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시간이었다.
윤세준과 결혼한 처음 몇주는.

신혼여행을 멀리 하와이로 갔는데,
경치뿐이 아니라 날씨도 아름다운 그곳에서
바다구경을 하고,
말을 타고,
유명한 다이아몬드 헤드 코스로 하이킹도 하며
단 둘이서 아무런 방해없이.
해야하는일이나 가야하는곳도 없이 편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내일 벌써 집에 가야되네? 오빠. 다시 일하러 가면. 보고싶어서 어떻하지?”
팔을 베고 누웠던 윤세준이 나를 돌아보더니,
“가지 말까? 우리 여기 하와이에서 장사를 하던지…
농사를 짓는건 어때? 아까 라면집있지? 내가 그것보단 더 잘 끓일수 있을것 같은데…”
푸하하…웃으며 그를 보았다.
일본라면집이 무지하게 비쌌는데 맛은 별로라 무척 실망을 했었다.

“그럴까? 그럼…아버님이랑 어머님이 홧병 걸리실텐데?”
“우진이는…사업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하고싶어 했으니까.  우진이가 하면되지? 세정이도 도울수있고.”
“약속한건 어떻게 하구…오빠...이렇게 철없는 모습 처음본다…”
“그래? 너한테 옮았나보다…”

우리는 행복했다.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와서 계속 꿈을 꾸고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꿈에서.
바로 다음날
깨어났다.

“도착하셨습니다.”
김비서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고,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회사로 차를 돌려 회장실로 안내했다.

“세준이 왔구나.
그래. 잘 쉬었겠지?”

“네. 다녀왔습니다.”
“옷 갈아입어라. 중요한 회의가 있어.”

윤세준과 내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지금 막 도착했는데…

“김비서. 준비시켜. 한시간 후니까 서두르고.”
“회장님…저. 도련님 피곤하실..텐데요. 비행기도 연장되었고, 지금 막 공항에서”

“놀다왔는데 피곤하다니? 그렇쟎아도 도착시간이 연장돼서 시간이 빠듯해. 중요한 회의야.
일본에서 오신 대표님들과 간부, 인사들에게 세준이를 소개시킬거니까. 서둘러.”

회장님은 우리한테 나가라는듯, 손짓을 하시며 전화를 받으셨다.
아주 반갑게 맞아주실거라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킬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잠시 잊고있었던 것이지...
원래.  그는 이렇게 쉬지않고 일을하며 살아왔었다.
어쩌면 탐탁지 않았던 결혼을 못이겨 허락한 아버님께서
그때 했던 우리의 약속을 잊지말라는 의미로 더 독하게 그러셨던것일까?

 “집에가서 쉬고있어. 저녁때 보자.”
“오빠는...비행기에서도 잘 못잤는데…”
“난 괜찮아.”

어쨌든 나는 일부러 윤세준에게 웃어보였다.
그도 걱정말라는듯. 웃어주었다.
비행기안에서 윤세준이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숨을 쉬던 모습이 기억났다.
아마 그는 이렇게 될줄 알았던 것일까. 돌아오면 우리의 즐거운 꿈에서 깨어날 것이라는걸.
그는 이미 알고있었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한숨을 쉬었던 것일까.


집에 도착하자, 조금은 감회가 새로왔다.
저녁때 보자…했던 그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렸고,
이제 이곳에서. 윤세준과 함께 매일매일 보낼수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운맘이나 걱정이 되는것 보다, 흥분되고 설레였다.

“왔니.”
“어머님…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세준이는 회사에 갔나보구나.”
너무나 당연하다는 목소리였다.
서운해 하고있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정도로..
“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인사를 하고 한복을 갈아입고 예의를 차리는것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윤세준의 저택에는 사모님 혼자서 덩그라니 음악감상을 하시며 책을 읽고계셨다.

“너도 내일부터 바빠질거야. 남자들 내조한다는게. 쉬운게 아니지.
더구나 너는 이쪽 환경을 이해할수 없을테니까.
오늘은 집구조를 잘 익혀놓고, 부엌도 좀 둘러보고. 들어가서 좀 쉬렴.”

