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주 천천히..돌아서며 나를 보았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고,
오히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나의 독한 말들보다
가지 말라는 내 말에 더 많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힘들게 나를 보았다.

“미안해요…못되게 굴어서. 만날때마다 상처만 주고. 못된소리만 해서..
저랑 같이 있으면. 선배님만 더 힘들어질까봐, 겁이나서 그랬어요.”

“너야말로. 나하고 같이 있으면 힘들어질거야.”

“저 우는거. 보기싫다고 하셨죠? 선배님 혼자 돌아서는 뒷모습, 저도 이제 보고싶지 않아요.”

윤세준이 이렇게 고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다가오지도, 또 돌아서지도 못하고
나의 젖어가는 눈동자만 똑바로 보고 서있었다.

한참이 지난후에야 그는 차마 만지지 못하던 나의 옆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내렸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만큼 훨씬 전부터.
김비서가 말해주기 전에도
나는 알고있었던것 같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민우석과 함께 있을땐 물론 마음에 두지 않았던 느낌이었고.
또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을땐 이미 그가 너무 높았고, 또 멀어져 있었다.
내가 가장 힘들때마다. 지치고 억울할때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준 윤세준에게
나도 기대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다고 늘 내 마음을 부정하는데 적응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더 못되게 굴고 잔인한 말을 퍼부었던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인정을 해야할것 같다.
이 사람에게 기대고 싶다.

다가가 그의 품에 내 몸을 맡기자,
그는 긴 한숨을 쉬며 내 등을 감싸주었다.
그 순간 만큼은.

앞으로 다가올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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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달쯤 후에..

촬영지가 바닷가라서,
모두 여행온 사람들처럼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무슨 광고촬영이 꼭 영화같다.”
매니저가 섭외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둘러보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게. 야…한 예지가 잘나가긴 잘 나가나보다..”
함께 온 남자배우가 나를 보며 싱긋 웃는데..

눈길을 돌려 먼 파도를 보았다.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화창한 날에도 사무실에서 그 지겨운 일들을 묵묵히 하고있을.
윤세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몇년전. 그렇게 민우석을 위해서 집으로 돌아간후
일에 노예가 된 사람처럼 끌려다니던 윤세준이
틈이 날때마다 – 아니, 틈이 나지 않아도 내가 힘들다면, 위험하다면 달려와서 도와줬던
소소한 사건들을 이제는 채하연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그와 이런 바닷가에 한번 와보고 싶다…
그런 시간이 올까. 그와 이런 바닷가를 편안히 거닐수 있는 날이.
혼자 고개를 설레설레 내 저었다.  너무 높고 너무 멀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 날 헤어진 이후 거의 한달이 지나도록 만날수가 없었다.
내가 바쁘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촬영이 시작되고,
보트에 올라탔다.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하고, 옷을 몇번이나 갈아입고
한참을 바람을 타고 나부끼니,
조금씩 기침이 나왔다.
5분 쉬고 다시 촬영하자는 감독님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상대 배우가 챙겨준다고 조각이불을 가져왔다.
“추워? 야. 이제 반도 안 끝났어. 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끝내야 하는데 너 어디 아프냐?”
“아뇨.…”
“좀 창백한데?”
“괜찮아요.”

그가 잠시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너. 요즘 잘 나가더라?”

어색하게 웃고 고개를 숙였다.
왠지 다른 연예인들과 어울리는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채 하연과 그녀 주위의 몇몇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상대배우들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연기는 열정적으로 하는데, 실제 성격은 쑥맥이라더니. 그 소문이 맞나보네?”
그의 눈길이 왠지 신경이 쓰였고,
그저 빨리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만 기다리는데,

“자. 이거 마셔라. 내 매니저가 늘 챙겨주는 차야. 목이 매끄러워지거든.”
“괜찮아요.”
“튕기지 말고. 마셔.”
“저…차는 잘 안 마셔요.”
“선배가 주는데 왜 말이 그렇게 많냐?”

마지못해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아들었다.
그가 웃으며 나를 보는것이 점점 더 불편하게만 느껴졌는데,
컵을 내려놓자, 그가 씩 웃었다.

“왜 그러세요?”
“너, 나랑 지금 간접키스 한거 아냐?”
“네?”
“하하…농담이야. 조금있다 우리 키스씬있는데, 여기서 우리 연습할까?”

스태프들이 모두 해변가 쪽에 있었다.
보트에는 남자배우와 나뿐이었고 나머지 촬영팀도 가까이 다른 배에 타고있었는데.

“짖궂으시네요. 조금 촌스럽기도 하고.”
“뭐? 촌스럽다고?”

“키스씬이 별거라고. 연습을 해요?”

