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민우석이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이. 불꽃놀이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포소리와 불빛에 섞여,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왔다. 아름다운만큼 내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무슨 뜻이야.”

“저랑 같이…한국으로 다시 가면…”
“우진이랑. 잠시 함께 있기로 했다고…얘기 했잖아.”

“잠시가 아니고 몇년이라면서요.”
“예지야.”
“네 선배님…”

“니가 날 따라다닐만큼. 아니. 돈 들여서 나 찾아다닐만큼. 우리 깊이 사랑하는 사이 아니지 않아? 우리 만난지도 얼마 안됐고”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예요…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저 마음 아픈거 원하신다면. 안그러셔도 벌써 많이 아프거든요.”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슬픔을 억제하는것이. 내 눈에 보였다.

“우진이 학교 마칠때까지. 지켜주고 싶어. 입원비도. 내 손으로 마련하고 싶고.”

“그럼 선배님은요. 졸업도 코앞인데... 선배님 인생은요?”

“인생? 겨우 몇년이야. 그리고 나한테 한국이나 미국이나…그게 그거야. 우진이 옆에서 도와주면서. 나도 일도 하고 공부도 할거야. 우진이 녀석. 우리 어머니 유일한 희망이다. 나랑은 달리 어디가나 천재소리 듣는 녀석이야. 무사히 대학 마치고. 성공해서 돌아가는거. 내 눈으로 볼거야.”

“그럼. 저는요?”
민우석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민우석이 망설이더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내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는. 하루도 안 보면 미칠것 같은데. 그래서 지난 몇달. 곧 만날거라는 희망으로 버텨왔는데. 이제 어쩌라구요.”

“너도… 니 아버님 유일한 희망이잖아. 대학 열심히 해서 잘 마치고. 꼭 성공해라. 효도해야지…”

“그런 얘기를 하자는게 아니잖아요!”

“나한테 어떻게 하라구 그럼!”
민우석이 못참고 터뜨린다.

그의 눈동자가 젖어있었다.

“도움…받으면…안돼요…? 지금 도움 받고. 나중에 성공해서 갚으면 되잖아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내가 너무 성급했나… 이렇게 말고 다른 방법으로 얘기해줄수는 없었나…
이미 굳게 마음을 정한 그에게. 내가 할수있는 마지막 부탁이었다.

“너… 지금 뭔 소리 하고 있는거야…?”

“도와 주시겠다고 오히려 부탁하셨어요…거절하실지도 모른다고…걱정 하시면서. 정말 선배님 위해서…”

“무슨 소리 하는거냐고!”

“윤세준 선배님이요…”

민우석.
그의 표정이 비참했다.
정말로 부인하고 싶었던 현실을 맞이해야 하는 그의 아픔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디즈니랜드를 빠져 나온 후에도. 한참을 더 걸었다.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하는데. 그는 말없이 걷기만 했다.

“선배님…”

“돌아가.”

“선배님… 어머님 생각도 하셔야죠. 몇년을 어떻게 혼자 지내시게 해요…”

“그 놈이 그 말도 전하라 그러든?”

“선배님!”

그제야 민우석은 뒤돌아서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너. 내 말 잘 들어.”

민우석의 화난 표정을 참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정말로 많이 화가나서.
울분이 넘쳐올라서. 그래도 많이 참으려 노력하는 표정이었다.

“어머님. 우진이. 그리고 나.
충분히 우리끼리 살수 있어.
윤세준이 우리의 구세주처럼 매번 나타나서
우리 식구 살려내는거. 필요없다구.
이제 그만하라 그래.  내 가족은 내가 지켜.  더 이상  다른 사람한테 거지같이 손 벌릴 만큼.
나 이제 어리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분은. 선배님을 친 동생같이 여기셔서”

“웃기지 말라 그래!”
그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자식이 무슨 돈이 있어서 우리를 도와? 분명히 지네 부모님한테 받았을거 아냐?
거렁뱅이같이 영화나 찍던 그 녀석이. 어디서 돈을 구했는데?
친 동생?  가족?
웃기지 말라 그래. 그 녀석의 가족은.
우리 가족 평생 죽어도 못 벌 돈을. 동냥하듯 비웃고 던져줄수 있는 사람들이야.
나에겐 피같은 돈으로. 사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사람들이라구.
그 도움을 받으라구? 그렇게 평생 기대며 살아가라구? 내가 거지야? 내가 병신이야?”

