸늘한 유치장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거의 사흘을 꼬박 보냈기 때문인것 같았다. 잘 모르는 나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시는 아주머니가. 고마와서 또 눈물이 맺혔다.
“에그…잘 먹지도 못하는구나…얼마나 놀라고 고생을 했으면…”
“선배님은요?”
“오늘 공연이라고 나갔는데. 학생은 푹.. 쉬게 잘 봐달라고 했어.”
아…오늘이 그렇게 기다리던 공연날이구나…서글픈 생각보다.. 먼저 윤세준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혹시…윤세준 선배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아세요?”
아주머니는 크게 한숨을 몰아 쉬셨다.
그러시더니 내 앞으로 와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어쩌다 학생이 그분하고 잡혀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나오지 못했을게야..”
“네? 어떻게...?”
“학생을 빼내주려고… 그 분은…. 어제 집으로 들어가셨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주머니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우리…우석이가 뭐라 할텐데….에유. 내가 얘기 했다고 하지 말고…
사실 나는. 아주 큰 회사 회장님댁에 식모였다우. 그분은 그 회장님댁 외아들이고.
어릴때부터 그렇게 착했어. 사모님이 성격이 아주 유별난데…우리 우석이랑 우진이를 몹시 대하면.
항상 그분이 와서 같이 놀아주고. 달래주고…했지.
세준 도련님은 어릴때 친엄마를 잃어서.
애기때부터 길러준 나를 그렇게 따르고 의지했었어.
사모님은 지가 낳아온 딸년만 그렇게 이뻐했고. 세준도련님하고 우리 애들은 늘..괄시를 했는데…
근데…에구…. 우린 우진이 놈이…
그 회장님 댁에 따님이랑.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됐어.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근데 그걸 가지고 그집 사모님은 우리 우진이를 학교에서 퇴학시키고.
우리 가족을 땡전한푼없이 길거리로 쫓아냈지.
그때 밀쳐 넘어져서. 나는 허리가 다쳐 아직도 오래 서있지를 못하고…
우리 우석이는. 그때 덤비다가 하도 얻어 맞아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드랬지…”
아주머니는 그때의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지 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셨다.
“그전까지는 말도 크게 못하고 얌전한 아이였는데…
그때부터 우석이는 늘 분노에 가득 차있는것 같아.
우진이는 죽으려고 자살까지 시도했고…. 딱 죽어야 겠다. 싶었지.
우리 식구 셋이. 죽어야겠다…했는데. 세준 도련님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 식당을 채려주고. 우리 우진이를 외국으로 보내줬어.
한국에선 퇴학당해서 받아줄 학교가 없으니까. 외국에 유학을 보낸거지.
그 때는 그분도 겨우 대학생이었는데. 뭔 돈이 있었겠어.
알고보니 집에서 훔쳐서… 아예 가출을 했다더군.
그 분 덕에 살았어. 지금까지. 탈없이. 잘 살고있어. 가끔씩 꼭 들러서는.
인사도 하고 가고. 국수도 먹고 가고… 우리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지…”
민우석에게 윤세준이란 존재가 어떤것인가…
조금은 이해를 할수있었다.
고마와 하기엔 너무나 처참한 상처를 입힌 가족중의 한사람이었고.
잊고 살기에는 쓰리고 아픈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식모의 아들로 자란 민우석의 어린시절이 상상이 갔고.
너무 잘나고 착한일만 해서. 바르고 올바라서. 그를 증오할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민우석의 말이 기억이 났다.
그치만 그렇게까지 도와주고 위해준 사람을. 왜 그렇게까지 미워하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윤세준 선배님이 집에 다시 들어가셨단 말씀은…”
“그때 가출하고 쭉 혼자 살았다고 들었는데. 어제 경찰서에서 집으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야.”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는 연락을 할수없다고 울부짖을때.
그의 조용했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유치장에서 붕어빵을 부탁해 먹던 그의 여유가.. 그의 침착함이…
견디기 힘드냐고 묻던.
오히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던 그는.
사흘동안 철창안에 갇혀있으면서 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생얘기를 한것이었나.
집에서 매일 보시겠다던 나의 소리에 침묵했었다.
나를 보면 동생이 생각난다고... 그래서 내가 더 측은하게 느껴졌던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몇년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집에 연락을 한다는것은. 그에게도 너무 힘든일 이었을텐데.
결국은 나때문에. 그는 그런 결정을 하게 된것인가…
밤늦게 되서야 민우석이 집에 돌아왔다.
나는 아주머니를 도와 부엌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안심하는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냐.”
“선배님 덕분에요… 정말 감사했어요.”
“며칠 더 쉬어. 방은 딴데 알아보고 있으니까.”
“네?”
“이삿짐은 다 챙겨왔어. 걱정말고.”
