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미소앞에서.
시간이 멈추어 섰다.
세상 모든 주위가 조용히 사라졌고,
서지운은 그 순간 지난날의 기억속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름이…뭐야..”
“수연. 이수연.”
“몇살인데?”
“열여섯.”
“나랑 동갑이구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던 고등학교 1학년 봄.
서지운은 협연을 하고 유명한 교수들과 공부를 하느라 오랜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다가,
어머니의 사고소식을 듣고 서둘러 돌아온 날이었는데.
그 후로 일 이년 정도는 부모님과 한국에서 지내면서
대학 준비도 할겸 국내대회와 공연을 하기로 했었다. 

수연이라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던 소녀는 아버지의 친구 딸이라고 했다.
어릴때 부모님을 잃고 친척집에서 지낸다는.
늘 가난에 쫓기던 그 친척댁 분들은 수연을 학교에도 제대로 보낼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침 어머니의 사고이야기를 전해들은 그 친척분들은 멀리 이사를 가게 되자,
도움이 될것이라며 수연이를 아버지에게로 데려오셨다.
 

수연이는 어릴때부터 예뻤지만 늘 어두웠다.
부끄러움을 타는 정도가 심해서, 말을 시키면 눈물이 맻힐정도로, 그녀는 자신없고 수줍어했다.
그러나 어머님을 도우는 정성에는 아버지도, 주위 어른들도 감탄을 했다.
수연은 어머니의 손과 발이 된듯,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것을 척척 준비해 내오곤 했는데.
서서히 서지운의 가족은 수연이를 믿고, 딸처럼 아끼게 되었다.

서지운은 스스럼없이 수연이에게 말을 붙히곤 했지만,
그녀는 그런 서지운에게 3개월동안 짧은 대답외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서지운은 늘 연주를 하고 연습에 바빠서. 친해질 기회도 별로 없었고.

“수연아. 넌 어떤 음악을 좋아하니?”
그날도 서지운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수연이가 과일즙을 짜왔다.
“몰라.”

“그렇게 말할줄 알았어. 자 여기 앉아 봐.”
수연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냥 나가려는데, 서지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괜찮으니까 잠깐. 앉아 봐.”
수연이 잠시 안절부절 못하는데, 서지운은 웃으며 그녀를 조용히 곁에 있는 의자에 앉혔고,

“자..이건. 베토벤의 비창. 3악장이야.”
아름다운 음률에 그때까지 불편해하던 수연은 가만히 생각하듯 음악을 즐기는듯..

“이건. 쇼팽의 에뛰드 10번중 세번째 곡이고. 이별곡이라고도 부르지.”
수연의 표정이 서글퍼 보였다.

“벌의 비행이라는 곡이야.”
재빨리 신나는 곡으로 분위기를 바꾸자 수연도 재미있었는지 표정이 밝아졌고.

“Gershwin의 Rhapsody.  20세기 피아노곡중, 내가 가장 즐기며 치는 곡인데.. 어때. 어떤 곡이 제일 맘에 들어?”
수연은 서서히… 온통 음악에 빠져 시선을 완전히 서지운의 손가락에 고정시켰다.

인형같이 곱고 헌신적으로 엄마와 가족을 돕는 수연이가,
서지운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존재로 다가왔다.
형제 없이 자란 서지운은
늘 음악에 파묻혀있었고, 또 공연을 하러 여행을 다녀서 또래 친구가 많지 않았다.
다른 악기는 오케스트라나 앙상블등 다른 연주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피아노란 악기는 유난히 혼자 파고들며 연습하는 시간이 많은편이기도 했다.

자신이 외롭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살아왔는데..
아버지가 연습을 하라면 하고.
공연을 하라면 하고.
여기를 가라. 저기를 가라. 이것을 쳐봐라. 저걸로 바꿔라.
뭐든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생활에 익숙했다.
아무런 결정도 혼자 하지 않았었다. 수연이를 만나기 전에는 말이다.

수연이와 음악을 나누면서
점점 가슴 한쪽이 꽉 차오는 느낌을 받았다.
비어있던 어느 구멍하나가 채워지는 기분이랄까.
수연역시 피아노곁에 앉아 서지운과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많이 웃기 시작했다.
가끔은 서지운에게 이걸 쳐줘… 저번에 그 곡이 듣고싶어.
신청을 하기도 했다.

햇살이 유난히도 밝은 어느 날.