“네. 열심히. 잘 배우겠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마음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
예상과 다르게 힘든일이 닥쳐도 나는 즐거운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글쎄. 배운다고 할수있는게 있고. 타고나야 할수있는게 있지.”

그녀는 결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를 유지하는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대하는것도 항상 그랬다.
결코 예뻐하는것도. 미워하는것도 아닌.
자포자기 상태라고 해야할까…

그의 집에서 지낸 첫날 저녁.
윤세준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늦게 전화가 걸려왔는데,

“김비서님?”

[도련님 오늘 못들어 가신다고…전해드리려구요.]

“왜요?”

[서울에서 일 마치시고 회장님이 제주도로 보내셨어요…  손님들께 내일 아침 접대를 하셔야 한다고. 기다리실까봐 연락드립니다.]

“아…예…그래요. 그럼 전화라도 좀…”

[아시다시피 오늘 도착하셨기때문에 빈손으로 가셨습니다.
호텔에 도착하면 자정이 넘을것 같아서
제가 알려드리는거예요. 늦더라도 전화하시겠다고…]

“그래요. 그럼. 너무…피곤해 하지는 않던가요…”

[피곤하시겠죠...뭐 세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요.]

“전해주세요. 밤늦게 전화하지말고. 도착하는데로 푹…쉬시라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밤새 잠을 잘수가 없었다.
곁에서 나를 꼭 안아주던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허전했고,
낯선 우리의 신혼방이 너무나 춥게 느껴지고 썰렁했다.

새벽 6시에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예지야.. 미안해. 첫날을 집에서 혼자보내게 해서…너무 일찍 걸었나?]

“괜찮아요. 이따볼건데 뭐…좀 더 쉬지 왜 벌써 일어났어요. 피곤할텐데…”
[어제 밤에 전화 하려다가…너무 늦어져서..]

“좀 잤어요? 피곤하지 않아?”
[난 괜찮아.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어. 이따가 저녁때 보자. 넌 좀 더 자…]
“오빠도 참…나 시집온 첫날부터 늦잠자라고?”

[신랑도 없는데. 뭐 어때.]
“오빠말 들으면 큰일나겠다. 오빠야말로…더 자…”

[그래. 알았어. 그럼 집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가슴에 꼭 안았다.
그가 집에서 보자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래…이제 우리는 한집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이야.
이렇게 잠시 헤어져 있어도. 늘 그는 집으로 돌아올거야…
아무도 방해없이 그와 내가 전화통화를 나눌수있다는 사실만도 고마왔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소중하고. 그가 너무 보고싶어서
애궂은 전화기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켰다.

그날. 하루종일 윤세준의 어머님은 나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시며 옷 쇼핑을 하셨다.
얼마나 고급옷이었는지 옷하나 맞추는데 하루 반나절이 걸렸다. 그것을 몇벌을 했다.

“니가 가져온 옷들을 보니까. 높으신 분들께 인사다니기 전에
여기 먼저 오는걸 서둘러야 겠더라.
이런 스타일을 입어야지. 유행하는거 다 소용없다.
이렇게 점잖은 옷을 입어야 되는거야.
원장님,
내일부터 인사다닐 곳이 많으니까.
꼼꼼하게, 그치만 좀 서둘러서 해줘요.”

색상이나 스타일도 모두 그분이 고르셨다.
나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기분좋게 받아들였고, 시간만 빨리 지나간다면 괜찮았다.

나는 저녁때 그를 만날 생각만하며 부풀어 있었으니까.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시는걸 열심히 거들었다.
그에게 먹일 저녁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즐거웠고 설레여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도 하지않은채 그를 기다리는데,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고. 국을 떳다가 뎁혔다가… 반찬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았다가…
어쩔줄 모르고 방황하는 와중에 또 세시간이 지나 버렸다.