그를 피해 멀리 떨어져 앉았다.
멀리라고 해봤자 몇발자욱 차이였지만.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날 촬영을 마치자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었다.
근처의 작은 모텔에서 짐을 풀고 다음날 화보 촬영을 준비하러 로비에서 메이크업하는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예지.”

“어머. 혁진씨. 옷갈아 입으시니까 더 잘생기셨어요?”
언니가 좋아 죽는다.
최 혁진. 그는 당시 아주 잘 나가던 배우였고, 또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기도 했다.

“김코디는, 얘기 다 했으면 자리 좀.. 비켜줄래요?”
메이크업 언니는 좀 놀란듯, 나를 돌아보는데,

“언니랑 얘기 아직 다 안 했는데요.”
“아니야, 얘. 다 됐어. 혁진씨랑…얘기 해 그럼. 나 갈께.”

그녀가 웃으며 나를 살짝 째려본다. ‘잘 해봐’ 라고 입술을 움직이는데,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할말없는데. 선배님은. 하실 말씀 있으세요?”
“너. 볼수록 하는짓이 가관이다?”

“…제가. 뭐 실수했나요.”
“니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아직 새발에 피야. 몰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실례할께요.”
지나쳐 가는 나의 팔을 그가 세게 붙잡아 끌었다.

“어디서 건방을 떨어?”
이런일을 처음 겪는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늘 곁에서 나를 도와주던 매니저가.
오늘따라 보이질 않았다.

새로 온 코디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더니, 경치좋은 바닷가로 둘이 데이트라도 나간 모양인지…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그래요.”
“죄송한거 알면. 순순히 따라 나오지?”
그는 아직도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하게도 우리 둘뿐이었다.
있는 힘껏 그의 팔을 뿌리쳤으나,
나는 그를 당해낼 힘이 없었다.

“나 나쁜사람 아니야. 후배 교육좀 시킬라는데 너 왜 이렇게 뻣뻣하게 이러냐?”
잘생긴 사람이었다.
무척이나 반듯하고 고운 이미지에, 기계로 박아놓은듯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며 그는 웃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어?”
“싫은데요.”
“왜. 너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 손 놔라.”

어디선가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원해서.
급하니까 헛소리가 들리는건가?

최 혁진이.
순간 귀신을 본 사람처럼 창백해졌고.
나도 설마해서 뒤를 돌아보니,

윤세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최혁진을 보고있었다.
그 뒤에는 김비서가 한심하다는듯 최혁진을 노려보았고.

“윤세준… 너가 여길 어떻게 왔냐…?”
“니가 혼자 쑈 한다길래 구경 좀 하러왔지.”
“뭐? 누가 그런 소릴 해?”

“다 내 보냈다며. 매니저들이랑. 스태프들 모두 대접한다고 내 보내고 너만 여기로 들어왔다던데?”
“너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
“얘기 했잖아. 너 구경하러 왔다고.”
“미친놈. 재수없기는 여전해서..”

“한예지씨. 제가 모시겠습니다.”
김비서가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김비서가 나의 어깨를 조심스레 밀어냈고,

최혁진과 윤세준은 아직도 서서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어떻게…오셨어요, 김비서님이?”
“매니저 자식. 대체 생각이 있는자식인지!”
“왜요? 어떻게 된거예요?”
“그 자식이 새로온 코디한테 홀려가지고는.  채하연씨가 연락 안해줬으면. 큰일날뻔 했잖아요.”
“언니가 무슨 연락을 했는데요?”

“최혁진. 저 자식. 드러운 소문이 자자한데, 
저자식이랑 스케줄 잡지 못하게 지금까지 미뤄온게 한두번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 – 그니까 저번에 한예지씨가 찾아온 날부터.
도련님이 갑자기…매니저한테 연락을 끊으시더라구요.
근데 저 매니저 자식이… 그런 놈이 아니었는데 요사이 돈에 눈이 멀고 정신이 홀려가지고는. 
다행히 하연씨가 이번 촬영얘기 알려줬고.
최혁진 이름만 듣고 여기까지 인정사정없이 달려왔어요. 내 이럴줄 알았다니까.”

내 매니저에게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는것은.
나에게서 이제 사라져 주겠다는 의미였을까. 이제.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선배님이랑…최혁진, 두분이…원래 아는 사이 같던데요?”
“집안끼리 친하죠. 그러니까 저 개 망나니같은 자식이 연예계에서 판을 치고 다니는 것이고.”

“윤세준선배님…회사에서 곧장 오신거예요?”
“일도 마치기 전에 오셨죠... 더구나 매니저랑 연락이 안돼니까 걱정이 되셔서…”
“이렇게 멀리까지 오신걸 알면…곤란해 지실텐데…”
“아시긴 잘도 아시네요.”

