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은 인정사정없이 뛰기시작했고,
민우석의 표정은 벼락을 맞은사람같이 울그락 풀그락 하다가 굳어졌다.
내가…무슨소리를 한거야…실수였나…너무 서둘렀나…?
갑자기 민우석이 벌떡 일어나서 내 손목을 가로챘다.
화났나봐… 그 못된 성질 터뜨리려고…?
내가 앞으로 자빠질정도로 민우석은 빠르게 식당문을 제치고 밖으로 뛰쳐나오듯 나를 끌고 나갔다.

“아…선배님…” 손목이 땅겨 짜증나는 목소리로 엄살을 부리려는데,

그는 내 몸을 와락 붙잡아 껴안았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나는 커다래진 눈을 멀뚱멀뚱 감았다 떳다…하고 있는데,

“니가 내 눈앞에서 들락날락거릴땐. 그냥 귀엽고. 똘똘하다고 생각했어.
근데…니가 없어진 지난 며칠 동안…밥도 맛이없고. 잠을 자도 피곤하고.
하물며 연극부도…가기 싫더라.”

그는 나를 풀어주더니, 내 얼굴을 두손으로 감쌌다.

“이건. 대체 무슨 현상인거냐?”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웃어? 너 나 비웃냐? 지금?”

“큭…아..아니요…”

“다신 안까분다고. 절대로 안웃는다고 약속 했어. 안했어?”
“아…그거요…그건…”
“빨리 지우지 못해?”

“지금 연기하는거 아니잖아요.”
“어서 지우라니까.”

애써 웃음을 집어삼키자 마자...
민우석은 재빠르게 훔치듯 키스를 했다.

내가 놀라 입을 가리자.
그가 풋..하고 웃었다.

“지난 며칠동안. 나 잠도 못자게 하고 밥도 못먹게 한 벌이야.”
“선배님!”
너무나 당황한 내가 화난듯 그를 째려보자,

“다신. 그렇게 사라져서 연락안하기만 해. 그땐 아주 마누라를 삼아버릴테니까.”
“그걸… 겁이라고 주는거예요 지금?”
“겁 안나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우석도 부끄러웠는지. 씩…웃기 시작했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는모습이 어린애 같았다.
밤낮으로 소리질러대고 성질부리고 부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늘 무섭기만 하던 연극부 선배 민우석이.
이제는 짓굿은 어린아이로 보였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 또 병 나겠다.”
“저 멀쩡해요.”
“그렇게 며칠을 갖혀있었는데 멀쩡하긴… 나라도 지쳐서 쓰러졌겠더라.”

“윤세준선배님은…집에 돌아가셔서…괜찮으실까요..?”
“자꾸 그 자식 얘기 할래?”
“저를 도와주신 분이잖아요. 선배님 때문이라고… 그래도…그분을 미워하세요?”
“미운게 아니라고 했지.”
“그분은. 선배님 많이 아끼시는것 같던데…”

“내가. 너 행방도 모르고 찾아 헤매는 동안. 그 자식은 너랑 쭉 같이 있었다는게. 기분 나빠. 신경쓰여.”
“말도 안돼요.. 그분은 이유도 없이 저 때문에 고생만 하셨는데요...”
“그렇게 니가 맘 써주는게. 기분 나쁘다고.”

“그러지 마세요…제가 이러는건..."
“그러니까 더 기분 나빠.”

하여튼 민우석은 자기 멋대로다.
그래도 윤세준 생각을 하면 민우석도 맘이 좋지 않은지, 가게를 닫으려고 정리하시는 어머니 곁으로 가더니 말없이 아주머니를 도우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쉬고. 놀고. 먹고… 잘있는데.
그 사람은… 윤세준은 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오랫만에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그 부모들은 반가와 했을까… 그랬을거라  믿고싶었다.
그가 반갑고. 그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금방 유치장에서 빼내어 준것이라 믿고싶었다.

다음날 오후...
무의식중.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꾸기작.

쪽지가 손에 잡혔다.
그때 그 웬수같은 쪽지가. 아직 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이 번호로 걸면…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이나마 전할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수 있을까…


조금 동 떨어진곳에 공중전화기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해볼까… 전화…?

