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아셨어요…?”
“너 얼굴에 써있어.”
“그냥…”
“전화 해볼까?”
“연락처…아세요? 병원이라서. 영어로 해야한다던데…”
“그럼 알지. 그렇지않아도 우진이 상태가 어떤지... 전화하려고 했어.”

민우석이 나에게 꼬박꼬박 전화를 하고, 편지를 보냈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간은. 민우석에게 편지도 없고. 전화연락도 없었다.
어머니는 매일 걱정하시며 한숨만 쉬시니, 한가롭게 전화통화를 하겠다고 조르지도 못하고..
다가올 날이 더 가까와서 그러겠지..싶어 그저 마음만 졸이며 바쁜시간을 보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진이에 대한 소식만 간간이 전해들었을뿐.  왜 연락이 없는지…

윤세준이 연락을 해준다니…마음이 흥분되었다. 돈까스고 뭐고… 더이상 먹고싶지도 않았다.

“그만 먹을래?”
내가 대충대충 썰어놓고 딴전을 피우자, 윤세준이 눈치를 챘는지, 자신의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니요. 더 드세요. 저도 더 먹을거예요.”
“지금 걸면… 거긴 늦은 밤일텐데…서두르는게 좋겠다.”

“식사…더 하세요 선배님…괜찮아요.”
“생각해보니까 시간차이가 나서. 더 늦어지면 안돼겠어. 가자.”

식사도 제대로 못한 윤세준에게 미안했지만, 기쁜마음이 앞섰다.
그는 나를 돌아보고 피식 웃더니..공중전화로 향했다.
별의별 번호를 한참 누르고는, 뭐라고 쏼라쏼라하더니 나에게 전화기를 건네주는데..

“내가 해줬다고 하지마. 싫어할거야.”
웃고있는 윤세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싫어하는거 알면서…늘 돌봐주는 이사람…

따르릉…따르릉…
윤세준은 옆에 벤치로 가 앉았다.
내가 편하게 얘기하라고 그러는듯…

“Hello?”
“어…저기..엄. 여보세요?”
“Who’s this?”
“어…. 이즈…우석 데어? 우진? 브라더?”
“Wait a minute.”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너무너무 떨리는 순간.
민우석이 아니라는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저기…민우석씨…거기 계셔요?”
“형이요. 지금 여기 없는데요.”

멍해졌다.
형이라고. 그럼 민우진이란 말인가… 아프다고…

“우진씨예요…?”
“네. 맞는데요.”
“몸은. 많이 좋아졌어요?”
“회복중이예요. 다음 달이면 완쾌 할거라고…근데. 누구시죠?”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건가…

“저… 한예지라고 해요. 민우석 선배님.. 학교 후배거든요.”
“네… 뭐 남기실 말씀이라도…”

나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마음이 날카롭게 아프면서 실망이 먼저 들고…

“그냥…건강하신지…별일 없으신지…그리고 언제 돌아오시는지…”
“못들으셨군요… 형.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아마 몇년…”
“네?”

몇년이라니.. 그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한예지씨라고 그랬죠? 연락처도 주시겠어요?”
“아니요…아니. 됐어요…”

전화기를 내려놓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한동안 눈도 껌뻑이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매일 한숨을 쉬시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신것은…
우진이에 대한 걱정뿐이 아닌.  알고계시면서 차마 말씀해주실수 없었던 다른 무슨 사정이 있었던것인가?

“얘기…잘 했어…? 우진이는?”
윤세준이 나의 심상치않은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 가 봐야 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야. 붕어빵!”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아주머니한테. 물어봐야겠어서. 왜 그러신건지. 대체 어떤일이 일어난건지…

헐떡이며 식당문을 열었다.
마침. 식당이 조용하고 아주머니 혼자 앉으셔서 콩나물을 다듬고 계셨다.
나를 보시더니 내 눈길을 피하셨는데…
전에는 그저 근심에 빠져 그러시려느니…했었다.

“아주머니…어떻게…된거예요…?”
“예지야…왔니? 너 저녁은 먹었어? 왜 그리 헐떡대고 왔어?”
아주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두 손을 잡아주셨다.

“선배님이…왜… 안오시는 거예요?”