“에구…첫날도 안오시더니 오늘도 못들어오시나 부네…들어가 쉬어요 새색시…”
아주머니가 혀를 차시곤, 나를 안쓰럽게 보시며 음식을 챙겨 넣으셨다.

“진작 치울걸 그랬죠…상했으면 어쩌나…”

가슴한쪽이 텅비어 차가와지는 느낌이었다.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화도나고 속상하기도 하고,
아주머니의 동정하는 눈길에 괜시리 목이 메었다.
무엇보다 전화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 윤세준이 걱정이 되어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늦은 밤이 되서야 회장님과 윤세준이 현관문앞으로 나타났다.
“다녀 오셨어요…”
서둘러 인사를 하러 나갔는데,

“음. 그래. 피곤하구나. 정식으로 인사는 내일 하도록 하자.”
아버님은 보는둥 마는둥 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셨고,

윤세준은 나를 보더니 눈으로만 미소를 지었다.

“왔니.”
“네. 어머니.”

“여행독도 못풀었는데 쉬지도 못하고. 피곤하겠구나. 식사는 했겠지?”
“아니요. 아직.”
“지금이 몇신데 아니라니?”
“그냥…. 집에서 먹으려고요…”
“아니. 식사도 안하고 여지껏 돌아다녔단 말이야? 아버지는?”
“다들 식사 하셨어요. 어머니도 들어가서 쉬세요.”

“빨리 없어지란 소리로 들리는구나.”
어머님이 혀를 차시며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를 보자 바보같은 미소만 흘러나왔다.
속상했던것도, 걱정했던것도, 화가 났던것도 잊고…
아무래도 좋았다.
그사람만 나를 봐주면, 나는 행복했다.

“정말…안먹었어요?”
“넌 먹었어?”
“아직…”
“그럼 내가 더 미안하잖아…다음엔 먼저 먹어.”
“오빠야말로 다 식사하러 갔을텐데 왜 안먹었어요?”
“집에서 너하고 먹고싶어서. 가자. 내가 차려줄께.”
“치잇…” 웃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양복을 입은채로 내 손을 잡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벗겨주려고 하니, 자신이 먼저 벗더니, 의자에 입혀놓았다.
갑자기 넥타이를 푸르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손을 씻더니,

“어머, 왜이래? 하지마요. 어머님 나오시면.”
“그렇게까지 구식은 아니셔. 걱정마.”
“피곤하잖아요. 내가 해주게 어서 앉아요.”
“안 피곤해. 내가 만든것도 아닌데 뭐.”

“이건…제가 만든건데...” 차갑게 식은 국을 불에 올려놓았다.

“그래? 붕어빵. 그런것도 할줄 알아?” 그가 피식 웃더니, 밥을 푸고, 반찬을 골라 식탁으로 가져왔다.
풍성한 식탁은 아니었지만 배고픈 그를 빨리 먹이고 싶은마음에 간단한것들만 내 놓았는데.
한밤중에 소꼽놀이하듯이 그와함께 우장창 차려놓은 밥상앞에서,
우리는 웃었다.
배 고픈것도 잊고.
그와 못만나 속상했던 마음도 잊고,
늦게까지 밥도 안먹고 시달린 그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도 잊고,
이제 매일매일 겪어야할 외로움..그리움과 기다림의 앞날도 잊은 채.
우리는 웃으며 그렇게 장난스럽게 집에서 소중한 첫 식사를 했다.

결혼하자마자 그렇게…
윤세준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회사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대궐같은 집에서 그의 어머니를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옷을 사입고, 쇼핑을 하고, 나이드신 사모님들을 만나뵙고 인사하는것으로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보통사람들과 말투도 다르고, 생활도 다르고, 또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끼리끼리 상종하는 또 하나의 세계였는데, 내가 배우였다는 사실을 재미있어 하시며 이것 저것 물어보시는 분들도 계셨고,
아주 대놓고 무시를 하거나 비웃는 분들도 계셨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기는 심히 불편해 지셨고. 그 불똥은 당연히 나에게로 튀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윤세준만 함께 있어준다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보는것은 마른땅에 단비같은 사건이었다.
외국과 지방에 늘 출장을 가야했고. 야근. 접대. 회의…

