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시뻘건 아저씨는 이제 아예 폭파할것 같은 표정으로.
내 손목을 우선 팽개치고
그에게 잡혔던 손이 풀리자 마자, 주먹을 휘둘렀다.

휘둘러댄 주먹 역시 허무하게 그의 굳은 손에 잡혔는데.

“많이 취하신것 같은데. 여긴 술집이 아닙니다.”
“뭐야? 넌 뭔데 그래? 어디서 감히 어른한테?”

마침 주인아저씨가 뛰어 나오셨다.

“아이구. 손님. 왜 그러십니까. 술이요? 제가 따라드리죠. 자. 여기요.”
목소리 큰 아저씨는 술잔을 상위에서 밀어 떨어뜨리더니,
“뭐야? 니들이 뭔데 그래? 야. 예쁜 아가씨한테 술한잔 못 얻어먹냐?”
“예지야. 저기 가서 주문 받아라.”

주인아저씨가 나를 밀어내시고,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선배님…”
“붕어빵. 잘있었어?”
“여긴 어떻게?”
“누굴 좀 만나러 나왔는데… 여기서 일하는구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니. 잠시 꿈을 꾸는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어떻게 지내는지도. 어찌 연락을 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할지도 몰라서. 늘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다시는…못 뵈는줄 알았어요.”
“그 사깃꾼은 잡혔다던데. 들었어?”
“네… 그 때 선배님이 아니었으면.. 전 지금까지 갇혀있었을지도…”

“예지야! 주문받어!”  주인아저씨가 소리치셨고,

“저기요. 여기 앉아계셔요. 친구분. 아직 안오신거죠? 제가 음료수 가져다 드릴께요.
저 오늘 일 거의 끝났어요. 제가 저녁 사드려도 돼요?” 급하게 중얼거리는데,

“예지야!”
또 부르시고, 급히 뛰어가서 서둘러 주문을 받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물을 마시는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별로 달라진건 없어보이는데...

그에게 먹음직스런 갈비한판하고, 음료수를 대접하려 들고 가는데,
예쁘장한 아가씨가 윤세준 앞에 앉아있었다. 애인인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니,

“아직. 안 시켰는데요?”
여자분의 낭랑한 목소리가 왠지모르게 생소하지 않았다.
뭐라 말을 하려는데,

“고마와. 일 끝났으면 너도 앉지?”
윤세준이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저… 옷 갈아입고 올께요.”

“누구야?” 다소곳한 그녀가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빛에 조금은.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창피함인지.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았는데,
윤세준이 얼른 끼어들었다.

“야…맛있겠다. 붕어빵 너 빨리 안나오면. 내가 다 먹는다.”

윤세준의 친근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옷을 갈아입는데. 나도 모르게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흐트러진 머리. 땀으로 범벅이 되고 화장기없는 창백한 내 얼굴과
몇년을 계속 빨아입어서 색깔이 바래진 나의 핑그빛 티셔츠가.
그날따라 왜 신경이 쓰였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보내주신 하얀 블라우스라도 입었더라면…

아마도 윤세준의 건너편에 앉은 그녀가 반짝이는 썬글라스를 머리위에 끼고 있었고, 세련되고 시원한 무늬의 고급스런 블라우스를 입고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에이. 내가 언제부터 이런걸 신경썼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바보야. 넌 원래 촌스럽고 가진거 없는 애야. 건강하고.
멀쩡히 학교 다닐수 있는것만으로. 감사해야지… 나랑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걸…

윤세준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가보니, 그들은 아직 먹지않은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아직 안드셨어요?”
“오빠가 기다리라 그래서요. 동생이 배 고프다는데. 죽어도 기다리라는데요?”
그녀는 좀 짜증이 났는지, 나를 올려다 보며 무표정으로 나를 흩어보았다.
여동생인가… 그래서 목소리가 귀에 익었나…

“여기 앉아. 어서 먹자.”

윤세준은 자신의 옆자리로 의자를 빼 주었다.
그의 옆에 앉는데, 여동생의 눈빛이 조금 써늘하게 느껴졌다.
나를… 알아보았을까. 유치장때 그 일 이후 전화통화도. 그녀는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데 그래?” 그녀가  다시 물었고,
“인사해. 내 동생 세정이야. 예지랑은. 동갑이지 아마?” 윤세준은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예지? 한예지?”

“안녕하세요…”
“자. 배 고프다며. 빨리 먹어.”
윤세준이 고기 한점을 세정의 밥그릇에 놓아준다.

“그때 유치장에 있던 한예지씨란 말이야? 맞지? 오빠랑. 만나는 사이야?”
“아니. 오늘 우연히 만났어.”

“얘 수준에 맞추려고 일부러 이렇게 허접한 식당에서 만나자는건 아니었구?”
“세정아!”
처음 들은것 같다. 그의 화난 목소리는.
나는…괜찮은데…

“아..하하하… 그러게요…더 좋은걸 대접 해드려야 하는데..제가 드릴수 있는 수준은…겨우 이정도라서.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이 식당에선 최고 메뉴거든요. 다른거. 시켜드릴까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리저리 둘러대자,
잠시 세정과 윤세준은 할말을 잃은듯. 조용했다.

