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잠이 깨지 않았으면…바랬는데
그러나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고,
나는 침대에서 깨어났다.
꿈이었나?
어제 있었던 일은 꿈이었을까?
그가 잠에취해 헤롱헤롱하는 나를 업어 방까지 데려다 주고 침대에 눕혀준 기억이 가물가물 살아났다.
그와 함께 있는 아까운 시간에 잠이 들어버린 나의 느긋함이 원망스러웠다.
그 사람이 언제. 어디로 갔는지도 못보고..
서둘러 일어나 옷을 챙기고 바깥으로 나가보니,
매니저가 내쪽으로 엉거주춤 다가오고 있었는데,

“예지씨…일어났어요?”
“어떻게 된거예요?”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최혁진일은… 다시는 그런식으로 일하지 않겠습니다. 잘 알아보고”
“윤세준씨 어디갔냐구!”

“에?”
“윤세준씨…못봤어?”
“세준형…여기 왔었어요?”
“그래요. 어제, 여기 있었어.”
“아…그래서 김비서가…”
“김비서가 뭐요?”
“어제 내내 세준형 땜에 걱정이라고…”
“왜…”
“김비서 걸리면 짤릴까봐 그저께 저녁 한밤중에 김비서도 모르게 사라지셨데요…”
“그럼…집까지 갔다가 한밤중에 여길 다시 왔단 말이야?”
“그런가봐요. 김비서도 여길거라고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그래서 어제 밤에 모셔갔나부죠..”
“어제 밤에 김비서가 여길 왔었다고?”
“어제 밤늦게, 저랑 같이 있었는데, 갑자기 회장님이 세준형 찾으신다고, 김비서가 서둘러 나갔어요.”

심장이 떨렸다. 그 사람이 몹시 보고싶었고. 또 많이 걱정이 됐다.

“짐 챙기세요 예지씨. 오늘 스케쥴 비워놨거든요.”
“나…그 사람 보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예지씨…진정하세요. 당분간 만나는거 힘들거라고, 김비서가 그랬어요.”
“나…세준씨.. 만나야 돼.”
“우선 서울로 가자구요.”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채하연이 흥분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야! 넌 왜 전화를 안 받아!”
들어오자 마자 회사 직원이 매니저를 먼저 나무랬고,

“왜..그래요?”
다들 한숨을 쉬고, 내 눈길을 피하려 하는 눈치였다.

“무슨일이야 언니?”
“무슨일이 아니고. 큰 일이야 이것아. 큰일.”

“왜?”

“이거 봐.”

아침 신문 연예기사에 대문짝만하게 내 사진이 보였다.

“최혁진 그자식이. 드디어 돌았나봐.”
“최혁진?”
“그래. 그 놈이 퍼뜨린거 같애. 너랑 사귄다고.”

“정말 누구 말처럼 쑈를 하네 그사람…”
“촬영 취소됐다며, 넌 왜 어제 집으로 안왔어?”
“바닷가에서…하루 쉬었어.”

“쉬어? 너 혼자?”
“아니…”
“너…혹시… 어쩌려구 그래?..아니. 너도 너지만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니구나…”
“어떻게하면…만날수 있을까. 언니, 나 그사람 만나야돼.”

“어제 하루종일 사라졌다면, 벌써 사모님이 난리가 나셨을거야. 김비서는 괜찮나 모르겠네.”
“혼자 왔었어..”
“넌. 그사람 상황 알면서 그냥 붙잡고 있었어?”
“그러고 싶었어…”

“좀 더 생각을 깊게 했었어야지!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렇게 갑자기! 더구나 지금 최혁진이 저 난리인데…천천히 해도 돼잖아. 좀 더 기반을 잡아놓고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할수도 있잖아…!”
“기다린다고 뭐가 달라져. 그 사람 오래 기다려온거. 언니는 알잖아.  언니 만큼은…제발 우리 편이 돼줘…제발.”
채하연이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돼? 세준씨. 어디있을까?”
“정신차려 한예지! 넌 지금 스캔들이나 걱정해!”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져?”
“우선. 최혁진을 만나보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조용한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한예지씨만. 만나시길 원하십니다.”
채하연이 기가막힌듯. 기분나쁜듯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 언니. 금방 나올께.”
“간사한 녀석이야. 마음 단단히 해.”

“최혁진씨.”
문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와 앉지?”

한숨을 쉬고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왜 이러세요. 유치하게.”
“첫인사가 뭐 그러냐?”
“저랑 사귀신다면서요? 전 몰랐는데 세상이 다 알고있네요?”
“감동은 안 받았냐? 내가 널 사귄다면. 넌 횡재한거 아니야?”
“도데체 왜 이러는지. 어떻게 하면 그만둘건지. 그 얘기나 해요.”