아주머니가 콩나물 다듬던 손을 앞치마에 닦아 내셨다.
“어떻게 된거예요. 말씀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알고 계시잖아요…”
“에유… 미안하다 예지야…미안해…. 이게 다…. 무능력하고 못난 이 에미때문에…”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잠시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시며 망설이시더니…
“우진이…병원비가 엄청나게 나와서… 학교도 못다닐 정도로… 학비랑 생활비는 처음에 갈때 세준도련님이 다 내주셨는데. 그걸 미리 다 빼서 써도 모자를 정도로… 우석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사정에 빌릴곳도 없고…”

“세준선배님한테 부탁하면 안되나요?”  급하니까 옳고 그른것…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절대. 말도 하지 말라고 우석이가 당부하고 또 당부했어… 너한테 말 못한것도…그 이유중에 하나고…”

“근데 왜 못오는거예요? 돈이야. 여기서 벌어도 되잖아요?”
“이 일은…우진이도 모르는 일인데…”
아주머니가 망설이시더니…

“사실…우진이 병이… 옆에서 지켜주면서 증상이 보일때 잡아주지 않으면… 완쾌하기가 힘들다고… 몇년은 누군가 곁에 있어줘야 하는데. 이제 졸업하려면 몇년 더 남았으니… 공부 마치게 해줘야 한다고… 다시는 서러움 겪지 못하게 도와준다고 우석이가… 우진이 한테는 걱정 안 끼치려고 형도 미국에서 영어공부하고. 학교 다니고 싶다고 말해놨단다… 그 병원근처에서 일할곳도 생겼다고…영어는 배워놓으면 좋지않냐고 너스레를 떠는데…내 맘이 아파서…”

이제는 아주머니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온몸과 다리에 힘이 빠져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버렸고…

그래서…동생한테 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것인가.
형이 자기때문에 희생하는걸 알고 괴로와할까봐…?
아니면 내 생각은 하지도 못할정도로 동생이 많이 아프고 사정이 힘들어서…

“예지야…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다… 우석이가…너한테 연락도 못하는건…너무 마음이 아파서. 마음이 약해질까봐 그러는거야… 미안하다 예지야… 우석이가 마음이 좀 추스려지면. 너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거야… 어쩌니…니들 맘. 나도 아는데…”

… 동생을 끔찍히 사랑하는 그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너무 마음이 아프고. 그보다 그냥 그가 보고싶었다.
사귄지도 얼마 안됐는데…
만난지 몇개월 되지도 않았는데.
그와 보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더 안타깝고 더 간절했는데…
그저 그를 볼수없다는것이. 그의 웃는얼굴을 일년. 아니면 그 보다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는건…
사람일이란 모르는것인데… 우리의 마음은 이제 막 시작한 갓 피어난 꽃과같이 여린것인데…

“선배님…민 우석…. 선배님. 나쁜놈… 나는 어떡하라고…나는…이제 어쩌라고…”
혼자 미친사람처럼 중얼거리며 하숙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그냥 옷도 안갈아입고 누워버렸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예지야. 아침먹고 빨래해야지!”

아…토요일인가…
주말이면 산더미같이 쌓인 빨래를 하고. 방마다 돌아다니며 걸레질을 해야한다.
끙…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띵한것이. 갑자기 또 눈물이 나왔다.
어제 그리 울었는데도 아직 눈물이 남았다니…
악몽이었으면 좋겠는데. 오늘 아침. 그의 웃는얼굴이 내 앞에 있으면 좋겠는데…

정신을 차리고 드르륵 문을 열었는데,

윤세정. 그녀가 내 앞에 서있다.
그녀도 많이 울었는지. 어제와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여길…”
“오빠가. 집에 돌아왔어요.”
“네…?”
“어제. 무슨일인지. 갑자기 집에 돌아왔는데.”
“그런데요.”
“오빠는 무작정 돈이 필요하다고. 돈을 주시면 영화도 그만두고.
일 배우겠다고 어제부터 계속... 무릎꿇고 빌고있어요.”
“네…?”

“우진이에게 무슨일이 생긴거죠? 오빠가 그러는거. 그때 그일 이후로 처음이예요. 우진이에게 몇달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서 이상하다 했는데…요즘 자꾸 꿈에 나와요. 우진이에게 무슨일이 생긴거 같아요.”

그동안 두 사람은 쭉 연락을 해왔다는건가…

“근데 왜 저한테 오셨어요.”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몇장을 내민다.

