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후

“예지씨 오늘 스케줄 나왔어요.”
“화보촬영 하고나면. 오후는 좀 쉬고 싶은데..”
“미안해요..정말 힘들게 잡은 촬영 일정이라서. 오늘 만 조금 더 버텨요.”
“그렇게 버텨온게 벌써 사흘이쟎아..?”
“저희도 어쩔 수가 없어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만지고. 손톱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옆자리에는 채하연이 앉아 화장을 마무리 하고 있었는데.

“체력이 떨어지면. 너 일도. 인기도 떨어진다. 몰라? 열심히 일하는거. 감사하게 생각해라.”
“언니는. 지치지도 않아?”

“앞으로 몇년이나 더 청순가련역활 해 먹을거라고 생각해? 1년? 2년? 길어야 3,4년이야. 그 후론. 너같이 밍숭맹숭한 이미지. 확 갈아치우지 않으면 힘들껄? 그러니까 지금 열심히 하라고.”

늘 그렇듯이 채하연은 하고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대단해 언니.”

“뭐가?”

“하고 싶은말 다하고 살면서도 그렇게 잘 나가는거. 부럽다구.”
“너 뭘 모르는구나?”
“뭘?”
“너랑 나랑 왜 친해졌는지 알아? 너도 나랑 똑같애졌어, 기지배야.  촌스럽고 답답하던 너도. 지금은 많이 발전했다구.”

채하연이 화장과 머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입술이 세련되게 번들거렸고, 쫙 달라붙은 정장이 매끄러웠다.

나에게 훗. 미소를 보이더니 그녀는 내 거울 앞으로 명함을 하나 내려놓았다.
“너. 내가 남자친구 하나 소개시켜준다고 했던거 기억나?”
“됐어. 또 놀리려고?”
“오늘 저녁에. 꼭 만나자 그러더라. 오래 전부터 너 팬이라고.”
“전에도 그래놓고 우리끼리 노래방간거? 왜.  또 심심해 오늘?”
“아니야. 오늘 저녁은 꼭 나온다고 했어. 안 만나면. 후회할껄?”

“나 며칠 밤샌거 알면서 그래?”
“니 맘대로 해 그럼. 그 사람. 너 기다린다 그랬으니까.”

픽. 웃어넘겼다.
명함을 무심코 집어 들었는데.

윤. 세. 준.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정말 한번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루도 그때 당시의 아픔을 잊은적은 없지만.
맘껏 울게 내버려두던 그의 따뜻한 품속이 가끔씩 그리운것도 사실이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를 만나는게 두려웠다.

아니. 지난 3년간의 삶은 어쩌면 그때 민우석과 윤세준의 기억들을 잊으려는 나의 피나는 노력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나를. 만나자고. 오늘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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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분위기의 작은 식당이었다.
그를 그렇게 차갑게 내치고. 연락한번 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에게 할말이 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식당안에는 웨이터들만 줄줄이 서서 예를 차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았는데,
윤세준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피다가. 채하연이 또 나를 놀린것 같아,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문쪽으로 걸어가는데,

나보다 훨씬 더 놀란 그 사람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문앞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선…배님…?”

“붕어… 아니…”

순간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3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이제 여인이 된 나에게 붕어빵이란 말은 정말 생소하고 어울리지 않아서.
내가 웃는것을 보면서도. 윤세준은 아직 놀란듯 했다.

“저랑…만나자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하연언니가…”

“아… 하연이가…”

그럼 채 하연이 꾸민 일이란 말인가...?

그제야 윤세준이 어이없다는듯.. 웃었다.
그의 조용하고 침착한 미소는 3년전 그대로였다.

“어떻게 된거예요…”

“넌… 잘 지냈어?”
“선배님은요.”
“별로.”
“별로 라니요..?”

“예전하고 비슷해. 저기. 김비서 보이지?”
오랫만에 보는 김비서가 활짝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아…”

식당 직원들이 음식을 내오는 동안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채하연이 왜 이런일을 벌렸을까…

그가 물을 마시던 컵을 내려놓았고..

“일은… 어때?”
“그냥…일에 파묻혀 있는게 좋아요. 선배님은요?”

“나도. 파묻혀 있긴 한데…좋은지는 모르겠고.” 그가 훗..하고 웃었다.
“결혼은… 하셨어요?”
그는 말없이 다시 물을 마셨다.
했나? 결혼?
컵을 들은 그의 왼쪽 손가락. 조금 낡아 보이는 금반지가 눈에 띄였다.

“너도.. 결혼 해야지.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오늘. 하연언니가 남자친구 소개해 준다고 그랬는데. 유부남을 보냈나 봐요?”