“그때. 내가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당부했죠? 설마 그 부탁 무시한건 아닌가요?”
“세정아!”
“당신은 운이좋아서 유치장에서 나왔다 치고. 우리 오빠는 당신때문에 어떻게 됬는지 알아요?”
“그만해 세정아.”

“저기. 음료수 더 가져 올께요. 제가 목이 말라서.”
아직도 멍하니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속에서는 바보같이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얼른 일어나려는데,
윤세준이 말없이 나의 손을 붙잡았다.

“내꺼 마셔. 나 아직 안 마셨어.”
세정이 나와 그의 손 잡은 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얼른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아 그의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세정의 눈빛이 더 차갑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남자처럼 음료수를 꿀꺽대며 마셔버린 내 모습이 추해 보였는지, 그녀의 표정은 더 냉랭해졌다.

“오빤. 언제 집에 들어올거야?”
“미안해 세정아. 힘든거 알지만 조금만 더… 너가 도와줘.”
“언제까지?”
“영화 곧 마치니까. 그때까지만.”
“벌써 삼개월이야. 아버지는 진작부터 눈치채셨고. 엄마는 아직 모르시지만. 엄마가 아시면.
아…한예지씨 앞에서 이런 얘기 해도 되나? 또 이상하게 엮이는거 아니야?.."

“제가. 이만 가볼께요. 괜히 저 때문에…”
그렇지. 내가 멍청하게 함께 있을 자리가 아니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윤세준이 먼저 일어섰다.
“아니야.  세정이랑 얘기 끝났어.  세정아. 밥먹고 가라. 다시 연락할께.”
“오빠!”
“미안해.”

“나한테 화난거야?”

“그래. 다음에 봐.”

“오빠! 나한테 이럴수 있어?”

윤세준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야할것 같아 머뭇거리는데, 윤세준이 나를 막무가내로 끌고 식당밖으로 나왔다.

윤세정은. 화가 잔뜩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앞길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번호도 안보고 윤세준은 나를 버스에 태웠다.

“오빠!” 소리치며 윤세정이 지나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서있었는데…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그는 서서 숨이 찬지. 잠시 눈을 감았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전. 괜찮아요.”

“미안하다. 늦었지만 우리 점심 다시 먹자.”
“전 괜찮다니까요. 동생분한테. 죄송하게 왜 그러셨어요.”

“철이 없어서 그래. 나쁜애는 아니야.”

“괜찮아요.”

“난 괜찮지 않아! 그리고 너도. 왜 웃고있어 바보같이?”
“..네?...”

“속상하면서. 왜 웃냐고? 차라리 화를 내고. 따지기라도 하면”
“네…? 제가…그랬나요…”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그 사람에게…갑자기 투정이라도 부리듯.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냥…선배님께 너무 고맙고… 죄송하니까…제가 무슨자격이 있어서 화를 내요…”

가끔은. 눈물을 한아름 숨겨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만 건드리면 터지는. 아주 형편없이 약해빠진 눈물보자기를 가진 사람들.
한번 터져버리면.
숨겨놓았던 슬픔이 왕창 다 쏟아져 내리고 마는…

술취한 손님의 행패도 참아 넘기고.
늘 의지하고 싶었던 민우석이 내 곁에 없는것도 괜찮은 척 담아버리고.
돈이 없어 늘 쪼달리는것도 웃으며 즐거운 척 하다가도…
이렇게 한번 터져버리면.
추운겨울 두꺼운 코트가 없어 추웠던 기억
혼자 외롭게 고생하시며 늙어가시는 아빠의 모습…
어릴때 엄마가 돌아가신 일까지 모조리 터져나오는.
그런 바보같은 눈물보자기를 가진 사람들…

“야…붕어빵…”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못하는 나를 보고. 그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나도 얼른 그치려고 했는데. 이제 그만 울고 어서 과외하러 가야하는데…

버스가 종점에 도착할때까지.
윤세준은 나를 안스럽게 보고 서있었고.
나는 그칠줄 모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울고…또 울어버렸다.

종점에서야 눈물이 그쳐서.
그를 보고 멎적은 미소를 지었는데…

“미안해요. 제가. 미쳤나봐요…”
윤세준은 말없이 나를 붙잡아 일으켰다.

버스에서 걸어나와.
잠시 그는 말없이 걷고.
나는 그를 말없이 따라갔다.

“근데 여기가…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번쩍거리는 유흥업소들이 줄을 서있었다.
“어머. 정말…여기가 어디예요?”
“이거. 큰일났네.”

등치좋은 아저씨들이 낄낄거리며 인사를 했고,
벌써 오후로 접어드니 업소 앞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도 보였다.

“어머… 젊은 사장님! 이쪽으로 와요. 거기 싸모님도 같이. 여기 끝내주는데야!”

“야. 뛰어.”
어?

우리는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업소들을 지나치고도 한참을 더. 뛰고. 뛰었다.
숨이 가빠오르고 힘들었지만.
왠지 기분이 상쾌해졌다.
더 많이 뛰고 싶어. 그가 숨이 차 헐떡거려도, 나는 다시 뛰었다.