“그런거 아니예요. 윤세준 선배님이 그렇게 아끼던 영화도 포기하고...
이제부터 회사에서 일해서 한푼도 빠짐없이 모두 갚는다고 약속하고...
세정씨가 그러는데…
음식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몇날 며칠을 간청하고 애원해서 빌렸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가치없이 동냥하듯 주는 돈이 아니라구요.
선배님이 나중에 배로 갚으면 되잖아요. 더 성공해서. 우진씨랑 선배님이랑. 갚아주시면 되잖아요.”

“빌었다고. 그놈이 그렇게 비굴하게 빌어서 얻은 돈을. 내가 당연한듯 받아 쓰라고? 그 놈이 내 은행이냐?”

“그게 왜 비굴해요. 그만큼 선배님하고 선배님 가족들을 아끼니까”

“너는 그 자식이 그렇게 고마워? 그 자식 마음을 니가 그렇게 잘 알아?”

“선배님도 사실은 고맙잖아요. 사실. 정말 가족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고맙게 생각하면 안돼요? 그 분이 그렇게까지 희생하는건. 그냥 동정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받아 들이시면. 안돼요?”

“진심이건 동정이건. 그 아무의 도움도. 이제 안 받아.
돌아가서 전해. 다시는 우리때문에 그런 바보짓 하지 말라고. 이제 나는 다 잊겠다고, 그 가족들 모두 용서하고 잊을테니까. 이제 그만 편하게 살라고 전해.”

“대체… 왜요. 왜 안 받겠다는 건데요?…”

“내가 할거야! 내 가족은 내가 지킬거라구! 윤세준 말고. 내가!”

“저는. 어떻게 하라구요. 저는, 선배님없이. 이제 혼자 있는거 상상도 하기 싫어요.”
“너랑 나랑 그정도로 깊은 사이 아니야. 나 없이 너 충분히 살수있어. 그리고 이 쯤에서 헤어지는게 너한테도 좋은일이야.

“정말…그래요? 선배님은. 그냥. 그래도 돼요?”

“우진이는. 내가 자기때문에 여기 남겠다는거. 전혀 몰라. 우진이가 눈치채기 전에. 돌아 가줘.”
“선배님!”

그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혀 반짝 거렸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뒤돌아 서며 나지막히 말했다.

“나 잊어. 바보같이 기다리고. 찾아오고. 그런 짓 하지말고.”

“잊으라니. 그게 무슨 말이예요…내가 사라졌을때 다시는 그러지 말라더니. 선배님이 이러시면 전 어떻게 하라구요.”

“사람 잊어버리는거. 간단한거야. 시간만 조금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아.”

“너무…잔인해요. 선배님 이렇게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예요?”

“몰랐어? 나 원래 그런놈인거. 진작에 알았어야지! 나를…이해할 필요없어. 용서할 필요도 없어. 편하게. 날 그냥 버려.”

“그런 바보같은 소리가 어디있어요. 버리긴 뭘 버리란 거예요? 내 사랑을 내 마음을. 쓰레기같이 버리라구요?”


민우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짙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보며…마지막으로 한번 나를 더 봐두겠다는 표정으로…

“너… 하나도 안 예뻐.
보고싶지도 않았어.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고.
또 다시는. 기억도 나지 않을거야.”

왜 나는 그의 그 말이 이렇게 들렸을까…
너…예쁘다.
보고싶었어.
생각도 많이 했고.
언제까지나 기억할거야… 라고…

늘 속 마음은 따뜻하고 여리면서도 겉으로 화를 내고 못된 성질을 부리던 그의 버릇을…이제 나는 알아보고. 알아 들을수 있었기 때문일까.

민우석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에 범벅이 되어 희미해진 그의 뒷 모습이.
꿈같이 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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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병원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는 이렇게 그를 포기할수 없었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서, 영어도 못하면서 간호사들을 찾아갔다.
손짓. 발짓. 글씨. 별 짓을 다 하며 설명을 하는데…

“Oh… Mr. Min… He was discharged. His brother took him to take care of him at home.”
“뭔소리지? 홈? 집에 갔다구? Home?”
“Yes. They went home.”
“Where? Where is home?”
“I’m sorry, I’m afraid we cannot disclose that information without permission.”
“뭐라구요? 왜 쏘리야? 왜 미안한데? 어디냐니까. 왜 미안하냐구?”

