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윤세준도. 민우석도
또 주위의 그 아무와도 만나지 않은 채
조용한 시간이 지나갔다.
유난히 날씨가 맑은 어느날,
집앞에 나오니 김비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세요… 벨 누르시지 않고..”
“지금 도착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타시죠.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마음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
어쩌면 나에게 봉투를 하나 건내 주실지 모르겠다.
이돈을 받고 사라지라고.
아니면 비행기표를 주실지도 모른다. 다른나라로. 윤세준의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지라고.
그자리에서 극약을 내놓으시고 마시라고 하시면?
별별상상을 하며 차를 타고 가는데,
차가 윤세준의 저택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십시오.” 김비서가 문앞으로 나를 인도했다.
“김비서님…선배님은 어떠세요...?”
“도련님도 안에 계십니다. 직접 들어가셔서 보시죠.”
윤세준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 마음은 편안해 졌다.
그래.. 바보같고 무지한 선택이라해도 그의 말대로 그와 함께 있기위해서라면 세상 어디든 갈수 있다고 믿었다.
현관에 발을 내 디딛는 순간이 꼭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마음과 굉장히 동감되는 순간이었다.
“왔구나. 앉아라.”
들어가자 마자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회장님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심장이 뛰었다.
윤세준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잘 지냈어?”
너무나 반가운 그의 손길. 그의 목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오랫만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데,
그는 한잠도 못잤는지 눈동자에 힘아리가 빠져있었다.
안타깝게 그를 보다가
"어서와요."
하는 밝은 목소리에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윤세정이 활짝 웃고있었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민우진이 예전과 다르게 건강한 모습으로 세정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왠지 동지를 만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앉으라니까.”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데,
윤세준의 어머니가 차와 다과를 내어오셨다.
그녀의 표정은 왠지 기분나쁘고 속이 많이 상한 얼굴이었지만,
내가 마치 손님이라도 되는양 직접 들고오셨는데..
이쯤에 와서는, 나도 뭔가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 차렸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귀족들처럼 점잖게 나를 내치시려고 예절을 차리시는지…
"한예지양. 예지양에게는 두가지만 내, 부탁하겠네."
"네? 부탁이요?"
한가지도 아니고 두가지라니…
그러면 윤세준과 헤어져 주고, 다른나라로 가라고…?
"쉽지는 않을테지만, 우리 세준이, 일하는데 뒷바라지 잘 해주고.
그리고 배우생활은 정리할수 있겠지?"
무슨영문인지 알수가 없어서 윤세준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믿으라는듯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럼요. 물론입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배우생활도 물론 정리하겠습니다."
"세준아."
회장님이 왠지 찜찜한 미소를 지으셨고,
"너도 모든 사람앞에서 다시 니 입으로 약속을 해라.
전에도 말했지만, 이 애비는 이제 늙고 힘이없어.
이제 내가 믿을수 있는 사람은 여기 앉아있는 너희들 뿐이라 말이야.
결혼만 허락하면 내가 내 인생을 걸고 키워온 우리 회사를. 이제 니가 맡을수 있겠나?"
윤세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믿을수 없을만큼 감사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를 구제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를 깊은 물속으로 밀어넣고있는 기분이 들었다.
"...네."
그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그 대답의 의미는 너무나 길고 고통스러운 우리의 미래를 계시하고 있음을…그때도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다.
"그래. 그걸로 됐다. 결혼 준비 시작해. "
믿어지지가 않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벼락같이 화를 내시고 나를 인간취급도 안하시던 회장님이
이렇게 간단하게 결혼을 허락하시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일이었기 때문에.
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복을 받아 입으시곤 밖으로 나가셨다.
모두 현관에 서서 인사를 드리는데,
윤세준의 어머님은 회장님이 나가시자 마자 나를 보지도 않으시고 이층으로 올라가셨다.
나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으시는 그녀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보고있는데,
누군가 덥썩,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예지씨. 축하해요. 정말 잘 됐어.”
