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stz의 음악은 깊이가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의 해석은 지휘의 역사를 바꿔놓았어.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 않아. 슬픔도있고. 고뇌도 있지? 깊이있게 다시 해봐. 여기서 Phrasing은 좀더 호흡에 맞추고.” 이날따라 유난히 정신이 너무나 말짱하시고 음악지식에 훤하신 아버지가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혼자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어허. 다시 해보라는데 웃고만 있네 이 녀석이?” “네..아버지.” 서지운이 자세를 바로잡는데, “여보!” 어머니가 바로 뒤에서 소리를 치신다. “서교수 배 고프다구요. 해물탕 다 식어요. 먹고 하자구요. 네?” “어? 해물탕?” 예전에는 버럭버럭 화도 잘 내시던 아버지가 요즘에는 어머니 앞에선 온순한 양이 되셨다. “아. 그래 우리 서교수? 서교수 저녁 먹어야지.” 깜빡 뭔가를 잊고 있었다는듯,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어떻게 이 마음을 표현할수 있을까.. 온화해지신 아버지가 고마운건지. 예전처럼 다혈질의 성격이 그리운건지. 약해져가는 그분이 안쓰럽지만. 어머니와 사이가 좋아지신것같아 감사하기도 하고.. 쉽게 웃으시고 수그러드시는 그 모습을 뵐때면 아버지를 원망했던 지난날이 더욱 그의 가슴을 쓰리게한다. 해물탕을 먹는 내내 어머니는 뿌듯한듯 웃으며 서지운을 보고 앉아계시고, 아버지는 피아노 악보를 정리하시느라 바쁘시다. “이번주는 좀 어떠세요?” “멀쩡해… 의사말로는 안정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 더 악화되지는 않을거라 하시고… 만날 음악을 끼고사는 양반이니, 그것도 아주 좋은거라 하고...” “어머니는요..”. “나야. 너만 잘 되면. 어서 네 장가가는 날만 기다리고 있지 않니.” 서지운이 피식 웃자, “왜 여자를 안만나? 직장도 자리 잡혔고. 맘에 드는 여자가 그렇게 없어?” 늘상 집에 올때마다 듣는 얘기지만, 그냥 웃어넘긴지 몇년이지만, 뭐라 해드릴 말이 없어, 죄송하기도 하고 불편하다. “너 혹시 아직도…그 애 못 잊었니.” 서지운이 음식을 힘겹게 집어 삼켰다. “무슨…말씀이세요.” “니가 하두 선을 안본다 하고, 데려오는 여자도 없어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문득. 그 애가 떠올라서. 너가 그렇게 애타게 좋아한 애는. 그때 그애 하나뿐이잖니.” “어릴때 얘기잖아요.” “그래도 그 애 때문에 피아노도 안치고… 니 갈길을.. 망친거나 다름없는데… 하긴. 난 니가 작곡과 택한게. 더 잘했다고 본다. 피아노처럼 늘상 연주하느라 객지생활 하지않아도 되고.” 어머니는 서슴치 않고 뭐든 생각나는데로 말씀하시는 타입이시다. 아버지는 정 반대로 뭐든 과묵하게 쌓아놓으시는 듯하다가 갑자기 불같이, 또는 천둥치듯 터트리시는 편이고… “기억도 잘 안나요.” 서지운이 애써 웃어보였다. 어머니도 훗. 웃으시더니, “그래. 그렇겠지. 20년이나 지났는데… 그래도 난 가끔 맘에 걸리더라. 어린애를 그렇게 그냥 보내서….” “아버지 들으시겠어요.” “어? 저 양반? 뜰에 나가셨어. 걱정 마. 수연이 얘기 나오면 늘 펄쩍 뛰셨지… 왜그랬는지 평생 지나도록 말도 안해주고. 지금은 혈압오를까봐 물어보지도 못하겠고. 에그.” 서지운은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듯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노력하는데, “왜. 맛이 없어?” “맛있어요. 좀 싸주세요. 남은거 있으면.” “그래? 그럴까? 니가 왠일이니 – 늘 나가 먹는다더니” 어머니는 신이 나서 음식을 챙기시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돌아서 계신 틈을 타, 서지운은 그제야 한숨을 쉬었는데. “다 먹었냐? 연습좀 더 하고 자야지? 학교숙제는 다했겠지?” 아버지가 부엌으로 고개를 내미신다. “네. 아버지..” “아휴…아직 반도 안 먹었구만!” “배 부른데요 – 나머지는 가지고 갈께요.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시고. 아버지는 신이 나서 피아노곁에 의자를 끌어 내 앉으신다. 