한달에도 몇번씩있는 행사나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내가 정신이 없어 그를 볼수 없었다.
외아들의 며느리 노릇을 하느라 음식주문이나 행사준비, 부엌일들을 돌아봐야 했고,
가깝고 먼 친구분들의 생일이나 친척분들의 생일선물도 상상하기 어려운 비싼물건들,
특이한 물건들로 골라서 때에 맞춰 직접 가져다 드리고, 인사하러 다니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때와 철이 바뀔때마다 집안 데코레이션을 온통 바꾸시곤 하셨는데,
그 디테일 하나하나를 정말 소름끼치게 정확하게 따지시고, 재시고.
또 나에게 아무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으셨지만  잘 보고 배워두라며 한군데도 빠짐없이 나를 끌고 다니셨다.
그외에도 어머니는 나에게 늘 교육을 시키시느라 바쁘셨다.
외국어. 음악. 요리. 공예. 교양. 문화. 문예…즐겁게 배우려 노력했지만 한도 끝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지쳐가는 우리의 사랑을… 가슴 한구석에 밀어넣을수밖에 없는 세월이었다.

결혼이란. 이런것인가 보다 했다.
나의 자유로운 생활에 죽어가고. 또 그것에 익숙해지는 꼭두각시 노릇이.
어쩌면 사는것은 원래 이런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윤세준과 결혼을 했는지. 그의 어머니와 천년가약을 맺었는지는.
나도. 내 주위사람들도 헷갈릴 정도로
윤세준은 내 주위에 없었고.
나는 차차 그의 어머니의 말도 없고 생각도 없는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3년후.

“얘야.” 
  
“예..어머님.” 
 
“옷 챙겨입어라. 갈데가 있어.” 
 
“어디를요...?” 

“중국에서 용하다는 한의원이다. 성공률이 아주 높다니까 어서 서둘러 준비해.
오늘 떠난다는걸 가까스로 붙잡아 놨다.” 
“아…예…” 
 
“사람들 눈길이 많이 가는곳이니까, 눈에 띄지않게 얌전하게 입어라.”

아기가 서지 않는다고 걱정이셨다.
벌써 3년인데, 임신이 되지않는다고…
나도 아기를 가지는것이 소원이었지만,
그렇게 우리를 떨어뜨려 놓고,
아기를 가지라고 늘 한약이다 병원이다 데리고 다니시는것도. 이제는 우습게 느껴졌다.

기계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부드러운 블라우스들을 천천히 만져보았다.

코디들이 입을 옷을 늘 가져다 주던..그때를 생각하면서…
배우 시절. 그때는 몰랐던 나의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리웠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는것이나 구설수에 오르는 연예인 생활이 다시 하고싶은게 아니라,
내가 진정 사랑하는 일을 나의 모든것을 바쳐 잠도 안자고 바쁘게 뛰어다니며
열심히 하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그리웠다.
이제 거울안에 맥없이 앉아있는 내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열정도. 열심도 찾아볼수 없었다.

나는 창백하고 초라하게 말라있었고,
매일 계속되는 지루하고 답답한 생활속에 점점 정말 내가 못나고 촌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윤세준을 볼수가 없어서. 늘 목이 마른 사람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해결할수 없었다.
한달에도 2~3주는 출장을 가야하는 그가. 목마르게 그리웠다.

결혼이란 커다란 변화와 현실속에. 늘 나는 혼자였다.
하루종일 함께 돌아다녀도 따뜻한 눈길하나 주지 않는 그의 어머니.
단 한번도 인간적이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다운 말한마디 한번 건내지 않으시는 그분도.
어쩔때는 가엾게 느껴졌다.  어차피 해야하는 일이라면 맘에드는 며느리와 하고싶으셨을텐데…
내가 며느리가 되는걸 그렇게도 싫어하셨던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수 있었다.