한참을 뛰고 보니.
더 이상은 지쳐서 한발짝도 움직일수 없었다.
몸이 지치는 대신. 마음은 한결 가벼웠는데…

더운 여름. 그렇게 미친사람들 처럼 뛰었으니. 우리는  둘다 형편없이 땀에 젖어있었다.

강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울고싶을때… 나는 이렇게 해…”
옆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땀에 젖어 웃고있는 그의 옆모습은.
섬세한 조각같이 정교하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정다와 보였다.

“이제부터 저도 이렇게 뛰어야 겠어요. 기분이 정말 좋아졌어요…”

“미안해…”
“선배님이…왜요?”
“세정이도…마음에 상처가 깊어서 그래. 어머니한테 하도 세뇌를 당하고 혼이나서… 일부러 더 그러는거야. 원래는 저렇게 차갑고 못되지 않았는데… 독해진거지…그렇게 안하면 자기가 아프니까..”

“우진이란 사람 때문에 말씀이시죠…”
“알고 있었어…?”

“민선배님한테…들었어요.. 둘이…많이 사랑했나 봐요..”
“사랑? 글쎄. 고등학생들이 사랑을 아나?”
“그럼요…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그래.  세정이가 늘 하던 말인데…” 그가 훗 하고 웃었다.
“아직도…사랑할까요?”
“못 잊었을거야. 가끔 나한테 소식 물어보고 싶은 맘…내가 아는데…”

“지금…많이 아프다는 소식은… 모르겠네요..”
“우진이가. 아파?”
“네…그래서 민선배님이 미국에 계셔요. 지금… 간호하러 가신지 세달 쯤 됬거든요.”
“어디가 아픈데? 괜찮은거야?”
“무슨 바이러스라나 봐요. 의사들도 잘 모르는데. 아주머니가 걱정되셔서 매일 한숨만 쉬셔요...”


“…내가…그동안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아주머니가 기다리시는 눈치던데…왜 한번도 안오셨어요?”
“안부 좀 전해드려… 내가 곧 찾아 뵌다고.”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못오실… 무슨 사정이 있으신가요?…”
“근래에. 숨바꼭질을 하고있어. 내가…”
“집에서.. 찾으시나 봐요… 다 저 때문에…"

“때가 된거야. 이제 돌아가야지. 가려고 했어. 조금만 더 있다가.”
“왜요…? 영화 마칠때까지요? 아까 말씀하시던게…”
“그래…영화만 끝내고….”
“그럼. 이번 영화가 마지막인거예요?”
“글쎄… 언제까지나 이렇게 반항할순 없겠지..”

그의 눈빛이 그 어느때보다 더 쓸쓸해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회사일을 배우길 원하시고.. 어머니가 보시기에는 영화라는 일이….”
“천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시구요?”

그가 미안한듯 나를 돌아본다.
“괜찮아요. 이해할수 있어요…”
“난… 이해할수 없는데…”
“그게 왜 이해가 안돼요…? 세상에서 살면서 필요한 돈. 명예. 지위. 다 있는데 왜 한심하게 분칠한 사람 시중이나 들고 사람들 구설수에 오르는 연예계 일을 해요?”
“너…우리 어머니랑 똑같은 소리를 한다..”
“죄송해요…저는 선배님을 이해하고 싶은데…부모님 심정도 이해가 가요...”
“그래? 어린애인줄 알았더니 나보다 낫네..”

그가 허탈하게 웃는데…

“왜 영화가 좋으신데요?”
“나에게 보이는 세상을 다른사람에게도 보여줄수 있잖아…물론. 책도 그렇고. 연극도 그렇고. 음악. 미술. 그 외에 모든것이 그렇겠지만. 영화는 또 영화만의 매력이 있지.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나의 한계가… 영화에선 좀 더 자유롭고.. 삶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고.”

그는 이상하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고 싶지않아 열심히 듣고있는 나를 발견한다.눈 똥그랗게 뜨고있는 나를 보더니 윤세준이 미소지었다.

“가봐야겠다. 우석이한테 내가 연락해볼께. 아주머니께는. 안부인사..꼭 부탁한다.”
“감사했어요. 아. 참…배 고프시겠다.”
“아…그러고 보니 점심 먹자 해놓고….”
“으악! 과외!”
“어?”
“저. 과외 땡땡이 쳤네요…아우…”
“…미안하다…”
“제가 주책부리다 그랬는걸요 뭐…오늘은 벌써 너무 늦었고…제가 점심 사드릴까요?”
잠시 그는 멈칫하는듯 했다.

“아…바쁘세요?”
“아니…그건 아니고… 오늘은 내가 사줄께.”

윤세준은 나를 돈까스집에 데려갔다.
“갈비는 냄새도 맡기 싫지?”

그와 웃으며 저녁을 먹으니 순간 민우석이 보고싶어서. 돈까스가 넘어가질 않았다.

“우석이 보고싶어?”
그는 나를 올려보지도 않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