서지운은 조용히 피아노에 앉아,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죄송해요... 아버지.” “응? 뭐가?” ‘그렇게 원하셨는데…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못돼서...죄송해요.’ 마음속으로 이말을 한마디 하고 이제는 약하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을 한번 꼭 쥐어 드린다. 영문도 모르는 아버지는 편안한 웃음을 지으시고… ‘그때…왜 그러셨어요…왜 수연이를 그렇게 보내셨어요…’ 하고 묻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답답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강의가 없는 날이지만 서지운은 일찌기 오피스로 향했다. Los Angeles Master Chorale에게 Commission받은 곡을 마감하려면 며칠밤을 새워도 모자른데 학생들의 졸업작품 준비도 꼼꼼히 체크해 주어야 한다. 아직 햇살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복도를 걷는데, 희미한 그림자가 오피스 앞에 기대 앉아있다. 서지운이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오피스 앞에 주저 앉아 졸고있는 David을 바라보다가, 툭. 치는데, David이 옆으로 스르르 쓰러진다. 서지운은 그를 얼른 받아 일으키려고 두 팔을 잡았고, “이봐.” “아…” David이 잠에서 깬듯,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꾹 누르고.. David에게서 독한 술냄새가 풍겨와 서지운이 얼굴을 찡그린다. “여기서 뭐해. 어디서 술을 마시고!” “죄송…합니다.” “너 대학에서 술취해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안 취했는데요.” “너 몇살이야” “취하지 않았어요.” 서지운이 이마를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자신의 오피스 문을 열쇠로 열고 그냥 들어가려는데, “교수님!” 서지운이 문을 닫는데, David이 얼른 문고리를 잡는다. “어머니는..” David이 급한듯 내뱉는다. 어머니..라는 말에 서지운도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데, “모셔올수 없어요.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어머님은….” “뭔 소리야.” “교수님과 제가 해결할수 있다면. 학교에서는 어머님께 연락드리지 않겠다고 했어요. 클라스 학점은. 뭘 주셔도 괜찮습니다.” “네 정학문제 말인가?” “…네.” “표절을 했으니. 정학이 당연한거야. 그게 아니라도 오늘 이 술취한 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어머님께 연락해야 마땅한거고. 우리학교 방침이니까.” David이 입술을 깨문다. 주먹을 쥔채. “나가.” 서지운은 마음이 급하다. 해야할 일이 산더미고. “술 취하지 않았고. 표절도 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님이 믿기지 않는다 해서. 진실이 아닌건 아니잖습니까.” 서지운이 기가막혀서 숨을 내 쉬는데, “이런 말씀까지 드리고 싶진 않았지만…멜로디는. 어머님이 늘 불러주시던 것을 제가 조금 고친것이고. 어머님은 음악을 읽지도 못하시고. 곡을 발표하신적이 없으니. 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술은…제가 마신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불러 주셨으니 표절이 아니라고? 그분이 다른데서 그 음악을 들었다고는 생각 안해봤어?” “교수님이 그 곡을 발표하신건 2001년이었고. 어머니가 불러주신 멜로디는.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러니까 아주 그 훨씬 전부터 입니다.” 갑자기 서지운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 어머니라고..? 오랜세월 전부터? 그 멜로디는. 그 예전부터 멜로디를 아는 사람은.. 서지운이 잠시 혼란에 빠졌는데. “그리고 술은. 제가 마신것이 아니고. 제 친구가…마시다가 실수로 엎은거예요.” “여러가지로군.” 