배우시절의 친구들은 절대로 못 만나게 하셨고,
자꾸 만나라고 권하시는 새로운 친구들은 고위층의 며느리들.
대개 상류층에서 부유하게 자라난 공주님같은 부인들이었다.
나와 통하는게 있을리가 없었고. 늘상 대놓고 내 앞에서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외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나를 따돌리는 그들과 어울리느니 차라리 집에있는것이 좋았다.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니?”

시어머니의 재촉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주차장에 나가려는데 멀리서 카메라를 들고 서성거리는 기자가 보였다.
나의 화장기 없는 깡마른 모습이 또 내일쯤은 인터넷에 뜰지도 모르겠다.
신인배우로 기대와 촉망을 받던 배우 한예지는 갑자스런 스캔들과 결혼으로 연예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기획사나 아는분들이 연락을 할수 없도록 어머니는 철저히 모든 연락을 차단하셨다.
외부 행사에는 윤세준과 절대로 동반 할수 없었다. 큰일하는 사람이 구설수에 오르면 안된다고…

“어. 그래요? 그거. 큰일이네. 알았어. 내 곧 거기로 갈께.”
어머니는 차에서 전화를 받으시더니,

“김비서. 차 돌려. 나 급한 일이 있으니까. 예지 병원은 자네가 데리고 가도록 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급한일로 갑자기 사라지시고, 김비서와 차를 타고 한의원에 도착했다.

“들어가시죠..”
“싫은데요.”
“네?..”

“김비서님이 대강 타다 주면 안돼요..?”
“그러다 어머님이 아시면…”
“부탁이예요.”
“정말 저 쫓겨나는 꼴 보고싶으십니까.”
“이번 한의원이 몇번째인지 아시잖아요. 내용도 뻔하구요..”

김비서가 못이겨 내 대신 약을 타러 들어가는데,
나는 순간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차에서 뛰쳐 나왔다.

택시를 타고 여기저기 정신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몇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미친사람처럼
누가 나를 알아보건 말건.
돌아다녔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 보고,
맘에 내키는 데로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기도 하면서…

집에서 난리가 났을것은 뻔했고.
이미 저녁시간이 다 됐는데,
갑자기 다니던 대학교가 생각이 났다.

그리운 옛 캠퍼스…연극부로 발을 조심스레 디디자..
열정을 가지고 연기하고있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처음 연극부에 들어와
민우석을 만나고.
연극무대를 청소하고.  의상실을 치우던 날들이 생각이 났다.
붕어빵을 들고 들어온 거지같은 차림의 윤세준이 기억나서 피식…웃었다.

그런데.
연기지도를 하는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렸다.
꼭 예전의 민우석처럼…
갸우뚱해서 그를 자세히 보는데,
갑자기 그가 대본을 던지더니 화를 내며 내쪽으로 걸어나왔다.

“정신들이 이따윈데 뭘 하겠다는 거야!”

너무나 놀라서 들고있는 가방을 떨어뜨렸다.
그도 그자리에 굳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지..야..”

바깥으로 나와 벤치에 앉았는데,
민우석이 커피를 두잔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 아는 사람을 만나고 한가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적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사업하신다더니. 뭐하시는거예요, 여기서?.”
“너야말로 결혼한 애가. 더구나 아직 기자들 쫓아다니는데 여기서 혼자 뭐해? 곧 쓰러질것 같은 꼴을하고.”

민우석은 여전하다. 닥치는대로 하고싶은 말을 한다.
늘 참고 인내하는 윤세준과는 너무나 달라서.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출한건…아니지?”
“아니예요.”
“그런데 이시간에 혼자 왜 여기를 헤매고 다녀?”

“생각이 나서요.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선배님. 뜻밖이네요…정말 오랜만이구요…”
“결혼하기 전에 만났으니까. 벌써 3년인가.”

“그때…왜 날 찾아온거예요.”
민우석이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나하고…세준선배…우리가 정말 서로 사랑하는지. 시험해 본거예요?”
“그래.  그렇다고 해두자.”
“우리 결혼이 힘들게 뻔하니까…정말 얼마나 사랑하는지…테스트해본건가요?”