윤세준이 내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이 여전했고,
다시 나는 불안해졌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등짝에 식은땀이 흐를정도로.

“세정씨랑. 우진씨는 잘 있나요?”
얼른 화제를 바꿔버렸다.

“외국에 나가있어. 아직 어리다고 유학 보내셨거든. 부모님이.”
“아…”
“우석이도. 잘 있다 그러더라.”

갑자기 음식이 목구멍에 콱 막혀버렸다.
기침을 하며 냅킨으로 입을 가리는데, 윤세준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을 들이켰다.

“괜찮아요.”
내가 이럴줄은. 나도 몰랐다. 
지난 일이라고 웃어 넘길만도할 정도의 긴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이렇게 주책을 떨지 누가 알았겠는가.
창피해서 윤세준을 똑바로 볼수도 없었다.

“천천히…먹어.”

“저… 그만 가야겠어요.”

지나간 아픔의 기억이 아직도 나에게 너무 벅찼던걸까.
그저 민우석의 이름 하나때문에 그런건 아니었는데.
윤세준을 만난 그날.  알수없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미안한 감정도 분명히 있었고. 민우석을 다시 내 기억속에 끌어들이기가 싫은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만에 봤는데도 변함없는 윤세준이.
사실은 너무 반가와서
떨리고 불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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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왔는데 채하연이 TV를 보며 내 소파에서 뒹굴고 있었다.

“언니. 무슨짓 한거야 대체. 윤선배도 놀라는 눈치던데.”
“저녁은 잘 먹었어?” 그녀는 아직도 TV 채널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냥.”

“그 사람이 뭐라 안 하든?”
“별로.”
“어떻든? 그 사람 보니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 사람 사는 꼴은 어떻든?”
“김비서가 아직도 그림자같이 붙어다니고.…결혼은 했나보던데.”

“결혼?”
채하연이 깔깔대고 웃었다.

“반지 끼고 있었어. 결혼했던 말던.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갑자기 채하연이 웃음을 싹 거뒀다. TV를 끄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사람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런 소리를 해?”

윤세준이 나한테…?

“무슨소리야.”

“이 맹추야.
그때 그 결혼식때. 내가 왜 니 옆에 앉아있었는지 알아?”

“결혼식? 무슨 결혼식?"

"세준씨 여동생. 윤세정이랑 민우진결혼식 말이다.”

민우석을 보며 혼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던 그 결혼식.
그때 내 꼴이 그게 뭐냐며 핀잔하던 기억속의 채하연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3년 후. 내 앞에 그 채하연이 웃고있었다.
“너가. 어떻게 배우가 됐는데. 빽도 없고 가진것도 없는 니가.
어떻게 이렇게 배우가 된건지. 그냥 니가 잘나서 그랬다고 생각했어?”

갑자기 입안에 침이 마르면서 온 몸이 굳어가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니지만… 언니한테…그리고 감독님께 늘 감사했어…”

그렇다.  지난 3년동안
정신없이 일에만 열중했던 나의 주위에 수없이 나타난 도움의 손길들이 생각났다.
처음부터 나에게 명함을 건내준 채 하연. 그리고 감독님.
그 다음으로 영화를 하자고 찾아온 감독도.
매니지먼트가 되주겠다고 찾아온 기획사도.
내가 찾아다니지 않고 부탁하지 않았는데 선뜻 나타났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기억이 났다.
흔히 신인이다. 막 뜨는 배우다 하면 기획사에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높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기도 하고. 불편한 자리에서 계약을 맺기도 하는데.
나는 그런 자리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윤세준이 3년전 나에게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생각났다.

‘너가, 다시 웃을수 있는 날이 오면. 그 때 사라질께.’

나는 그 날.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다.


“왜…”

“왜? 이제. 좀 감이 잡혀?”

“그걸 왜…이제서 말해? 언니는 항상 내 곁에 있었잖아.”

“못하게 했어. 세준씨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근데 이젠 내 속이 터져서 더 이상 못 보겠다. 
딴 때는 안그러는 사람이. 왜 너한테는 그렇게 답답하게 구는지.”

“몇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안 만났어. 그 사람도 날 잊었다고 생각했어.”

“너야 그랬지. 그 사람은 늘 너 주위에 있었어.”

“그럼. 왜…”

“왜긴 왜야. 그 사람 가족들이 너에게 줄 상처를 아니까 그랬지.”

 
내가 평탄한 배우의 길을 가도록.
그는 지난 세월, 말없이 내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민우석을 잃고 자포자기한 나에게 일을 주고. 상처를 이겨낼수있는 생활로 이끌어주고.
내가 진심으로 하고싶었던 연기의 꿈을 이룰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곳에서 끊임없이 나를 돕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윤세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