“Uh… if you’ll excuse me..” 간호사는 별꼴이라는듯 입술을 쭈삣거리며 나를 슬쩍 비켜 걸어가려는데,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Where? Where is Mr. Min’s Home?”

“I AM SORRY. I CAN NOT TELL YOU THAT.”
나를 굉장히 무시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입을 쩍쩍 벌리며 한 마디. 한 마디를 내 뱉었다.

공중전화를 찾았다.
윤세준이 급하면 연락하라고 전화번호를 주었다.

내가 그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을때 유치장에 나와 끌려가던 그의 모습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염치. 그런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여보세요]

“선배님! 윤세준 선배님이죠”

[누구시죠]

“어….저…저기 거기 윤세준 선배님 안계셔요?”

[지금 전화 못 받으십니다.]

“왜…왜요…”

[일 하고 계시거든요.]

“잠시 한마디도…할수 없는건가요…”

[안녕히 계십시오]

띠…띠…띠….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번호라고. 이 번호만으로 연락을 할수 있을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전화마저. 분명히 압수당한것 같았다.
이제. 아무런 도움도 받을수 없고. 민우석을 찾을 방법도 없었다.
윤세준이라면. 우진의 기숙사를 알고 있을텐데… 학교 이름이라도 안다면. 내가 찾아갈텐데.

며칠을 호텔에서 지냈다.
이 좋다는 미국땅에 와서. 나는 호텔에만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매일. 윤세준에게 전화를 했다.
늘 그 사람이 전화를 받았고 대답은 늘 같았다.
도련님은. 일을 하고 계시다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늘…
그리고 사흘이 지나자 그 전화번호마저 끊어졌다.

윤세준이 내 손에 쥐어준 통장을 꺼내 보았다.
정말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내가 평생 살면서 만져본 통장중. 가장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있었다.

통장을 만지작 거리며…
윤세준을 생각해보고…
민우석의 뒷모습을 기억하며…
며칠동안 …나는 눈을 감고 이런 저런 상상을 되풀이 해보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어떻게 될까.

나는 우선 전화번호부를 뒤져 한국어 통역관을 찾아냈다.
병원에 찾아갔고.
민우석 이름으로 밀린 병원비를 모두 계산했다.

윤세준의 말대로. 병원비를 다 내고도. 엄청난 액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통역관과 근처의 대학들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런 용기가 있는지. 이런 무서운 힘이 있는지.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다.
민우석이 나를 평생 미워하게 될지도. 나를 원망하고. 욕할것을 각오했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를 이 상황에서 빼내어 주고 싶었다.
혼자 힘으로 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꺽고 싶은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설사 그를 잃는다 해도.
더이상 돈 때문에 그의 인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건.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민우진의 학교를 찾아냈다.
그가 형과 지내고 있는 아파트도 알아냈고.
학교에 내야할 돈이 얼마인지도 모두 알아내고 지불했다.

민우석이 윤세준의 도움을 안 받겠다면. 내가 받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민우석이 필요하니까. 내가 이기적이라 해도. 나는 그 사람을 내버려 둘수가 없었다.

똑. 똑. 똑.

민우석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놀란 표정은…

"너 여기서 뭐하는거야. 여길 어떻게 찾아왔어?"

“병원비 다 지불했어요. 학교에 수업료도 모두 다 냈어요.
이래도 여기에 있겠다면 좋아요. 하지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야! 한예지!”

그가 울분에 터져 소리를 지르다 곧 우진을 의식하고 문을 닫았다.

“너 미쳤어? 너 돌았냐고!”

“네. 저 돌았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너무나 실망했고. 놀라고. 원망스러워서. 그가 울고 있었다.

“너…내 마음 그렇게 몰라? 왜 네가!”
그의 울부짖음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것 같았다.

“공부한다고 하셨다면서요. 영어도 배우고. 우진씨만 성공시켜서 돌아오지 말고.
선배님도 공부 많이하고. 성공해서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