“지운아. 저기…있잖아,”
과일을 들고 연습실로 들어온 수연이 망설이고 있었다.
“왜 그래. 말해봐.”

“내가…저기…내…가..”
“응. 뭔데?”

“너한테…”
“말해봐 수연아.”
“들려주고 싶은게…있어. 오늘은.”
“그래? 정말?”

핑크빛 나는 그녀의 수줍은 표정이 마치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천사같이 신비로왔다.
그리고.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멜로디를 치며,
가냘픈 목소리로 허밍을 하기 시작했는데…

음악이라면 굉장히 높은수준만을 고집하는 서지운이,
그렇게 간단하고 간결한 멜로디에 놀라기는 처음이었다.
너무나 신선하며 고운 라인이었을 뿐아니라.
그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들어보는.
아주 새로운 세계의 꿈이나 환상같이 느껴졌다.

“어…때…너무. 이상하지..?”
서지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서지운의 침묵에 당황한 수연은 얼굴이 붉어져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만…나가봐야 겠다. 미안해 지운아. 연습 방해해서.”
서지운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둘은 서로 어쩔줄 모르고 잠시 말없이 마주 보았는데.

“아. 미안.”
지운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수연이 서둘러 방을 나가려하자,

“너. 노래… 참 잘한다… 그리고 멜로디도…챠이코프스키나 모짜르트보다...더 좋은데.”

수연이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웃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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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유신우의 목소리에.
서지운은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호흡을 정리하고. 자신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럼. 만나뵈서 반가웠어요.”
그녀가 미새한 미소를 짓고, 돌아서는 순간.

“David. 이라고 아십니까.”
서지운이 나지막히 내뱉은 말이다.

놀란듯, 그녀가 고개를 돌려 서지운을 똑바로 보았는데.
“David이라면…Clara아들 이름과 같네요.” 유신우가 조금 신기한듯 서교수를 돌아보았다.

“흔한편이죠. 이름이.”
그녀가 얼버무렸다.

“왜 그러십니까?” 유신우가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듯 했다.

“제가 가르치는 제자인데…아주 특이한 멜로디를…써왔더군요.”
“무슨…말씀이세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옛날에…제 오랜 친구가 부르던 멜로디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가져왔더군요.”
“아…그런 우연이 있을수 있습니까?”
유신우가 이상한듯, 그리고 대체 뭔소린가 싶어 되물었고.

“왜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아들 David은. 경제학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하시는 서교수님과. 만났을리가 없어요.”

“….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서지운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Clara는 어색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서지운은 순간 기절할듯 어지러웠는데.
옆에 의자를 짚어 간신히 똑바로 섰다.

“Dr. Suh, are you okay? You don’t seem… quite yourself today?”
전 지휘자가 염려스런듯 서지운의 어깨를 붙잡았고,

“I’m fine, thank you. Just a little tired… I will see you tomorrow, if that’s okay with you.”
“Sure. Go rest and take care of yourself. You don’t want to end up quitting like me.”
지휘자가 다정스레 웃으며 서지운과 악수를 나눴다.

돌아서는 서지운을 유신우가 눈여겨 보고 서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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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오는길.
서지운은 괴로웠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잊으려 애썼다.
지나간 일이야…
많이 닮은 사람일것이고.
David이 그냥 내곡을 표절한거야.
우연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수연이.

아니야.

창밖으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날처럼…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버지가 소리치시던 그 날 오후.
늘 침착하시다가도 한번 화를 내시면 폭풍우와도 같은 아버지였다.

“누가. 이곡을 이렇게 망쳐놓았어? 이게 어떤건데?”
지휘자 였던 아버지는 유명한 작곡가에게 받아온 새악보가 흠뻑 비에 젖은것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아직 회복단계라 방안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고,

그날 서지운은 국내대회에서 난생 처음으로 3위라는 치욕을 겪은 날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대회도 아니었고, 예의상 참가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컨디션이 안좋아서 잘못 친것 이거나 실수를 한것이 아니라
해석도 엉망이었고 테크닉도 엉성했던 그날의 연주가
심사위원들이나 서지운의 아버지에게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연습이 부족해도 턱없이 부족했던 이유는
아버지가 외출하실때마다
수연이와 긴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함께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때까지 해보지 않은 청소년다운 생활을 서지운도 처음으로 해본것이다.