서지운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아직도 David이 한말들이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 멜로디는…David의 어머니가…? 혹시… 이수연. 그녀가 집을 나갔을때 열일곱이었다. 이렇게 큰 아들이 있을수가…있을까? “왜 그렇게 못 믿으세요. 평생 속으셨습니까?” “그래. 교수생활하면서 많이 속았어. 개가 숙제를 먹었다. 하드드라이브가 뻥터져서 리포트가 날라갔다. 또 뭐였나. 아. 도둑이 컴퓨터를 훔쳐갔다…이메일을 보냈는데… 이 메일이…” 말을 하며 David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닮은듯 하기도 하고… “왜 그러세요?” “니 어머니 이름이…” “네?” “아니. 아니야.” 그렇다면 어쩔것이고. 아니라면 어쩔것인가. 20년이 지난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 멜로디는… “무슨 얘기가…그렇게 복잡해요?” 문이 삐그득 열린다. 민혜주가 오늘따라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두 손에 커피와 베이글을 가득 안고. “죄송합니다. 더이상 들고 기다릴수가 없어서.” 서지운이 David을 잠시 보다가, “잠시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 나가봐.” “다시 오겠습니다.” David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민혜주가 얼굴을 찌푸린다. “어후…술냄새…쟤…뭐하는 학생이예요? 취해보이지는 않는데…?” “넌 왜 왔어.” “도와드리려구요. LA 합창단. Commission받으신거 땜에 바쁘시잖아요. 제가 학생들 작품은 체크해드릴께요.” “너말고 조교수 많아. 내가 봐야할 작품들이고. 다음부터 일없이 이렇게 들락거리지 마.” “왜…” 민혜주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 시작한다. “제가…그렇게 싫으세요…” 서지운이 눈을 감고 한숨을 쉬는데. “그렇게…보기 싫고. 지겨우세요…?” “넌 학생이고. 난 교수야. 싫고 말고가 어딨어?” “전 대학생이 아니예요. Post doc fellow는 교수와 많이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싫으시면. 왜 싫은지 말씀해 주세요.” “싫지 않아. 좋지도 않고. 아무 감정 없어.” “감정 없다는거. 전혀 놀랍지 않네요. 음악할때 빼고. 정말 감정없는 사람으로 보이니까요.” “그런데 왜 물어?” “사람이니까. 언젠가 변할지도 모른죠? 싫지 않으시다면 됐어요. 감정이란. 생길수 있는거니까. 그럼 저도 감정 없다고 치고. 그냥 도와드리면 되죠? 제가 하고싶어서 하는거니까 나중에 딴소리 하지 않을께요.” 서지운이 포기한듯, 말없이 일을 시작했다. 민혜주도 뻔뻔스럽게 상관없다는듯, 옆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민혜주와 이렇다 저렇다 말싸움을 할 기운이 없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David이 한말들이. 그의 어머니가 누구일까…혹시 수연이가 아닐까... 하는 궁금증으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os Angeles Masters Chorale에 도착하자, 웅장한 합창소리가 울려퍼지고, 잠시 서지운은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눈을 감고 감상을 했다. | |
|
|
모짜르트를 유난히 사랑했던 수연..
그녀에게 이 Ave Verum Corpus를 처음 들려줬던 오후의 따뜻한 햇살이…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진다.
수연이와 함께 보낸시간은 고작 2년 남짓이었는데.
그때 함께 들었던 음악.
그녀와 나누었던 추억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있다.
서지운은 그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고.
젊었을때 학교를 다니며 일에 빠져 바빴을땐 오히려 덜했는데.
세월이 훨씬 많이 지난 지금.
사실은 그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어서.
기억인지. 꿈인지.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인지. 그것이 수연이에 대한 그리움인지 그냥 어린시절의 동경인지.