내가 민우석 식당에 들어가는 사진.
걸어나오는 사진.
식당문 사이로 아주머니와 얘기 나누는 사진.
아주머니가 우시는 사진.

“오빠를 찾으려고. 아버지가 풀어놓은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이예요. 오늘 아침에. 아버지 책상에서 찾아왔어요.”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세정은 울어서 인지. 잠을 못자서인지. 많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어제는…미안했어요. 몰랐어요. 한예지씨가. 그저 오빠를 이용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오빠는 지금 아버지 어머니한테 붙들려서 아무것도 말해줄수가 없어요. 무슨일인지. 좀 알려주세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윤세준은. 내가 전화를 끊고 뛰쳐나오자 곧 전화를 해본 모양이다.
그가 얼마나 알고있는지 모르겠지만.  돈이 엄청나게 필요한것을 이미 알아챈 것이 분명하다.
영화를 마치면 돌아간다고 했는데…그렇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끝내고 싶어 했는데…

“우진씨…많이 아팠는데요… 이제는 많이 나아졌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팠다구요. 우진이가요?”
“그래서…민우석 선배님이… 선배님이…”
그리운 그의 이름 석자.  
내가 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진씨를 간호하려고. 지금 미국에 가 계시거든요… 그리고…”
병원비 소리가 혀끝까지 나왔다.  

“우진씨는 괜찮으니까…걱정 말아요.”
“우석오빠가. 힘들겠네요.”

그냥 한숨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그녀 앞에서 울고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더니. 내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제는 그렇게 얄밉더니. 오늘은 이상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그녀가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동서지간이 됬을지도 모르잖아…?

얼마나 보고싶었을까.

“안 본지…몇년 됬어요…?”
“고등학교 2학년. 그 때 헤어졌어요. 어리다고 비웃겠지만. 우리는 아주 어릴때부터 서로 의지했어요. 그게 사랑인지…다들 철없는 감정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한시도 우진이를 잊어본적이. 없어요.”

나의 모습일까. 그녀의 지금 이 모습이 몇년 후 나의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와 오랜 사랑을 나눠 본것도 아니고. 오래된 추억이 있는것도 아닌데…

“지금도…사랑하나요…”
“죽어도. 사랑할거예요.”
그녀의 볼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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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쁜생활로 돌아가 아침에는 커피집. 점심에는 갈비집. 저녁때는 과외를 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돈을 모아서. 비행기표를 사야지.. 그리고 그를 만나러 내가 가겠다고. 나는 굳게 다짐했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더 열심히 모으면. 돈이 마련될것 같아. 지칠줄 모르고.
음식도 아껴가며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다.

갈비집이 유난히 조용한 어느 여름날 점심시간...

문이 드르륵 열리고.
윤세준이 들어왔다.

그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얼굴은 수척해졌는데.
머리도 단정히 잘라 올리고. 면도도 깨끗하게 하고.
고급스런 정장셔츠와,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제 그는 완전히 집에 돌아간것이 분명했다.

“붕어빵. 잘있었어?”
웃는모습을 보니 더 가슴이 쓰렸다.

“선배님…”

“안색이. 안좋네.”
“식사하시러..오셨어요?”
“너 만나러 왔어.”

“왜…요…”
“잠깐. 앉아도 돼?”

“그럼요.”

그는 내 앞에 마주 앉아 물을 마셨다.

“식사는요.”
“됐어.”

“집에…완전히 들어 가신거예요..?”
“그래..”
“영화는요.”

그가 나를 보더니.  곧 힘없이 웃었다.

“우석이랑. 연락이 안돼서. 너 한테 부탁할게 있다.”
“무슨 부탁이요…?”

“우진이… 담당 의사랑 통화를 했는데…”
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어. 겨우 고비를 넘겼지만 치료비가 많이 밀렸다고. 곁에서 계속 보호할 사람도 필요하고.”
“그런…데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나는 이미 알것같았다. 그렇지만.

“그래서. 그래서 말이야.”
“도움. 안 받으시겠다고 했어요. 민우석 선배님이.”

