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일이 있고나서 한달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정말 답답하고 오랜 기다림이었다.
나로써는 모두들 무사하길 바라며 기다릴 뿐이었고. 그 외에 할수있는것이 없어서 더 힘든 시간이었다.
연극부 연습이 한창이었다.
“민주야.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여기서 더 쎄게 나가야지. 안 그래?”
“글쎄. 너무 성급한거 아니야?”
“예지야. 넌 어떠니? 여기서 민주가 화를 내는게 이상하지 않아?”
“야. 한예지.”
“한예지, 정신 차려!”
“어?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얘가…또 넋놓고 있네… 민우석 선배한테 걸렸으면 또 쫓겨 났겠는데?”
나의 맘을 알턱이 없는 그들은 모두 무슨 농담이라도 들은양 하하…웃어댔다.
“근데. 선배님 안계시니까 너무 힘이 빠진다.”
“그러게. 후계자 임명도 해주셔야 되고. 졸업도 하실분이. 대체 왜 안오시는건데? 언제 오신다니?”
“아무한테도 연락 안하셨지?”
“야. 야. 빨리 연습이나 하자. 졸업무대. 안 올릴수는 없는거잖아.”
민우석이 없는 연극부는. 그야말로 이빠진 호랑이같이
들쑥날쑥하고 우유부단했다.
늘 민우석 못됬다고. 성질 나쁘다고 욕하던 선배들도.
사실 그의 리더쉽이 없으니 제대로 안 돌아가는 연극부가 한심할 뿐이었다.
예전에 하던데로 예지는 청소도구를 챙겼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지만. 예지는 민우석 생각을 하며 무대를 청소했다.
걸레질도 하고. 쓰레기도 모아 줍고.
한참 분장실을 청소하다가 나와서는 무대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는 의자를 치우려고 붙잡았는데,
오래되서 부서진 의자 다리에 사납게 삐쳐나온 못이 있는걸 미쳐 보지 못했다.
“아!”
놀라서 손가락을 붙잡다가,
닦아놓은 바닥에 피가 떨어진걸 보고,
아픈 손가락을 꽉 쥐는데… 왠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어깨를 들썩대며 울기 시작했다.
왜 나는 늘 혼자 여야 하는거야.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함께 있을수 없는거야…
순간 누군가 구부려 앉아 떨어지는 내 피를 옆에있던 수건으로 닦아냈다.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울다가 너무너무 놀라서 헉 소리를 내며 돌아보았는데,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피 흐르는 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끌어 자신의 품안에 있던 손수건에 꼭 감싸 주었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여긴 어쩐일로.”
“아파도…너무 울지마라.”
“선배님..?.”
“이제. 우석이 잊어.”
“네?”
그의 말을 내가 잘못 들었다. 분명 그는 다른 소리를 했을것이다.
“왜…그러세요. 뭐가. 잘못된거예요? 선배님한테 무슨일이 있어요?”
“내가…내가 해줄수 있는게 있다면….”
“왜 그러세요. 선배님 괜찮으세요?”
“내가…도와줄께..”
기가막히고 겁이나서 그를 세게 밀쳤다.
“뭘 도와준다는 거예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 기가 막히니까. 화가 났다.
대체 윤세준이 왜 민우석을 잊으라고 하는지… 너무나 화가 났다.
“민우석 선배 아낀다고 한거. 다 거짓말이예요? 민우석 선배 때문에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왜 이러세요? 장난치는거 아니고. 농담아니면. 저한테 왜 이러세요 갑자기? 전에 제가 찾아가서 연극한게 그렇게 속상하셨나요? 지금 저 혼내주려고 이러는거예요?”
“그만 잊어버려….”
"나가세요! 여기서 나가세요. 그런말씀 하시려면 그냥 가세요!"
화를 내며 소리지르다, 옆에있는 의자를 넘어뜨리고 나도 같이 쓰러지려는걸 윤세준이 받아잡았다.
그를 뿌리치려다 같이 넘어질뻔 했는데,
“도련님!”
김비서가 뛰어온다.
그 사람은 아직도 윤세준을 그림자같이 쫓고있었다. 달라진게 대체 뭐길래.
“진정하십시오, 한예지씨.”
“가세요. 어서 가세요! 전 우석선배 기다릴거예요! 절대로 잊지 않아요!”
“한예지씨. 민우석씨는.”
“그만.”
윤세준이 비서의 말을 막았는데,
“뭐가요, 민우석이 뭐가 어쨌는데요!”
“미국에서 결혼하셨습니다.”
굳어졌다.
시간이 모두 멈춰졌다.
나의 모든 감각이 기능을 잃은듯.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느낌도.
시야앞에 모든것도 하얗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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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분명 그건 꿈이었다.
정말 나쁜 꿈을 꾸어서 깨어난 후에도 슬픔이 남아있는. 정말 생생한 꿈이었을것이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옆자리에 엎드려 자고있는 사람은.