용기내어 수화기를 들었다.
그가 받지 않을거라 예상은 했지만…
따르릉…

[여보세요]

낯선 여자 목소리였는데…

“아…아..예.. 거기. 윤..세준 선배님…계시나요”

[누구세요.]

“대학…후배입니다. 혹시. 선배님 거기 계셔요?”

[오빠 여기 없어요.  짐 챙기려고 제가 잠시 와 있는데. 후배. 누구시죠?]

“아…동생분이시군요… 저는……”

[전할 메세지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그냥. 감사하다고…죄송하다고…” 좀 더 새로운 표현은 할수 없었을까…

[그분이시군요.]

“네?”

[유치장에 같이 계셨던. 그 여자분 아니예요? 한예지씨라고.]

악. 입술을 깨물었다. 이 분이 다 알고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면목없고 염치가 없어서. 다음 아무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아시나요…”

[제가 경찰서에 갔었어요.]

“네…저…감..사합니다. 어떻게 제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왜 전화 하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차가왔다.

“그냥…궁금했어요. 괜찮으신지…건강하신지…”

[오빠한테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뚝.
띠…띠…띠…
가슴에 누가 펑하고 커다란  주먹을 날린것 같이.
먹먹한 아픔이 숨을 조였다.

전화가 끊어지고.  한동안 나는 전화기 앞에 걸터앉아. 말없이 쪽지를 바라보았다.
윤세준은… 이제 영영 볼수 없는가.
서운한 마음이었는지. 호기심이 너무 깊어져서인지.
그에게 고마운마음과. 미안한 마음. 걱정스러움. 이 모든 감정이 함께 밀려와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이런걸까. 민우석의 마음이.
윤세준에게 고마왔지만. 미안했지만 그는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가까이 있는것 같았지만 늘 멀리에 있는 그에게 내 마음대로 고마와 할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고.
속이 답답하고 까마득해서.  그래서 민우석은 그를 싫다고 표현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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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나고 아침 일찍, 민우석이 끓여준 국밥을 먹고. 우리는 외출을 했다.

“맛있었지?”
“엄청…맛있었어요…”
“영광인줄 알아.”
“알아요.”
“알긴 뭘알아?”
“밥해준사람은. 제가… 처음이죠?”
“어쭈?”

웃음이 나왔다.
그도 웃더니. 내 손을 슬그머니 자기손안에 꽉 잡아 쥐었다.

“어디…가는거예요?”
“니가 살 집.”

“네?”
"그동안 불편했지? 방도 좁고..."
"아니요...그냥 죄송했지요..."

“그런 사깃꾼을 못알아보고 멍청하게 하숙이나 하고. 이젠 내가 골라주는 집에서 살아.”
“거기가…어딘데요.”

“내가 아는 선배님 어머님이 하숙집을 하셔. 내가 빠사하게 잘 아는분이니까 안전할거야.”

이렇게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것은. 나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늘 바쁘게 장사일을 도우며 살았고.
학교다니던 시절 내내 사실 친한친구를 사귀고. 놀러 다닐 시간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민우석이 급속도로 좋아지는건.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지만 늘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게 솔직하고. 또 어딘가 듬직하고 기대고싶은. 친근한 오빠같은 느낌이 들어서였을지 모르겠다.

들어선 집은 작고 아담했다.
같이 지낼 학생들도 대부분이 여학생들이었고,
아주머니가 말씀은 많이 없으셨지만 친절하셨다.

“그런데…저기요…”
“왜?”
“아주머니…저…빨래나. 청소. 도움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글쎄…”

저번에 살던 집은 내가 빨래와 청소를 주말마다 도맡아 하면서 하숙비를 줄여 낼수 있었다.
아버지가 고생해서 보내주시는 돈을 나 혼자 편하게 다 까먹고 있을수가 없어서 그렇게 했었다.

“왜 그래, 너?” 민우석이 이상한듯 나를 보았고…
“저…제가 주말마다 빨래하고 청소를 해드리면. 안될까요? 대신에 하숙비를 조금…”
아주머니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앞으로 들어올 학생들이 두세명 더 있으니.”
“감사합니다!”

