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우리 세준이랑. 어떤 관계라구요?”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가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여유롭다기 보다 거만함에 가까운. 감히 네가 누군데 이런 생 쑈를 하고있냐는듯한.
겉으로는 웃고있었지만 느낌으로는 싸늘한 그런 미소였는데.

"우리 만난적... 없죠? 어느 집안 아가씨인지...잘 모르겠는데...?"
내 차림새가 워낙 초라했지만 첫눈에도
내가 곱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가 아니라는것 쯤은 알아 채신 모양이었다.

"서울..사람인가?"
"아니요...인천에서...자랐는데요."
"부모님은. 뭘 하시고?"
"장사...하셔요."

연기를 해야하는데.
그녀의 존재는 나를 꽉 조여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다행히 그 때 비서가 들어왔고.

“사모님. 도련님 도착하셨습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고는.
“잠깐. 거기 앉아있어요.”

앉아있으라고 그 한마디를 했을뿐인데.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윤세준이 들어오면, 그는 너무나 황당해서 웃어버릴까.
안절부절하며 평소 안하던 손톱 물어뜯기까지 하고있는데,

“세준아. 아는 사람이니?”

윤세준이 조용히 나를 보는 눈빛은.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괜히 집에 들였나?” 진작 쑈인줄 아셨다는듯. 그녀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모르는사람이라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여자애인것 같다 하고 차라리 나를 그냥 밖으로 보내줬으면…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 아가씨 말로는 너랑 사귄다던데. 그럼 그 소리도 맞는 소리니?”
그녀는  그렇게 직선적으로 물으며 섬찟한 눈초리로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이제 그와 눈을 마주친 채 눈으로 사정을 하고있었다.
못하겠어요. 자신없어요. 다른 방법이 있을것 같은데…. 절 제발 그냥 보내주세요 라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할수 없다는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퍼뜩 민우진의 쓰러지던 모습이 다시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내가 이 미친짓을 하고있는 이유는…민우석을 위한거야. 그의 동생을 생각하면!

“선배님.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그렇다. 나는 연기를 해야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윤세준의 어머니는 흥미롭다는듯 나를 흘겨보았고,
“세준아. 여기 이 아가씨 말을. 내가 믿어야 하는거야? 아는 사람이냐고?”

“네.”
그의 대답이 짧았다. 분명 세정의 눈물어린 부탁에 마지못해 약속을 했는지. 그래도 차마 거짓말은 못하겠는지.

“네? 네..라고? 무슨 대답이 그래?…. 그럼 김 비서. 김 비서는 이 아가씨 만나본적 있어?”

“얼마 전에 한 식당으로 도련님께서 이 분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도련님이 돈을 빌려가신 이유가. 이분에게 전해드리려고 한것 같았고.  도련님이 비밀리에 가지고 계시던 전화기로는 한예지씨가 수십번 전화연락을 하셨구요. 세정아가씨와 민우진의 과거이야기도 잘 알고 계실만큼…가까운 분이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이 맘때에도 무작정 찾아 오셨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비서의 증언이 나의 연기를 그럴듯하게 사실인것 처럼 받쳐주었고.

“뭐?”
그녀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섰다. 지금까지의 미소가 그 순간 싹 사라졌는데.
곧 그 매서운 눈길이 윤세준을 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못갈것은 또 뭐란 말인가.
“선배님하고…저. 사…사귀고 있어요...”  
윤세정의 희안한 아이디어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것을…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없다.
내가 갑자기 눈을 껌뻑이기 시작하자,
윤세준의 어머니의 표정에서 밝은모습은 이제 가식것인 것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러니까. 세준이가 집에 돌아와서 그 난리법석을 치고 돈을 빌려간게. 이 여자애 때문이란 말이야?”

드르륵. 문소리가 들렸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윤세준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뭐하고 있어. 다들?”
윤세준의 아버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초라하게 떨고있는 나를 발견하셨다.

“새로 일하러 들어온 아가씬가?”

입안에 침이 바싹 말라붙었다.
그냥 뛰쳐 나갈까…
따르릉… 전화소리가 울리고.
“여보세요”
 윤세준의 어머니가 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들었다.

“응. 세정이니? 그래. 누구네 집? 그래. 알았어. 맘대로 해.”
그렇게 건성으로 전화를 끊으셨다.
드디어 세정의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싶었지만 세정의 계획이 탄로나지 않도록 나의 연기는 잠시나마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제 무대에서 인사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극을 끝내야 하는데.

“오늘은 이만 가봐.” 내 속맘을 읽었는지, 윤세준이 내쪽으로 다가와 나의 겉옷을 챙겨주었다.