내가 아플때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어주던, 민우석일것이다.
“우석…민 우석 선배님…”
피곤한 어깨를 힘겹게 일으켜 올린 사람은.
윤세준이었다.
그렇다면?
“저…꿈…꿨나봐요. 아주 나쁜 꿈이었는데…”
“붕어빵, 정신차려. 기운내고 여기 죽도 좀 먹고… 아니면 뭐 먹고 싶은거 있어?”
“선배님은 왜 여기 계셔요?”
“목숨걸고 또 가출했다. 왜?”
“왜 그러셨어요…”
“니가. 다른 사람한테 들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서.”
“뭘요. 무슨 말을 들을까봐요.”
“기억안나?”
그럼. 꿈이 아니었나? 아니면 아직 내가 꿈에서 덜 깬건가?
힘을 잔뜩 주고 윗몸을 일으켜 보았다. 꿈이라면, 이렇게 내 맘대로 몸이 움직여질까?
이상하다…
“뭐 먹을래. 넌 뭘 좋아해…?”
“국수요. 우석선배 어머님이 말아주시는 국수 먹고싶어요.”
윤세준이 안타깝게 나를 바라본다.
“왜요..”
“그런건 사오면 불어터져서 못먹어.”
“그럼 가서 먹으면 되죠.”
“식당. 정리하셨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는 믿어야 하는건가. 현실을 영 외면해 버리면 나는 정신병자가 되어버릴까?
“그럼 집으로 찾아가서 해달라고 하면 되죠!”
“야. 붕어빵..” 윤세준이 나무라듯이 나를 쳐다 보는데.
“지금 가서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울부짖는 나를.
그는 말없이 보고있더니.
“그래. 그럼 알았어. 내가 가서…가져올께.”
윤세준이 문을 열고 나갔다.
팔에 꽃혀있는 바늘을 뽑아 내 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휭하니 어지러움이 나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한예지씨!”
김비서가 쿵하는 소리를 듣고 밖에서 뛰어들어왔는데,
“아저씨는…왜 여기 있어요? 선배님 가출했다면서…”
“저도.. 가출한거죠.”
“뭐예요?”
기가막혀서 코 웃음이 나왔다.
“지난 몇달동안 도련님을 모시면서…느낀점이 많았습니다. 오랜시간 회장님을 모셔왔지만. 그리고 한번도 그분의 말씀을 거슬린적이 없었는데… 도련님을 만나고. 저도 바뀌었나 봅니다.”
“뭐가 바뀌었단 말이예요?”
“이젠 도련님을 돕고 싶어졌습니다. 쫓겨나더라도. 함께 쫓겨 나려구요.”
“뭘 돕는다는 거예요. 왜 그분이 여길 오시려고 가출을 했다는 거죠?”
“그렇게 모르시겠습니까?”
김비서의 억양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도련님이. 왜 이러시는지 몰라요?”
문이 확하고 열렸다. 간호사 선생이 바닥에 내동그라 쳐진 바늘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침대위로 누우세요!”
“저.. 안 아파요. 병 걸린사람 취급하지 마세요.”
“빈혈이 심해요. 좀 쉬면서 치료받고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멋대로 돌아다니다간 큰일나요!”
간호사가 나가고. 김비서는 구석의자에 말없이 앉아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얘기 해주세요. 민우석이 왜 갑자기 결혼했는지. 그리고 윤세준 선배님이 왜 이러시는지.”
“민우석 얘기는 잘 모르니 좀 있다 하기로 하고.
도련님은.
그러니까 도련님은
저번에 한예지씨가 찾아오셨을때.
부모님께 하신 말씀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거죠.
그때 한예지씨가 집에서 나가시고 얼마나 곤혹을 치르셨는지.
상상도 못하실겁니다. 한예지씨는.”
그가…한 말들이? 연극부 레전드라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제가 보기엔 아주 예전부터 한예지씨를… 뭐…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셨지만
민우석씨 때문에. 그저 곁에서 돌봐주기만. 도와주기만 한건데.
갑자기 이렇게 되버리니까.
한예지씨가 상처받을 생각을 하시니,
사리판단이 흐려져서 이렇게 뛰어오신거 아닙니까.”
내가…상처 받을까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윤세준이 숨을 가쁘게 쉬며 손에 뭔가를 들고 들어서는데.
“김비서. 여기서 뭐하고 있어?”
“네? 아니. 아니요. 한예지씨가 갑자기 침대에서 떨어지셨습니다. 그래서..”
“뭐? 너 괜찮아?”
순간. 윤세준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그의 속마음을 한번 읽어보았다.
그는 나를…
“국수…먹어라.”
“우석선배…왜 결혼했는데요.”
그러나 나는…
윤세준이 할말을 잃고 돌아서더니, 국수를 그릇에 챙겨주었다.
“불기전에 먹어. 먹고싶다며.”