뒤를 돌아 윤세준과 최혁진을 다시 보았다.
윤세준은 늘 그렇듯이 침착한 표정이었고.
최혁진은 사나운 사냥개가 으르렁대듯이.
꼭 곧 달려들어 물어뜯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 어!” 김비서가 화들짝 놀라며 윤세준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는데,
역시 보디가드로 닦은 실력 덕분인지 김비서는 주먹질이 오가기도 전에 먼저 알아채고 뛰었다.

최혁진이 윤세준의 목덜미를 잡아 벽으로 세게 밀어쳤는데,
곧 김비서가 최혁진을 뜯어 내 던져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최혁진이 분을 못참고 씩씩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래도 쪽팔렸는지 벌떡 일어나 부르르 떨며 반대쪽으로 걸어 나갔다.

나도 윤세준에게 뛰어갔다.

“선배님. 괜찮아요?”

윤세준이 마른기침을 몇번하더니 양복을 바로 챙겨 입었다.

“들어가. 쉬어.”
윤세준이 냉정하게 한마디 하더니, 나에게서 돌아섰다.
김비서도 어쩔줄을 모르고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는데.

“가실거예요?”

그의 가는 뒷모습에 대고 소리치는데,
잠시 망설임도 없이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김비서도 머뭇거리다 나를 안쓰럽게 보더니 따라 나섰고.

뛰어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가시면…. 안돼요?”

윤세준이 나를 묵묵히 돌아보는데,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뇌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뒤에서 껴안았을 때처럼.

“저랑…잠깐만 바다 구경하고 가면… 안돼나요?”

윤세준은 나에게 냉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빠져들면, 그의 가족과 엮이기 시작하면
엄청난 상처를 받고 힘들어질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저랑 있어주시면. 안돼요?”
내가 미쳤나보다. 
그의 상황을 알면서. 그리고 내가 감히 누구라고 이렇게 철없이 매달린단 말인가.
제대로 내려야 할 판단의 기준이 모두 흐려지고, 그를 붙잡고 싶은 심정을 웬지 다스릴수가 없었다.

“김비서. 모셔다 드려. 밖에서 기다릴테니까.”
윤세준이 나를 지나쳐 걸어나갔다.

힘이 빠지고 실망스러워서 눈물이 나오려고했다.
그렇게 내치고 잔인하게 대하다가 이제와서 내가 매달리니.
그는 나에게 질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내가 상처를 입을것이 뻔하니까. 겁이나서.
내가 그랬듯이 그도 두려워서 그런걸까…

김비서가 말없이 나를 방으로 인도했다.
눈물맺힌 눈가를 얼른 훔치고 김비서를 잠시 돌아봤는데,

“제가… 올라가면 안돼는 나무를…쳐다 보는거죠?
그래서 피하시는거죠? 아니면. 제가 싫어져서 그런건가요?”

“그런게 아니란거. 한예지씨도 아시잖아요. 회장님이랑 사모님을 만나보시고도 그런소리를 하십니까?”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하셨데요? 책임지지도 못할거면서, 왜 나를 이렇게 도와줬는데요?”
“그건… 사람마음이란. 어쩔수 없는거 아닙니까. 한예지씨가 행복해지기만 바라셨는데.
에이. 그러니까 빨리 좋은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게 도련님께 보답하는거예요.”

“그럼 선배님은요. 선배님은 언제 행복해 지실건데요?”
“내말이요. 휴….가보겠습니다. 놀라셨을텐데 푹 쉬세요. 전 가서 그 매니저 자식을 혼내줘야 하거든요.”
김비서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문을 닫았다.

모텔방에 앉아서 화려한 내 의상들과 구두들을 맥없이 둘러보았다.
너무나 허무해서 마음이 쓰렸다.
윤세준을
차라리 그냥 편하게 보내줄껄…
나에게 상처주기 싫어서 가까이 오지 못하는 그 사람을.
붙잡으면 안돼는건데…
그래도 내가 위기에 처할까봐 그 먼길을 와준 사람을…
그냥.. 편하게 보내줄껄…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마음이 쓰리고. 그 사람이 안쓰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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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늦잠을 잤나, 싶어 서둘러 씻고 준비를 하는데,
똑똑…
하고 노크소리가 들렸다.
조금 불안한 생각이 들어 쇠고리를 채워놓은채 문을 슬며시 열었는데,

뒤로 자빠지는줄 알았다.
너무 놀라서 숨이 멎는것 같았다.

“잘 잤어, 붕어빵?”
“뭐…하시는거예요…? 어제…안 가셨어요?”
“놀러가자며.”
그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뛰고 설레여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이 문좀… 열어주지?”

몇년만에 처음으로 그가 편한 옷을 입고있었다.
처음에 만났을때 거지인줄 알았을 정도로 그는 편한옷을 좋아하는데.
늘 양복을 입고 지난 몇년을 보냈을 윤세준이.
그날만큼은 편안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있었다.