“너 세준이… 좋아하냐…?”
“무슨소리가 하고싶어요. 그게 당신이랑 무슨상관인데요?”

“세준이 그 새끼. 내 죽마고우야. 유치원때부터 쭉.. 같은 학교 다녔다구. 알어?”
“그래서요.”

“내가 그 집안 내력을 훤히 아는데…니가 아무리 그 자식을 좋아해도. 소용없다구.”
“무슨 소리 하는거예요.”

“우리 엄마 아빠? 물론. 나를 예뻐하시지는 않아. 그래도 자식 넷에 다들 성공했으니까. 나는 포기하셨거든. 내가 쪽팔리는짓만 안하면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개방적이시고 밀어주시는 편이야. 내가 뭐. 나쁜짓 하고 다니는것도 아니고. 안그래?”
“나쁜짓. 하는거 맞잖아요. 왜 있지도 않은 얘기 만들어서”

“다 너를 위해서야.”
“뭐라구요?”
“너를 윤세준의 집구석에서 구해내려는 나의 넓은 아량이라구.”
기가막혀서 말은 나오지 않았고 그저 그를 노려볼수밖에 없었다.

“윤세준은. 그 집안에 유일한 아들이지. 회장님 사모님. 두분다 윤세준 하나에 목숨거시는 분들이야. 세정이도 별 볼일없는 애랑 결혼했다고, 사모님이 얼마나 분통해하시는지 알아? 윤세준이 가출했다가 돌아온 이후로. 하루도. 단 하루도 부모님의 감시를 떠나본적이 없어. 내가 만나러 가도 집에서나 회사에서 아니면 못만났다고. 가출한지 3년. 집에 들어간지 3년. 그 3년간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그 자식 주말에도 단 한번 못쉬게 했어. 그렇게 철저하고 잔인하고 인정머리없는 사람들이라고, 그 식구들이. 보수적이긴 또 얼마나 보수적이야? 따질건 다 따지고. 모자라는 사람들은 무시하고…너 같은 기집애. 절대로 며느리 안삼으셔. 알아?”

“고맙네요. 그렇게 까지 생각해주셔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모르는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듣고보니 더 가슴이 미어졌다.

“난 니가 맘에 들어.”

물컵을 그의 반반한 얼굴에 쏟아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거라면. 윤세준같이 답답한 자식 잊고 나랑 사귀는건 어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말을 섞거나 시간을 낭비할 가치나 이유가 없었다.

“잘 생각해라. 너. 여기서 이렇게 나가버리면 뒷일은 내가 책임 못지거든.”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전 더 이상 잃을것도, 원하는것도 없으니까.”
“너랑 결혼한다고 발표할거야.”
“미쳤군요.”
“그럼 윤세준 부모님이 어떠실까? 별로 가진것도 없는 배우에다가. 거기다 나랑 결혼할뻔 했던 여자애라고… 시나리오가 완전 들어맞잖아? 팔자고치려고 재벌집 아들 노리는 꽃뱀?”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데 채하연이 박차고 들어왔다.

“야 이 미친새끼야.”
“어? 이건 또 뭐야? 채하연이 여긴 왠일?”
“내 동생같은 애야. 너 말 조심해.”
“내가 뭘? 간만에 좋은일좀 할라그랬드니.
내가 기사 내는게 맘에 안들면, 세준이한테 직접 한번 와보라고 해라.
와서 나한테 바닷가에서 있었던일. 무릎꿇고 사과하고. 비굴하게 한번 빌어보라고 해.

아…. 힘들겠구나. 엄마아빠한테 허락받고 나와야 하니까.”

채하연이 물컵을 들어 그의 머리에 뿌려치고 돌아섰다.

“가자. 더이상 낭비할 시간도 없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한동안은 기가막히고 화가나서 뭐라고 말을 할 정신도 없었다.


“언니. 어떻게 하지… 정말 최혁진이”
“한다면 할 놈이야. 어떻게든 막아봐야지. 결혼설까지 갔다가 깨지면…  어?”
채하연이 말을 하다말고 놀라 손을 가리킨다.

차에서 서둘러 내려 뛰어갔는데,

“선배님!”
윤세준이 집앞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니.
나도 바보같이 안도의 한숨과 미소만 흘러나왔다.

채하연이 기가막히고 황당하다는듯,
“얼씨구…둘이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구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렇게 실실 쪼개고 있어?”

“잘 있었냐, 하연아.”
“지금 최혁진이랑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 놈. 완전 돌았던데.”
“뭣하러 만나 그 자식을...”

“결혼설까지 퍼뜨리겠데.”
“아이디어 하고는...”
“예지한테 타격이 클거야. 세준씨 부모님이 들으시면… 어쩌지?”
휴…어디서 거지같은게 굴러들어와서는 가뜩이나 복잡한데…”

"너무 걱정하지마."
"세준씨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처지야?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거야?"
"그런가.."