3등이란 결과가 발표되고,
아버지의 실망을 이루 말로 표현할수 없었지만,
정작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런 꾸지람도 하지 않으시며 침묵하시다가.

그날 저녁 집밖에 널려져 있던 귀한 악보를 보고 폭발하신 것이었다.
“누가 이랬어?”

물어봤자 집안에 있었던 사람은 누워계신 엄마 외에 수연이. 지운. 둘뿐이었다.
수연이는 불같이 펄펄뛰시는 아버지앞에서 사시나무처럼 떨고있었다.

“제가…그랬어요.”
걱정스럽게 수연을 바라보던 지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전혀 알수없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 수연이가 실수한것일지도 모르니까.
가뜩이나 소심하고 겁이많은 그 아이를 혼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 니가? 왜?”

“잘…모르고…그랬어요.”

“제 정신이야?”

“죄송해요. 아버지.”

“밖으로 나와.”

방안에서 주무시는 어머니가 깨실까봐 걱정하셨는지,
아버지는 비가 쏟아지는 마당에 서지운을 세워놓고 나무가지를 몇개 꺽어 오셨다.

그때까지 아주 어린나이를 지나서는
단 한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다.

외국에서 지내던 몇년동안 아버지는 늘 엄격하고 철저하셨지만
다 큰 아들에게 이 정도로 화가 나신적은 없었다.
분명 악보때문만도 아니었을것이고.
대회를 망친것 때문만도 아니었다는걸. 서지운은 알고있었다.

“너 요즘에. 제 정신이 아니야. 알고있어?”
“….”
“네가 뭐 때문에 연습 게을리 하는지. 내가 모를것 같아?”

서지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 이러면 안돼! 네 앞길이 결정될, 가장 중요한 때라고. 알았어?
지금 이렇게 해이해 지면 큰일 나! 기회라는건. 한번 놓치면 쉽게 다시 찾아오는게 아니야.”

“아저씨!”
수연이 뛰쳐 나왔는데.

“제가…그런거예요. 지운이가 그런거 아니예요.. 지운이가 그런건. 정말 아니예요.”

“넌 들어가. 아주머니 깨시지 않게. 조용히 하고 있어!”

“정말이예요! 지운이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아저씨!”

“당장 들어가래도!”

수연은 눈물이 가득고인채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모두 침묵했다.
아버지도 맘이 않좋으셔서 일찍 자리에 드셨고,
서지운은 밀린 학교 공부를 하고있었는데.

“지운아…미안해.”
수연이 눈물을 뚝뚝흘리며 조용히 책상 옆에 물을 한잔 내려놓았다.

“괜찮아. 너때문이 아니야.”
“우리오빠가 갑자기 찾아왔었어…5년동안 못 만났는데…오빠가 막무가내로 악보들을 내던졌어.”
“오빠? 너한테 오빠가 있었어? ...반가왔을텐데.. 왜 그냥 가셨어?”

“미안해 지운아…내가...잘못한건데…”
“걱정하지마... 아버지는 그것때문에 화나신게 아니야.”

“너…괜찮아?”
“그래. 괜찮아. 그리고 다른일 때문에 그런거니까. 넌 신경쓰지마.”
눈물을 글썽이던 수연이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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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비에 젖은 양복을 벗어 손에 들은 서지운은 한숨을 쉬며 복도로 들어섰다.
걷기 시작하는데,
오피스 앞에 서성거리는 청년이 보였다.
David 이었다.

“교수님.”

“너.”

“네?”

“전공이 뭐야?”

그때까지는 당연히 작곡과 학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고, 다른 전공학생들과 전혀 다른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전공이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작곡 클라스는 전공학생이 아니면 택할수 없는 과목이었는데.

“경제학과 입니다.”

서지운은 지치고 놀라서 이제는 어이없는 미소가 터졌다.

“근데 여기서 뭐해? 내 클라스는 어떻게 들어왔어?”

“교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저번 Music Appreciation Class에서. 싸인해 주셨잖아요.”

100명쯤 되는, 큰 클라스였다. 조교가 세명이나 있었고.
소질있는 학생이었다 싶어 싸인해 주긴 했어도,
자세히 기억해 둘만큼 별 다른 일은 아니었다.


“알았어. 이만 가봐.”

“저를. 믿어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러기로 했으니까 이제 찾아올 필요 없어.”

서지운은 조용히 오피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어이없는 웃음이. 헛..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