식당에서 예쁘게 차려나오는 아침을 먹고
그와 조용한 해변가를 걸었다.

“어쩌자고… 안가셨어요…”
“그러게. 내가 어쩌려고 이러나..?”
“마음이…바뀌신 거예요?”
“마음은 항상 이랬는데.”

꼭 학교 땡땡이 치고 놀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돼는줄 알면서도 흥분되고 설레이는…

“아 참..저…촬영가야 되는데….”
“취소됐어. 최혁진이가 펑크내고 사라졌다고 못들었어?"
“아니, 왜요?”
“어릴때 부터. 나한테 빚진게 많은 놈이거든.”
“그럼 선배님이 보내신거예요?”
“너가 놀자며. 촬영있으면 못 놀잖아.”

알고지낸지는 몇년인데.
이렇게 마주보고 웃어본것은.
처음이었다.

“그런자식이랑…일하지 마.”
“몰랐어요. 전 그냥 매니저가 해주는데로…”
“상대배우. 스태프나 감독, 다 봐가면서 해. 좋은사람들도 많으니까, 될수있으면 잘 알아보고”

잠시 그를 보고 웃었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마음껏 잔소리도 해주는 그를 보니 고마와서 웃음이 나왔다.

“같이…와보고 싶었어요.”
멀리 파도치는 바다를 보는 그의 표정도. 편안해 보였다.

“어제 촬영하면서 선배님이랑 바다 보고싶다고 생각했는데…이렇게 현실이 될줄은 몰랐어요.”

윤세준이 나를 돌아보았다.
“너가 진짜로 웃는거. 처음 본다.”
“선배님두요. 저도 선배님 진짜로 웃는거. 처음 봐요.”

그가 웃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스웨터를 내 어깨에 둘러줬는데,
그의 손을 잡고,
아주 잽싸게 그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그가 놀라서 어쩔줄을 모르는 모습이,
우스워서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예전, 종점에 이르기까지 버스안에서 펑펑 울던 그 날처럼, 우리는 뛰었다.
우리의 아픈 과거도.
넘어가야할 현실의 역경이나 어려움도
모두 훨훨 털어버리려는듯.
우리는 뛰고 또 뛰었다.

모래사장에 철퍼덕 주저 앉아 지친 그를 쳐다 보았다.
땀을 흘리며 웃는 그의 옆모습이.
예전에 그랬듯이 조각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애처롭고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같았다.

“이제…어쩌실거예요…?”
윤세준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가. 선배님을 사랑하면. 어쩌실 거냐구요.”
“지금 협박하는거야?”

그의 듬직한 어께에 고개를 기대보았다.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서 초콜렛을 먹는것같이 그 순간이 달콤했다.

“…나하고 같이 살래?”

깜짝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보았다.

“힘들어도. 나랑 있을수 있어?”

“지금…청혼하시는 거예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너랑 나랑 여자친구, 남자친구. 하자 그럴줄 알았어?”
“그래도…좀 더 사귀어 보고…”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런걸 물어보는게 어디있어요? 이제 겨우 처음 데이트하는데.”

“전쟁에 나가려면. 그 정도 약속은 하고가야지.”
“전쟁…이요?”

“너가 상처받지 않을거라고…약속은 못해.”
“선배님만 제 곁에 계신다면. 괜찮아요.”
“너무 힘들어지면. 떠나도 좋아...”

“그런건 사랑이 아니예요. 전쟁이든. 시련이든. 같이 이겨나가는게 사랑이잖아요.”
“전쟁에서도. 부상을 당하면 집으로 보내주잖아.”
“집이 여기 있는데 어디로 보내준다는 거예요?”
그의 심장에 내 손을 슬며시 가져다 댔다.

“여기가… 이제 제 집이라구요.”

그와 나의 눈동자가 떨어질수 없는 엄청난 힘에 끌려 서로를 빨아들이고 있었고
그의 심장의 고동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와 시간을 조용히 멈추게 만들었다.
파도도 춤을 추다가 공중에 멈춰 서 있었고,
신나게 불어오던 바람도 조용히 사라진듯 했다.

내가 조용히 눈을 감고 그에게 다가가자
그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숨결과 나의 입술이 만나는 순간.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준다고 했던가.
나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 사람만 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을것이라. 흔들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윤세준과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많이 웃고 많이 떠들고,
다른사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 채 먹고 싶은걸 사먹고, 하고싶은 얘기를 하고,
예쁜 상점에서 사고싶은것을 사기도 하고, 가고 싶은곳에 가보았다.
이 하루가 지나면 어떤일이 닥치게 될지. 상관하지 않고 미리 겁먹지 않으면서
그저 서로의 존재가 고맙고 소중해서
일분 일초를 아끼며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석양이 질때까지 바닷가에서 그의 품안에 안겨 나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