윤세준이 채하연을 보고 웃더니 곧 나에게로 눈을 돌렸다.
“나랑…잠깐 어디 좀 갈까?”
“어딜…간다는 거예요…?”

“전쟁터.”


채하연에게 인사를 한후 차를 타고 문을 닫는데.

“도련님 참…정말 각오는 하시고 이러시는겁니까?”
김비서가 나와 윤세준을 돌아보며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윤세준은 자리에 앉자 지친듯. 눈을 감았다.

“김비서님,… 회장님이랑 사모님은…어떠신가요. 선배님이 괜찮으시겠어요?”

“자기 자식인데. 죽이지는 않겠죠.”
“네?”

백미러로 김비서가 나를 힐끔 보더니, 창백해진 내가 좀 안됐는지,

“아니, 그냥 그렇단 소립니다.”

“인천으로 먼저 가.”
“도련님! 회장님이…”
“더 늦기전에 차 돌려.”

윤세준을 돌아보았다.
“선배님…”
“너희 아버님…뭐 좋아하시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장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마침 가게를 정리하고 계셨다.
“아빠!”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얼굴이 환해지시며 활짝 웃으셨는데,

“예지야!”

아버지가 나의 손을 부둥켜 안고 웃으시다가, 윤세준을 의식하고 그를 보셨다.

윤세준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어쩔줄 모르시며 나를 잠시 쳐다 보시더니,
“들어가자. 집으로 우선 가자.”

방안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윤세준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지는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셨다.
“오랫만이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놀라 아버지와 윤세준을 번갈아 보았다.
“두분이..만나셨어요?”

아버지가 조금 편안해지신 표정으로 윤세준을 지그시 주시하셨다.
“두어번 찾아왔었지. 이 친구가.”
“왜…요?”
아버지가 긴 한숨을 쉬셨다.
“이 친구 어머님이 날 찾아왔었거든. 몇년전에.”

몇년전이라면. 내가 쑈를 하고 그의 집에서 연기를 했을때를 말씀하시는것 같았다.
그때 그 일로 우리 아버지까지 만나셨다니…

“아빠…왜 저한테는..말씀 안하셨어요.”
“헤어졌는줄 알았지. 내 이사람 어머님께도 그렇게 전했고.”
“아빠. 저. 이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예지야. 이 친구는, 그리고 이 친구 부모님이…”
“허락해주세요.”

아버지가 윤세준에게로 눈길을 돌리셨다.

“예지가…행복하게 잘 살수 있도록. 제가 할수있는건 다 하려고 합니다.”

“나야…가진것 없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니까 뭐 할말이 있겠나 만은…
자네같이 부담스러운 사위는…바라지 않았는데.”
“아빠…”

“우리 예지…맘 고생 많이 하고 자란 아이라서. 결혼은 편안하고 좋은 집안에 보내고 싶었어. 더구나 에미없이 자라서. 딸같이 아껴주는 시어미 잘만나는거.. 내가 젤 원했던거야…”

윤세준이 고개를 숙였다.

“아빠…허락해 주세요. 정말…좋은 사람이예요. 지금까지 저 도와주고. 지켜줬어요. 이 사람 아니었으면…”
말이 나오고 보니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예전 유치장에 갖힌 내 모습을 아버지가 보셨을테고,
민우석을 그렇게 잃고 자포자기해서 내가 어떻게 됬을지 나도 모를일이었고,
배우생활을 한다고 빽도 없고 가진것도 없는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그 또한 알수 없는 일이었다.

“저…이 사람 사랑해요.”
아버지가 긴 한숨을 몰아 쉬셨다.

“자네 부모님이 우리 예지를 예쁘다 받아 주시겠나?”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겠지?”
“쉬울거라고…거짓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부모마음은 다 같은것이네…나라도 우리보다 못난사람이 예지 데려간다면…쉽사리 내주고 싶지 않을텐데…”

“그러니까…아빠는 저희편이 되주세요… 저희 잘 살라고. 축복해 주세요…”
“나에게는. 천하보다 귀한 딸이네…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귀한 딸이야…”
“귀하게 여기고…아껴주겠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둘이 좋다니…나는 할말이 없네.
나도 끝까지 반대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예지가 이렇게 원하니,
자네가 잘 해보게. 시부모와 사이 갈라지지 않도록. 자네한테 달렸다고 생각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버지와 헤어지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아버지의 순진하신 믿음과 바램이…못내 가슴이 아팠다.

“부럽네…”
“네…?”
“아버님이…정말 널 사랑하시는게 보여.”
윤세준이 나를 보며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도련님. 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 있어요.”
윤세준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것 같더니..
“예지는. 집에 가라.”
“무슨소리예요. 전쟁터에 같이 가야지.”
“상황보고. 내가 데릴러 올께.”
“싫어요. 선배님 혼자 안 보내요.”