“아무 국수나 먹고 싶은게 아니잖아요.”
내가 왜이리 심통을 부리는지. 그러나 나는 알아야겠다.
윤세준이 젖가락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왜 그런건데요. 왜 나를 이렇게 버린건지. 말해주세요.”
“먼저 먹고.”
“먼저 말해주세요.”
“세정이 때문이야…”
윤세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세정이하고…우진이를 위해서. 그 바보같은 녀석이…”
“그러니까. 왜 결혼을 한건데요!”
“그 여자 집안에…돈이 많아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윤세준이 뛰어가 사온 국수 그릇을 바닥에 내 던져 버렸다.
내가 이렇게 못된 사람인지…
그날 처절히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윤세준도. 그의 비서도.
내 침대 곁에는 방금 말아놓은것 같은 국수가 정성스럽게 포장되어 있었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는데,
병실문이 열렸다.
윤세준이 들어왔다.
나를 보고 안쓰러운듯 고개를 숙이며.
“동정하는거죠? 제가 불쌍해서 동정하는거예요 선배님은.”
“너를 동정할 자격이나 있나. 내가.”
“자격이라뇨.”
“난 오늘…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 일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랑.
지금 화가 많이 나신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진이 없이 이제 못살겠다고
단식투쟁하는 세정이를..
그냥 내버려 둘수가 없어서. 너를 혼자 두고 가야 하거든…”
윤세준마저 나를 두고…가야한다고…
“너를 동정하거나. 도와주거나. 지켜줄 능력이, 자격이 없어 나는…”
“제가 뭐라고 그런걸 바래요. 원래 전 혼자였고. 이런 일가지고 저 흔들리지 않아요. 더 잘 살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정도 하지말고. 도와주거나 지켜주지 않아도 돼요.”
말이 쉽다. 내 마음은 구멍이 훵 뚫린것같이 아프고 허망한데, 말은 술술 잘도 나온다.
“너가 부르면…다시 올께.”
윤세준이 내 손에 쪽지를 하나 쥐어 주었다.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진 작은 쪽지.
나는 다시는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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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못 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나는 초라한 내 모습 그대로 눈부시게 화려한 결혼식장 구석에 숨은듯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민우석의 옆모습을 조심스레 훔쳐보기만 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윤기흐르는 생머리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민우석은 주위 그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윤세정과 민우진의 결혼식을 묵묵히 보고있었다.
건너편에는 가식적으로 나마 미소짓고있는 윤세준의 어머니와
그래도 못마땅한듯한 윤세준의 아버지가 보였다.
“신랑네 집안이 어떻다구? 영 모르는 사람들인데…”
“미국에서 사업한다잖아요. 신랑도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다던데… 윤회장이 어련하셨겠어요.”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어린애들을 결혼 시키는게…”
“그러게. 신부가 임신한거 아니야?”
호 호 호…
귀부인들도 저렇게 남얘기를 하면서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어 내시는구나…
그리고 민우석이 원하던게 저런거 였나.
윤세준의 도움은 그렇게 받기 싫어하더니 급기야 저렇게 비겁한 방법으로 민우진을 돕고 싶었나…
죽을뻔 했던 동생을 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을 내 던져 버리려고 했던 그가.
이제는 저런 모양으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한건가…
아니면 원래 저렇게 금새 사랑에 빠지고. 돈 많고 예쁜 저 여인을 그는 사랑하게 된건가…
“야. 넌 남의 결혼식에 오면서 그 꼴이 뭐니?”
누군가 내 팔꿈치를 툭 쳤다.
남의 결혼식에 와서 썬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녀는.
오래 전 만났던 채하연이었다.
벙쪄서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자. 언제 한번 연락해. 그렇잖아도 감독님이 널 한번 보자셨는데, 여기서 만날줄은 상상도 못했네.”
채하연이 명함을 한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채하연을 다시 올려 보니, 그녀는 다시 본채 만채 결혼식 꽃장식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어머…어머…저거 카사블랑카 릴리가 왠 만발이니? 너무 너무 예쁘다…”
결혼식이 한창인데, 그냥 나오려다가, 문득. 윤세준을 찾아 보았다.
그는 부모님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는데,
내가 돌아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바깥으로 나오자 그제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렇게 엉뚱하게 결혼식에 와 버린 이유는…그렇다…보고싶었던 민우석을 먼 발치에서나마 한번 보려고.
도저히 이렇게라도 안하면 영영 그를 볼수 없을것 같아서. 그래서 온것이었다.
내가 비참해 질것이라는걸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한번 더 보고싶었다.
그의 얼굴이 그립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나는 바보처럼 그 자리에 나타난것이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눈물이 가득 고여서 누군지 알아볼수는 없었지만,
손길 하나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누구인지 상관없었다.
나는 그때 어딘가 기대어 많이 울고싶었고..
그는 자신의 품을 나에게 빌려준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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