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준의 집을 나와서 함께 택시를 타고  내 집앞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려 대문앞에 도착하니 우리는 둘다 흠뻑 젖어있었다.

“들어와서…좀 쉬고가세요. 많이 젖었는데.”
“아니야. 너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어.”
“잡아먹지 않을테니까..들어오세요.”

“들어가면. 내가 널 잡아먹을지 몰라.”
내가 웃는모습을 보고는 그가 웃더니 돌아서서 차를 타려다가 잠시 굳어졌다.

왜 그러는지, 빗물속에 흐려지는 모습을 자세히 보려는데,

윤세준도.
나도.

우리의 눈을 믿을수가 없었다.

검은 우산을 쓰고 윤세준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민우석이었다.

“윤세준. 꼴이 그게 뭐냐?”

“우석…?”

“여전하시군.”

그가 씨익 웃었다.
장난스럽지만 슬퍼보이는 그 웃음이.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이제는 잊었을법도 한 그의 표정들이.
그의 그 웃음 하나로 모두 생생하게 살아 돌아왔다.

“왜 왔냐고 안 물어봐?”

“언제 왔어.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도착한지 두어시간 됐네.”

“잘 왔다. 어디가서 차라도 마실까.”

“남의 택시 젖게 만들지 말고. 내 차로 가.”

윤세준이 타고 가려던 택시를 보내주고,
내쪽으로 걸어왔다.

“전…안 갈래요. 두분… 다녀 오세요.”
“우석이. 너 만나러 왔을거야. 가자.”

“왜 저를…만나러 와요…”
“직접 물어봐.”
“싫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우석이.. 기다리잖아.”
윤세준이 내 어깨를 조용히 잡았다.

민우석.
그 사람이 왜 나타난건지.
왜 하필 그 날 나를 찾아왔는지…

카페 작은 난로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얼굴도. 윤세준의 얼굴도 볼수 없었다.

“제수씨랑… 우진이도 함께 왔어.”
“세정이가?”

“우진이 연구때문에 잠시 한국에서 쉬다가 다시 박사학위하러 돌아갈거야.”
“그래. 잘 됐네. 너 사업은.”

“그냥 그럭저럭.
아….참. 제수씨랑 우진이 데려다 주러
회장님댁에 갔다가 얘기 들었는데…
한예지랑. 결혼한다고 했다며?”

잠시 어색한 침묵이 숨통을 조여왔다.

“왜.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우석아.”

“왜. 한예지랑 나랑 뭐 상관있는 사람들인가?”

그제야 민우석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오랜세월이 지났다 해도. 어떻게 저렇게 말을 할수가 있지.
저 사람. 본질적으로 변해버린건가.
궁금해서 돌아보지 않을수 없었다.

민우석이 코웃음을 쳤다.

“한때. 조금 알고 지낸건데. 뭘 그렇게들 불편해 하냐?”

아무리 헤어진 사람인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 돋힌듯 내 귀에 아프게 꽂혀왔다.

“민우석.”

“두 사람 어울리나 한번 보러왔어. 이렇게 직접 보니까 선남선녀네.”

“까불다…맞는다..”

민우석이 다시 피식 웃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내 눈길을 피했다. 찾잔을 들고 마시려는듯 하더니,

“사랑해? 한예지?”

윤세준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민우석의 표정을 도저히 읽을수가 없었는데…

“사랑하냐고. 윤세준 사랑하냐, 한예지?”

“왜 이래요? 몇년만에 만나서. 왜 이렇게 무례하세요?”
“난 원래 무례한 놈이니까.”
“사랑하니까 결혼하지.  돈보고 결혼하는줄 알아요?”

말을 해놓고도.
그 순간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분명 민우석이 미웠지만. 원망스러웠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잔인할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에...

“바보같은 기지배. 왜 하필이면 윤세준이야.
내가 얘기 했지!
이 집안 사람들 어떤 사람들인지. 벌써 다 까먹었냐?”

윤세준이 참으려고 눈을 감았다.  어금니를 단단히 다물고있는 그의 옆모습이 보여 더욱 마음이 아팠는데…

“배우도 되고 잘나간다 했더니 왜 하필 윤세준이냐고.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고 이 자식이랑 결혼을 해?”

“그만해요! 무슨자격으로 이래요? 당신이 우리한테 무슨 자격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