신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야. 너 공부하고. 연극부 다니고. 어떻게 주말마다 일을 하려고 그래? 몸도 비실비실하고 약한게…”
“늘 하던 일이예요. 그리고 저 약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아주 딴딴하다구요.”

민우석이 내 눈길을 피해 먼길을 쳐다본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그를 속상하게 했나…싶었다.
그냥 나중에 얘기할걸 그랬나...난 그냥 마음이 급해서...

식당에 돌아왔는데,

“우석아!”
아주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왜요 어머니. 무슨 일 있어요?”

“우진이가…”
“네? 우진이가 왜요.”
“많이…아프단다… 학교에서…룸메이트라나 뭔가가 전화를 해왔는데…아무래도….”
“어디가요? 어디가 아프데요?”
“글쎄다. 내가 뭔소린지를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우진이는 말도 잘 못하고…”

아주머니는 눈물을 훔치신다.
“어쩌면 좋아요…”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렸지만. 불안하신지 손이 떨리고 계셨다.

“걱정마세요 엄마. 제가 가볼께요. 가보고 연락 드릴께요.”
“그래야 할까? 너 학교는 어쩌구…”
“엄마 허리때문에. 비행기 못타요.  제가 다녀올께요. 가자마자 전화할꺼니까. 걱정말고.”

서둘러 비행기표를 구하고,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민우석은 사라졌다.
그리고 곧 연락이 왔는데.
이유를 알수없는 열병이라고 했다.
의사들의 말로는 몇달간. 치료와 간호가 필요하다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건 무리라고 했다.
민우석은. 학교에 휴학기를 내고 동생을 간호하기위해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없는 학교생활. 연극부는.
내가 그 전에 늘 살아왔던것처럼. 바쁘고. 쓸쓸하고. 고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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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동안 내가 해야할일은 오직 하나.
각종 아르바이트를 잡아서 돈을 버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어서.
나는 아침에 커피집. 점심때 갈비집. 저녁때는 과외를 해가며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유난히 찌는 더운 여름날이었고,
이렇게 더운날은 갈비집에서 일하는것이 힘들었다.
뜨거운 숯통을 들어 나르는것이 보통 땀나고 괴로운일이 아니었는데,

“야! 빨리 좀 가져 와. 거 되게 느리네!”
가끔씩은 정말 매너없고 불친절한 손님들이 오셨다.
종업원들은 감정도. 생각도 없는 사람들인양 반말하고. 명령하고. 심지어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 좀 더 잘게 짤라봐. 이거 먹다가 숨 넘어가면 니가 책임질거야?”
땀을 뻘뻘흘리며 고기를 잘라 드리는데,
유난히 목소리가 큰 아저씨 한분이 대낮부터 한잔 하셨는지 시뻘건 얼굴로 잔소리가 많으셨다.

시키는데로 잘게. 더 잘게 자르고있는데,

“예지야! 여기 주문 좀 받아라!”
주인 아저씨가 부르시고,
급하게 일을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목소리 큰 아저씨가 내 손목을 붙잡으셨다.

“야. 여기 한잔 따르고 가라.”

“네?”

“우리 오래 참고 기다렸는데, 여기 한잔만 따라줘. 예쁜아가씨가 따라주면 더 맛있을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직접 따라드세요.”
“뭐야? 야. 한잔 따르는게 힘드냐? 괜히 소란피우지 말고. 그냥 조용히 한잔만 따라주고 가. 응? 부탁이다.”

그에게서 지독한 술냄새가 풍겨왔다.
말없이 손목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아저씨가 다시 내 손목을 붙잡는다.

“이거 놓으세요.”
“여기 식당 서비스가 왜 이래?”
“여기 술집 아니거든요!”
“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때리던지. 소리치던지. 그냥 한대맞고 끝내고 말지.

그런데 잠시 조용하길래, 눈을 떠보니 목소리 큰 아저씨의 손이 공중에서 헛돌고 있다.

“이 새끼가! 야! 이거 못 놔?”

그의 손목을 굳게 잡아 붙들은 사람은…

“저쪽 손 먼저 놓으시죠.”

너무나 친근한 목소리였다. 참으로 오랫만이었지만. 반갑고 친숙한 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