잠시 그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내가 말해놓고 생각하니. 쥐구멍으로 숨고싶을만큼 미안했다.
이 사람이 지금 어떤 희생을 하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선배님은…괜찮으세요? 저번에 세정씨 만났었어요…괜찮으신거죠…”
“그럼 괜찮지. 밥걱정 안해도 되고. 집세도 안들고. 일도 편안하고…”

“민우석 선배님 가족때문에…일부로 가신거잖아요. 가기 싫으시면서…”

“세정이가 내 동생이듯이…우석이 우진이. 내 친 동생들이라고 여기고 살았어. 지금도 그렇고…
  내가 한가하게 내 고집이나 피우면서 그 녀석들 힘들어 하는거.
  지켜보고만 있을수는 없잖아…”

“그래도…그렇게 좋아하시는 영화까지 포기하시고…선배님은 어쩌시려구…”

“너가… 좀 도와줘야 겠는데.”
“제가 어떻게요.”

“이걸. 우석이한테 전해줄래?  병원비랑. 또 간병인도 구할만큼.. 충분하니까.
너가 가서 우석이를 집으로 다시 데려와 줘. 몇년을 어머니 혼자 계시게 할순 없잖아.” 

돈이 좋긴 좋구나… 이렇게 금새 해결될 일을. 민우석이 몇년동안 휴학하고. 일을 하고. 힘들게 벌어서도 충당하기 힘든돈을.  민우석은 자신의 모든것을 다 버리고 희생을 해야만 한다고 믿고 선택한 길인데.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수도 있는것인가.

“안 받으시면요…”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는거야. 너에게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우석이가 받아줄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우석이가 와야. 붕어빵이 다시 웃지 않겠어?”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쩌면 이 상황에서 윤세준의 희생은.
민우석이 택했던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친 동생같이 여긴다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윤세준의 희생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 이라는것을.
사람을 사랑하고 예술과 영화에 젊음을 바친 그가
잔인하리 만치 애정없는 어머니와 일밖에 모르는 아버지 곁에서 겪어야 할 숨막히는 고통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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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나라.
처음 도착한 날은 참 맑은 8월의 날씨였다.
공항에서 한참을 헤매다 겨우 잡아 탄 택시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하늘을 향해 길게 쭉쭉 뻗은 야자수들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렇게 겁도 없이. 미리 연락도 하지않고 모험을 하는것이 옳은일인가.
윤세준의 도움을 덥썩 받아들고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는것이 잘하는짓인가.
그런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민우석을 볼수있다는 희망이. 내내 가슴을 들뜨게 만들어, 나는 실실 웃고있었다.

주소를 따라 병원에 도착하고.
병원에서도 나는 벙어리마냥 이름을 써놓은 메모지를 사방으로 들고다니며 물어보았다.
겨우겨우 안내해주는 입원실로 들어서는데,

“형 다녀올테니까. 밥 잘 먹고있어 임마.”
“고마와 형.”
“쓸데없는 소리.”

그리운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눈앞이 뿌얘졌다.
보고싶은 그의 얼굴을 보려고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나 얼어붙은 표정으로 들고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민우석이 고개를 갸우뚱 흔들더니, 자기 머리를 세개 몇번 쳤다.
아마 헛것을 보고있다고 생각한것 같았다.

“선배님.”

민우석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헛것은 아닌것 같고. 그럼 꿈인가?

“너…여기서…뭐…”
더 이상은 말이 필요없었다.
그에게 와락 뛰어가 안겨 버렸다. 얼떨떨 하던 그도 나를 꼭 안고 잠시 말을 잊지 못했다.


병원 로비에 나란히 앉았다.

“어떻게 된거야…?”
“비행기표는. 제가 번돈으로 마련했어요.”
“뭐? 너 그 피같은 돈으로 여길 왔단말이야?”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동안. 힘드셨지요? 저…보고싶지 않았어요?”
그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내 눈길을 피했다.

“우진이. 죽을뻔했어. 겨우 살아난거야.”
“네…”
“어머니한테는…차마 그렇게 말할수가 없어서. 그래도 이제 살았으니까…”
“앞으로. 어쩌시려구요.”

그는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

“너… 나같은 놈 좋아하면. 고생길이 훤한거 몰라?”
“무슨 소리예요 그게…”

“난 우리 홀어머니 모셔야하고. 지지리도 가난하고. 성질 더럽고 못된건 이미 알겠지만. 특별히 잘하는것도 없는게. 택한 직업이 또 돈 한푼 못버는 연극이다.  연극.  거기다 동생이 앓아누워서. 지금 빼도박도 못하고있어.”