“이렇게까지… 신세를 져서 어떻게 해요? 선배님도 그렇고…윤세준선배님도…”
“따라해봐. 팥삶구. 사고처리.”
“예?”
“팥삶구.사고처리.”
“그게 뭐예요?”
“너가 말해봐.”
“팥삶구…사고처리…왜 그러세요?”
“팔삼구. 사구칠이. 내 전화번호다.”
푸하..하고 웃음이 나왔다. 왠 뚱딴지같이…
“다음부터. 무슨일이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라구. 괜히 여러사람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아…그게요… 그러려구 그런건 아닌데…”
“알아. 얘기 들었어. 어쨌든 잘 외워 둬.”
“윤세준 선배님은… 어떻게 되신거예요?”
“집에 갔지 뭐.”
민우석의 말은 너무 간단했다.
그의 어머님의 설명이 아니었으면 나는 그냥 그런가부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를…어떻게 빼내신거예요. 전 영영 감옥살이라도 해야되는줄 알았어요.”
“너까짓거 빼내는게. 일인줄 알어? 사람 죽이고 살리고 다 하는 사람들인데.”
“누가요?”
일부러 모르는척을 했다. 아줌마가 얘기하지 말라고도 하셨고…
“누구긴. 그 가족들이지. 윤세준은. 널 빼주고. 지 발로 감옥으로 들어간거야…”
“감옥이라뇨?”
“감옥이지. 하고싶은 일도 못하고. 보고싶은 사람도 못보고. 로보트처럼. 시키는데로 하고. 가라는데로 가고 그렇게 살아야하니까. 그런게 감옥아니야?”
“왜 그러셨을까요.”
민우석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글쎄.”
“제가. 선배님 친구라서 절 믿는다고 하셨어요. 선배님이 식당에 친구데려온거. 처음 보셨다고. 안 도와주면 선배님한테 혼날거 같아서 그러신다고… 저에게 그러셨어요.”
민우석이 말없이 한숨을 쉰다. 먼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쓸쓸하고 아파보였다.
“윤세준선배님은… 선배님 좋아하시는것 같아요… 그리고 그분은… 잘못이 없잖아요.
그렇게 오랫동안 선배님 가족을 도와준 사람을…왜 미워하세요.”
민우석이 순간 차가운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얘기…들었어?”
“조금이요…”
“그래. 왜 미워하냐고…내가 언제 미워한댔어. 싫어한댔지.”
“그게 그거쟎아요.”
“아니. 틀린거야. 싫어하는건. 생각은 다른데. 마음만 따로 가는거고. 미워하는건 마음이랑 생각이랑 같이 가는거고.”
“어렵네요..”
“생각으론 그 자식이 고맙지. 그 자식이 아니면 어머니와 우진이와 나. 지금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마음으로는… 그 자식을 보면 그 식구가 생각나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그 일이 생각나고.
아주 어릴때. 어머니는 늘 윤세준이 하고싶다는 일. 먹고싶다는 것. 가고싶다는 곳.
모두 윤세준말이라면 꼼짝도 못하셨어. 그 녀석이 하도 어머니를 따르니까.
난 늘 내 어머니를 독차지하는 그 아이를 구경해야 했지.
다른사람들은 모를거야. 모든것을 가진 아이와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함께 자라난다는게.
얼마나 잔인한건지…”
민우석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어린나이에. 아주 어렸을때부터 그는 참 아프게 자랐구나…
“아직도 그러시잖아. 어머니는. 윤세준을 하늘같이 바라보고. 어쩌면 나보다 더 믿으시는것 같아.
하긴. 내가 어머니라도 그렇겠어. 그 자식은 항상 착하고. 늘 올바르고.
이젠 너한테까지 생명의 은인이 돼버렸잖아.”
생명의 은인…
윤세준이 나의 생명의 은인…?
“그분이 아니었으면. 전 아직도 유치장에 있었겠지요…?”
“그래. 아마 그 사깃꾼이 잡혀올때까지 갇혀있었을지도....”
“그분은…괜찮으실까요…?”
민우석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그런게 아닌데…
“왜. 안 괜찮으면. 니가 가서 구출 작전이라도 해볼래?”
“아니요…그게 아니구.”
“참나…이것 봐라. 나는 또 나쁜놈이 됬잖아. 그 놈은 온통 착한 역활만 하고. 나는 닭쫓던 개역활이나 하고..”
“그래도 선배님은 어머님 아들이잖아요.”
민우석이 나를 돌아본다. 그의 눈빛이 아직 쓸쓸한데,
“윤세준선배님이 아무리 잘났어도. 어머님의 아들은. 선배님이잖아요.
그리고…저에게 그분이 생명의 은인이시라도… 저는. 지금 선배님 곁에 있잖아요.”
민우석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리고. 저는. 선배님을 좋아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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