“오늘은 쉬고 다음에”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못 만날것만 같아요. 절대로. 혼자 안가요.”

“도련님. 시간이 없습니다.”
“가요 김비서님. 어서 서두르세요.”
내가 대신 대답을 하고,
윤세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걱정말아요. 이제부터 같이 이겨나가야죠. 같이 살자 면서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차장 문이 열리자 인기척이 없었다.
저녁 9시가 다 된 시간이는데, 집안에 불빛이 훤했지만
윤세준이 도착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부터 분위기가 살벌하네요…” 김비서가 문을 열며 말했다.

윤세준이 잠시 나를 물끄러미 돌아보는데,
표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손에 땀이 맺혔다.

“예지야.”
“네?”
“너를 그냥 보내주기엔. 이제 너무 늦었지..?”
“늦은지가 언젠데요.”

윤세준이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회장님과 사모님이 거실 앞에 서서 기다리시는 모습이 보였다.
두분의 살벌한 분노의 표정을 보자,
잔뜩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도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하는지. 내 손은 어떤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온통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윤세준이 조심스럽게 나를 뒤로 밀어내고 두분 앞으로 걸어갔는데.

철썩!

한대로는 분이 안차셨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윤세준에게
그의 아버지는 다시 한번 더 세게. 더 무자비한 손길을 휘두르셨다.

거실이 워낙 넓은데다 바닥이 온통 대리석으로 되어있어
소리가 쩌렁 쩌렁 울렸다.
반면, 그분의 거친 숨소리가 다 들릴정도로 고요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아버지는 입을 여셨다.
“들어오라고 한게 언젠데 이제서 와.”
좀전의 행동과 딴판으로 무척이나 침착한 목소리였는데.

“죄송합니다.”

“회사를 이틀이나 비워놓고 뭘하고 돌아다닌거야.”

“아버지. 예지. 기억하시죠.”
윤세준이 고개를 들었다.

“너하고 할얘기 있으니까 당장 내보내고 다시 들어와.”

“내보내시면. 저도 같이 나가겠습니다.”

“뭐?” 회장님의 눈길이 시퍼렇다 싶을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받아주시면… 예지만 받아주시면, 아버지가 시키시는데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니가 지금 무슨짓을 하고있는지 알아?” 
무겁고 조용한 회장님의 목소리가
보통 사람들이 소리지르며 성질내는 호통소리보다 엄하게 느껴졌다.

“저를. 한번만 믿어주세요 아버지.”

“믿어줘?”

“지난 삼년간. 무조건 복종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겠다고 지금 약속 드리는겁니다.
늘 제가 다시 사라질까봐 불안해 하셨죠.  다른 생각할까봐 더 잡아 두신거, 알고 있습니다.
이제 어떤일을 시키셔도 다 하겠습니다.
예지만. 받아주세요.”

“그래도. 못 받아주겠다면.”

윤세준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떻게 할건데? 자식이. 부모뜻을 받드는것이 당연한거지.
지 말을 들어줘야 시키는데로 한다는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윤세준의 어머니가 발걸음을 옮겨 회장님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물론 세준이 너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제대로 살아보겠다는건. 아주 잘 생각한거야.
너가 해야할 일이 그리고 배울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지난 삼년간 훈련 받은것으로는, 너 아직 빚을 다 갚은게 아니야.
그때 약속 했잖니. 빚 다 갚을때까지 시키는데로 하겠다고.
근데 저 따위 여자애를 데리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런 협박질이니?
니가 가출이라도 다시 하겠다는 거야?”

“그런 생각이면 당장 나가라.”
“여보!”

“나가. 너같은 자식 필요없으니까. 나가버려.”

내가
그를 그냥 놔주고 싶을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를 붙잡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아도 되는데…

윤세준이 돌아섰다.
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것을
조용히 보고있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선배님!”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나를 끌어 밖으로 나갔다.

“이러면, 안돼요! 이렇게 나가면 안돼요, 선배님!”

윤세준은 말없이 걸었다.
대문앞에 도착했는데,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안돼요!”

“나도 안돼.”

“…뭐가…안됀다는 거예요.”

“더 이상 널 그렇게 세워두고 싶지 않았어.”

“그게 어때서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잠시. 휴전하는거야. 오늘은 싸울만큼 싸웠으니까…”

그의 옆얼굴을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아직도 후끈거릴정도로 빨개진 그의 상처가.
고여있던 내 눈물을 주르륵 흘러나오게 했다.

“그래요 그럼…오늘은…쉬어요.”

대문 밖으로 나오니 비가 한줄기. 두줄기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