“세정씨…어떻게…된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이젠 우리가 도와줄 차례잖아요.”
세정이 밝게 웃었다.
“물론…우리가 한건 아니지만…
우리는 노력만 했죠...
사실은 우진씨 형이…그니까, 제 아주버님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자세한건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제 한가족이 될거라 생각하니,
너무 기뻐요, 예지씨…”
민우석이?
나와 윤세준에게 멍청한짓이라고 욕을 퍼붓던 민우석이 회장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니…?
“건강해 보여서. 정말 좋네요..”
언제부터인가 다시 건강해진 민우진에게 꼭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고마와요. 세준형이랑 예지씨가 우리 많이 도와준거.
얘기들어서 알아요.
감사드린다는 말. 정말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만 살았네요.
반가와요. 그리고 축하해요.”
민우진이 웃는모습에서 왠지 민우석이 보였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이 쓰렸다.
“형은…잘 지내시죠…?”
“어제 다시 미국으로 갔어요. 형수가 몸이 안좋으시거든요.”
“네?”
“원래 몸이 많이 아프신분이셔요… 그래서 결혼도 그렇게 갑자기 한거구요..
형을 만나고. 많이 좋아지셨지만요. 또 형을 며칠 안보시더니…좀 않좋아지신 모양이예요.”
다쳤던 상처가 다 아물었는줄 알았는데.
그 당시 아팠던 그 마음이 두근거리며 살아났다.
결혼식에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행복하게 웃던 그녀.
이제와서 알면 뭐하겠는가. 민우석이 결혼했던 그 여자가 나보다 약하고 여린 사람이었다는것.
그 자세한 뒷사정은 이제 알아서 뭐하겠는가…
“저희들이 아무리 말로 설득을 하고 노력했어도...
쉽게 허락하실 아버지가 아니신데...
결국 아주버님이…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원하시던 미국 사업을 열어주셨어요.
왠만한 한국기업이라면 누구나 탐내던 자리를.
아주버님이 열어주셨어요.
예지씨와 오빠의 결혼을 허락하시는 조건으로.
그래서 아버지 마음이 바뀌신거예요.”
눈가에 눈물이 맻혀왔다.
윤세준이 조용히 내 어깨를 감싸주었고,
감사함과 미안함.
왠지모를 죄책감과 기쁨이섞여 잠시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윤세준과 오랫만에 편하게 길을 걸었다.
그의 손을 꼭 잡았고,
그는 편안한 미소를 짓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우석이한테...큰 빚을 졌네."
"그 사람도...기뻤을거예요. 늘 선배님한테 받는거..싫어했지만,
사실은 많이 미안해하고, 또 고마왔을거예요."
"행복해야 할텐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정말...허락하신거 맞아요?
저 지금 꿈꾸고 있는거 아니예요?"
그가 잠시 웃더니,
"너 일은...다시 하고싶을때. 해."
"정리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도 하고싶으면 다시 해도 돼."
"그런게 어딨어요. 약속했는데...그리고, 미련없어요.
이제 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연기를 할거니까요.."
"그게 뭔데...?"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좋은 엄마.
내 기분이나 충동에 상관없이. 항상 좋은 연기를 하려구요."
"그러지마. 너 하고싶은데로 해. 웃고싶으면 웃고. 울고싶으면 울고."
"연기를 하다보면. 빠져들잖아요. 그렇게 몇년 열심히 연습하면,
정말 좋은 며느리. 아내...그리고 엄마가 될수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거 필요없어. 난 한예지만 있으면 돼."
"자신없어서 그래요...정말 잘하고 싶은데...
선배님은...괜찮겠어요?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 평생할수 있겠어요?"
"내가 도망치고 싶으면... 나랑 같이 도망갈래?"
"에이. 약속해놓고."
윤세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너를 왜 이렇게 사랑하는지..."
"그게 무슨뜻이예요? 후회한다는 말인가..?"
"너만 옆에 있어준다면. 나는 뭘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야."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걸음을 멈춰서고,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행복했다.
나도 그랬다.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뭘하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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