민우석이 조용히 나를 돌아보았다.
“너…힘드냐…?”

잠시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반가왔다.
상상치도 못했던 민우석을 그리운 옛시절의 연극부에서 다시 보는것이.
그 날 왜 그렇게 눈물 나도록 반가왔는지 모르겠다.
애써 웃는데 눈물이 주책스럽게 흘러내렸다.

민우석은 내 눈길을 피해 커피를 마시려다가, 커피잔을 거칠게 찌그려 멀리 던져버렸다.
뜨거운 커피가 그의 손등에 흘려내렸다.

손수건을 찾아 얼른 내밀었는데,

“그 자식은. 뭐하고 있어? 너 힘들게 내버려 놓고.”

“세준씨도…내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텐데…
모르죠. 그때 결혼을 전제로 아버님하고 그렇게 평생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붙잡혀 살지 않았을텐데…
어쩌면 세준오빠는 지금쯤 유명한 감독이 되어있을지도…모르죠..
얼마나 좋았을까요.
세준오빠. 촬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모습. 참 보기 좋았는데.”

민우석이 한숨을 쉬었다. 

“선배님은. 왜 여기 있는거예요?”
“왜 여기 있긴? 여기가 좋으니까 있지.”
“미국에서…사업한다고 들었는데. 부인은. 건강하시구요?”

“난 잘 살고있으니까. 너 걱정이나 해. 그리고 윤세준한테 전해라. 다음에 만나면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그러지 마요. 그사람 마음…아시잖아요…”

민우석이 한숨을 한번 푹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힘 내. 머저리같이 시키는데로만 하지 말고.
내가 그 집에서 고등학교때 까지 살아서 아는데,
윤세준 어머님이 어떤사람인지도 잘 알고.
그 여자한테 휘말려 살면, 평생 넌 숨막혀 죽어. 
너가 하고싶은 일을 찾아서 열심히 살아.
일어나라. 집에 가봐야지.
너랑 나랑 이러는거 기자한테 사진이라도 찍히면 너 맨발로 쫓겨날거야.”


쫓겨난다고…
그럼…그렇게 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돼. 윤세준이 있는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돼…마음을 다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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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시간이 훨씬 지나서 집에 들어갔는데도
집에는 여전히 어머니만 계셨다.

“어딜 갔다 이제와? 너 제정신이니? 김비서가 하루종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잠시 바람이 쐬고싶어서.”
“바람을 쐬러?  하루 왠종일 대체 어딜 갔는데?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였겠어?”
“그냥…전에 다니던 학교에 좀 다녀왔어요…”
“누구. 만났니?”
“아..니요. 아니예요.”

무척 화가 나셨다. 그런데 그건 나를 걱정해서라거나 혼내려고 화가 나신게 아니었다.
벌레가 음식물에 들어앉아 너무 더럽고 기분나쁘다는…그런 분노의 표정이었다.
그분의 눈을 더이상 마주볼수 없었다.

“나에게 말없이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는것.
또 다시 이런식으로 행동하면 용서하지 않아.
아직은 때가 아닐뿐더러.
밑도 끝도 없는 널. 믿을수도 없어.”

“믿을수 없다니요…그게…무슨 말씀이세요..?”
삼년간. 그분이 시키는데로 다 해왔다. 한번도 어김없이.
애완용 강아지처럼 온갖 애교를 부려가면서…
그런데 단 한번의 외출을 가지고 용서할수 없다니. 믿을수 없다니…

“혁진이 어머님. 최혁진 기억 안나니?”
“네?”
“그 사모님이 너희들 스캔들에 대해서 나에게 누누히 이르셨는데,
그냥 들어 넘기려고 했지만. 아직도 나에겐 치욕적이야.
니가 그렇게 말없이 혼자 돌아다니는게. 내 눈에 어떻게 보이겠니?”

“어머님…그런건. 절대 아니예요.”
기가막히고 서러워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