그도 잘 구분이 가지는 않는다.
“Hello Professor! Sorry we kept you waiting! Excuse me, choir, may we take five?”
지휘자가 음악을 마치자 객석에 앉아있는 서지운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온다.
“I enjoyed the beautiful rehearsal.” 그가 일어나 악수를 하며 웃었는데,
“Oh. It’s an honor. Let me introduce you to my successor. You know I’m retiring next month.”
[내 후계자를 소개하지. 내가 다음 달에 은퇴하는건 알고있었지?]
“Next month? I thought you were conducting my piece?”
[다음달이요? 제 곡을 지휘하실것이라 생각 했는데요.]
“Well – I was looking forward to it, but it’s the doctor’s order.”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의사의 명령이라네.]
“I’m sorry to hear that.”
[그러셨군요]
“Me, too – but you won’t be disappointed with our new conductor. Sam?”
[그래. 그치만 자네도 후계로 온 사람이 맘에 들거야. Sam?]
한국인이었다.
어딘가 낯이 익었는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교수님.
Samuel Yoo라고 합니다.
서교수님 한국에서 피아노치실 당시에…몇번 뵈었었는데.”
서지운은 웃으며 그와 악수를 했다.
한국에서 피아노? 그럼 고등학교때..
“안녕하십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서지운은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전 객석에 있었는걸요.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으시겠죠.”
친근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자 순간 생각이 났다.
“혹시 유..신우씨..?.”
“허…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 한국이름을…아시다니. 영광입니다.”
어느 매거진에선가 같은 한국인이라. 눈여겨 봤던 지휘자였다.
아직 미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
“몰라뵜군요. 같은 한국분이라…가끔 소식은 들었습니다. ”
“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물론 교수님 명성은 잘 들어 알고있고요.
이번에 교수님께서 저희 합창단에 기념회 곡을 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여기.”
서지운은 들고있던 악보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역시…소문대로…많이 어렵겠군요. 연습 많이 해야 하겠는데요?”
그가 웃는데,
“Oh, Sam! Your girlfriend is here!”
전 지휘자가 옆에서 장난스럽게 유신우에게 눈총을 주었다.
모두 문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는데,
유신우는 멎적은듯 웃었고.
아름다운 그녀는 조용히 썬글라스를 벗고 유신우쪽으로 다가왔다.
“아… 인사하죠. 여자친구는 아니고…아직은 그냥...친구입니다. 이름은 Clara. Clara, 여기는 유명하신 작곡가 서지운 교수님이셔. 내가 전에 얘기 했었지?”
서지운은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숨을 제대로 쉴수도 없었다.
그때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어때야 하는지 그것도 생각할수가 없었다.
20년이 지났다해도.
이미 성장기를 거친 열일곱의 모습은.
지금 30대 중반을 넘긴 그녀의 얼굴에 충분히 남아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세월을 비껴가도 많이 비껴간듯 했다.
“안녕하세요. 서…지운 교수님.”
또박또박한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생소했다.
시각의 기억은 청각의 기억보다 훨씬 더 오래가는것일까.
처음듣는 목소리 같았다.
아니면 그녀의 무감각한.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은 감정없는 말투가 더 생소한 것이었을까.
잠시 온세상이 멈춰선듯.
서지운은 굳어졌다.
그의 침묵에 주위사람들이 뭔가 불편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는데.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유신우가 조심스레 서지운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기억을 못할수도 있겠다 싶을정도로.
“교수님?”
“성함이…뭐라구요.”
겨우 그가 한마디를 뱉어냈는데.
“Clara Han 입니다.”
쌍동이인가?
아니면 많이 닮은 사람?
미국에선 결혼하면서Last name도 달라질수 있긴 하지만..
“....한국이름은...” 서지운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녀가 알수없는 의미의 미소를 지으며,
“그런건 없습니다.”
|
|
 |
8
쪽지
Back
목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