“가긴 어딜가.”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왜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셨고.

“여보, 여기 이 아가씨가 세준이. 애인이라네요.”
“애..인?”
믿을수 없다는 표정이셨고.
곧 훗. 하고 웃으셨다.

“그래… 3년을 지멋대로 하고 다녔으니. 애인이 있을만도 하구만. 그래. 뭐하는 사람인가. 아가씨는.”
“…학생입니다.”
“얼굴은 예쁘장 하게 생겼구나. 그래. 세준이랑 사귄지는 얼마나 됐니.”

“여보!”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불쾌한지, 어머님이 끼어드셨다.

“세준이가 일하느라 그 동안 못만났으니. 궁금해서 왔나보구나.
하긴, 우리 세준이가 어떤사람인줄은 지금까지 몰랐었겠지.”
“네…”

“이름이 뭐냐.”
왠지 그분은 정말로 궁금해 하시는것 같았다. 뜻밖에 친절한 그의 목소리와 표정.
그 순간만큼은 높은 어르신같지 않고 그냥 이웃집 아저씨같이 편하게 느껴졌는데.

“한…예지 입니다.”

그분이 나를 자세히 살피시더니, 미새한 미소를 머금으셨다.
아니, 미소라고는 할수없었다. 그만큼 아주 조금. 겨우 보일랑 말랑한. 흐뭇함과 교묘함의 사이.
그리고 밝기보다는 조금 어두운, 그런 희미한 표정이었다.  이건 또 뭔지…

“우리 세준이를. 좋아해?”
갑자기 당황스런 질문이었다.
설사 내가 정말로 좋아했다해도.
이 상황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세준이를. 사랑하냐고?”
“저…저기…”

“돈이 좋은거야, 세준이가 좋은거야?”
사랑하냐는 그 질문에 완전 쫄아버린 나를 보시고. 
이제는 영락없이 사깃꾼으로 보고계신것 같았다.

“네? 돈이라뇨! 전..그런게 아니고!”

바로 그때.

“제가. 사랑합니다.”

윤세준의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연극부의 레전드라더니. 그는…정말 연기를 잘 하는구나.
내 뱉는 말보다 더 중요하다는,
그의 호소력있는 자세, 표정. 음성까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땀이 쫙 흐르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것은. 그의 연기가 너무 실감나서였을까.

윤세준의 한마디에 어르신은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지셨다.
“김 비서. 이 아이 당장 내 보내. 어디서 이런!”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순간. 모두 놀라서 윤세준을 보았다.

“세준이 너는 어서 들어가서 일이나 해!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이 아이 혼쭐을 내주기 전에!”

김 비서가 내 쪽으로 다가오려는데,
윤세준이 손을 올려 걸어나오는 김 비서를 막아섰다.

“윤세준!” 아버지의 엄한 목소리가 거실안에 쩌렁쩌렁 퍼져나갔고,

“나가자. 미안해.”
그가 떨리는 내 손을 조용히 잡아 주었다.
따뜻한 그의 손이.
내 주위에 나를 노려보는 차가운 시선들을 모두 잊을수 있게 만들었다.

나를 이렇게 내 보내고 나면. 윤세준은 그 마무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부모님이 저렇게 잔뜩 화가 나셨는데…
내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이집안을 훨훨 벗어난 후.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마음속으로 그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정말 이렇게까지 뻥을 쳐도 되는건가…

“김 비서. 따라 나가서 세준이 데리고 들어와!”

현관문을 닫기가 무섭게 분노의 목소리가 뒷통수를 때렸다.
윤세준은 문을 닫고, 대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괜히 왔나봐요…선배님. 이제 어떻게 해요…”

“도련님!” 비서가 서둘러 따라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윤세준이 나를 돌아보며 힘없이 미소지었다.
“괜찮아...”

“선배님!” 

“우석이한테. 안부 전해라. 다음에는… 다 같이 만나자.”
비서는 헐떡거리며 윤세준 옆에 서서 걸음을 멈췄다.
윤세준은 마음아픈 미소를 뒤로 남긴채,
“잘가라 붕어빵.”
그 한마디를 했을뿐인데,

미친걸까.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줘 버리고 자신에게 남은것은 아무것도 없는…그의 고독한 뒷모습을 보다가…

뛰어가 그의 힘없는 손을 덥썩 잡아버렸다.
“선배님… 힘내셔요.  도와주신것 모두…절대 잊지 않을께요. 고마워요…”
나라도…따뜻하게 한번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너무나 춥고 외로와보이는 그의 삶이 잠시라도 따뜻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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