“그래서요.”

“난 한동안 여기 있을거야. 너도 나 잊고. 좋은놈 만나. 아직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어디 남자 꽁무니 쫓아서 혼자 미국에까지 와?”

“끝까지 솔직하게 고백은 못하시네요. 병원비 밀려서 돈 벌어야 한다면서요.  우진씨 곁에서 지켜줘야 한다면서요. 그렇게 말하면 되지. 뭔 핑계를 그렇게 치사하게 늘어대세요?”

“이게… 너 어디서 그런건 다 줏어들었어? 혹시…어머니가?”
“자기혼자 착한척 다 하면서 저까지 포기하려고 했어요?”

“누가 널 포기한데?” 그가 눈을 부라리더니.
“그냥. 니가. 날 포기하라는거지…”

“선배님. 저. 디즈니랜드 가고싶어요.”
“뭐?”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이게 무슨 황당무개한 소린가…하는 표정으로 민우석이 나를 보고있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데리고 가 주세요. 네?”
“내일? 어…내일…나는…”
“일 가시려구요?”
“그럼. 한가하게 놀라구 내가 여기 있는지 아냐?”
“내일만. 내일만 저랑 놀아주세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얘가 왜이러나…하는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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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음날. 민우석은 나를 데리고 디즈니 랜드에 갔다.
사람이 어찌나 많고 복잡한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도를 구해 들긴 했는데 너무나 광범위하고 군중들로 꽉 차서. 어디가 어딘지 알수가 없었다.

“저. 배고픈데요.”
“그래? 얜. 놀기도 전에 고프다네.”
그와 함께 돌아다니다, 좀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을 골랐다.

“야. 아침부터 뭐 저런걸 먹냐? 미국에 왔으면 햄버거를 먹어야지. 안그래?”
“아뇨. 저 저기 가볼래요. 제가 여름내내 번 돈으로 오늘 좋은 구경하고. 맛있는거 먹고 싶어요.”
민우석은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들어왔다.

둘다 영어가 짧으니 손짓 발짓을 해가며 오더를 하는데,

“Would you like soup or salad?”
“음? 슈퍼쌀라드? 오케이. 베리 굳.”
“Soup or salad, sir?”
“베리 굳이라니까. 얘가 말이 많아.”
“Soup, sir? OR Salad.”
“아…쌀라드. 쌀라드.”
푸하하하하…
그를 보고 웃는데,
웨이터가 기분 나쁜듯, 눈알을 돌리며 메뉴를 치워갔다.

“선배님도. 영어 되게 못하시네요.”
“발음이 틀려서 그래. 우리 시대에는 영국식으로 배웠거든.”
큭….
“핑계도…영어시간에 졸았죠?”
“넌… 나를 가지고 노냐 지금? 그러는 너는. 왜 오더를 나한테 다 시키는데?”
“선배님은 그래도 여기서 몇달 사셨잖아요…”
“너야말로 수능시험 본지 얼마라고 벌써 다 영어줄 놓고살아?”
푸하하하하…

그와 밝게 웃고있으니 잠시 타임머신을 탄듯. 우리에게 닥쳐온 모든 역경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놀이기구란 놀이기구는 다 타보고. 영화도 구경하고. 솜사탕. 아이스크림. 닥치는 대로 사먹고.
또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로 점심을 때우고 사진을 찍으며 어린아이들처럼 뛰어 놀았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민우석과 손을 잡고 퍼래이드를 구경하고. 온통 구석구석 디즈니 랜드를 뒤지고 다녔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자, 불꽃놀이가 시작됐는데…

음악과 함께 터져나가는 불꽃놀이가. 환상 그 자체였다. 마치 꿈을 꾸는것같이.

“너…무슨 생각으로 날 찾아 온거야.”
불꽃놀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그의 어깨를 기대고 앉아있었는데…

“보고싶어서요. 선배님 보고싶어서 왔어요.”
“이렇게 보면. 또. 더 많이 보고싶을거 아냐.”

드디어 그 순간이 온건가…
내가 온 진짜 이유를…그에게 고백할 순간이.
그는 화를 낼것이다. 나를 미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부러 그 얘기를 하기전에 그와 추억거리를 쌓아놓고 싶었다.
웃었던 기억을 간직하고 싶었다.

“보고싶으면. 더 많이 보면 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