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서지운 교수. 좀 이상했지? 혹시 아는 사람이야?”
유신우가 조심스럽게 Clara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요..”

“David 이야기도 그렇고…묘한 우연이잖아.
David이 서교수 가르치는 대학에 다니는건 맞는데. 안그래?”

“David은 흔한 이름이예요.”

“그래도. Clara한테 직접적으로 물어봤잖아. David을 아냐고.”
“말 그대로 우연이겠죠.”

“그런가? 그나저나 서지운…나 고등학교 다닐때 정말 유망주였는데… 아까운 사람이야.”
Clara가 조용히 자가용의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랬는지…한참 전성기때 음악세계에서 갑자기 사라졌어. 그때 쭉 나갔으면 지금쯤 세계적인 연주인이 됐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서지운교수에 대해서.”

“내가 팬이었거든. 나는 그때 변성기라서 합창단에서 나오고..고민하던 시절인데… 그의 피아노 연주를 우연히 국내대회에서 들었어. 그때 완전히 그의 음악에 매혹되었고, 힘들었던 변성기의 고비를 그 덕에 넘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거야.”

“차 세워주세요.”

“응? 아직 안 왔는데.”

“좀 걷고 싶네요.”

“어…? 그래. 그럼 차 주차할께.”

“유신우씨는 그냥 가세요.”

“Clara”

“데려다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제 찾아오고. 전화하는건…삼가해 주세요. 전 음악하는 남자는 싫거든요.”

“아...정말 심하게 정곡을 찌르는군.”

“미안해요. 전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그땐…나를 잘 몰라서 그런거라고 생각했어… 음악하는 남자… 그건 내가 바꿀수 없는건데…그게 싫다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음악하는 남자 좋아하는 여자 만나세요.”

“나는 Clara가 좋은데.”

“유신우씨.”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환자로 찾아가면… 잘 보살펴는 주시겠죠?”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Clara가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간다.

유신우가 긴 한숨을 몰아쉬는데…

“음악하는 남자하고 원수를 졌나…휴… 힘들다. 힘들어…”

그는 허탈하게 미소지으며
또박또박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때 까지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Clara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마자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지금까지 감춰왔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는데…

지운…
서지운…

천천히 두 눈을 뜨는 그녀의 두 눈동자에 희미한 눈물이 맺혀왔다.

“엄마.”

아들의 목소리에 그녀는 서둘러 눈물을 지우고 고개를 드는데,

“무슨일 있어요?”

“아니. 벌써 왔니. 웬일로.”

“오랫만에…내가 디저트 만들었는데. Perfect timing이예요.”

Clara가 흐믓하게 웃었다.

“디저트? 무슨 디저트?”

“호떡.”

Clara는 웃으며 자랑스럽게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David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누구 만났어요?”
“그냥...유신우씨.”
“또 그 아저씨가 귀찮게 하는구나?”
“그런거 아니야.”

부엌으로 엄마를 끌고 들어간 David은 뜨거운 호떡을 접시에 담아 엄마앞에 내려놓았다.
Clara는 웃고있는 아들을 잠시 돌아보았다.
“David. 너…”
“네.”

“너…혹시…”
“왜요 엄마?”

“너…엄마하고 한 약속. 어기는거..아니지?”
“에?”
David이 잠시 당황한듯 눈길을 돌리더니, 물컵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음악. 안하기로 했잖아. 약속했지..”
“아……”

“혹시. 작곡 클라스…같은거. 한적 없지?”

쨍그랑!
순간 물컵이 떨어졌고,
Clara가 얼른 뛰어가 David의 발 밑을 살폈는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미안해 엄마.”

David의 발등에서 피가 흘렀다.
Clara는 당황하지 않고 조심스레 박혀있는 유리조각을 빼내고 능숙하게 지혈을 하곤,
소독한 후, 반창고를 찾아 붙혀주었다.

“조심해야지. 미끄러운 손으로 유리컵을 잡으면 어떻게 하니?”
“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들을 주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음악이 하고싶었어? 엄마를 또 다시 속일 정도로?”

“그냥…취미로 하는거예요. Elective로…”

“내일 가서 클라스 Drop 해.”

“엄마…그럼 W 받아요. 성적표에. 안 좋게 보이는데.”

“상관없어. Drop하라고.”

“…싫은데요.”

Clara가 사방으로 튀어나간 유리조각들을 치우다가 David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하고..싶어요. 그리고 그 교수님한테… 더 배우고 싶어요.”
“그 교수님? 어떤 교수님?”
“서지운 교수님이란 분이신데요. 클라스 들어갈때 마다. 죽어있던 내 감정들이 살아나는것 같고.
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것 같아요. 처음으로. 내가 정말 하고싶은 일을 찾아서.
밤을 새고 작품을 준비해도 힘들지 않았어요.”

서지운…이라는 이름에 가슴이 턱 막혀왔다.
Clara는 잠시 어이가 없고 기가막히다는 듯. 하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다.

“말씀 안드린건 죄송해요. 하지만”

“음악해서 어디다 써!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이러니 너?”

David이 길게 숨을 내 쉬었다. 무슨말인가를 하려다가,
포기한듯 고개를 숙였다.

“전공 하겠다는게 아니고… 소질이 없다면 저도 계속 하고싶지 않아요.”
“소질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Clara 자신도 자기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소질이 있다면. 부모로써 무슨 자격으로 막을수 있겠는가.
어릴때 부터 피아노에 앉으면 즐거워 했고,
음악을 들으면 신이 났던 어린 아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고,

‘David, 정말 대단한데요? 제가 본 학생중 음감과 리듬이 가장 뛰어나요.’
학교나 교회에서 노래를 부른다거나 음악을 배울 기회가 있을때마다
Clara는 그 소리를 들었다.
진작부터 알고있었다.
남다른 David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그리고 자기 자신이 애타게 잊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기억들과. 그에 대한 갈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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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we are going to study the Fugues.  We will practice the uses of sequencing, inversions, modulations and augmentations. I’ll give you a subject and an answer. You will each try to carry on using various techniques.”
[오늘은 둔주곡을 공부하겠다. 둔주곡에 사용되는 sequencing, inversions, modulation and augmentation을 공부하기 위해 내가 주제와 응답을 줄것이고. 그것을 너희들이 fugue의 테크닉을 사용해서 이어나가면 된다.] 

서지운 교수가 빠른 손으로 칠판에 악상을 그렸다.

15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서교수를 주목하며 열중하는데,

“David. You go first.”
 아직 준비할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David이 순간 조금 당황했고.

“Uh, could we have some extra time to prepare?”
오히려 옆에 있던 학생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기를 신청했다.

“Time? Composition is instinct. Time doesn’t change what you are made of.”
[시간? 작곡은 본능이야. 네 본 바닥을 시간이 바꿀수는 없는거야.]

“I disagree, professor. Even Beethoven took his time with his craft.”
[그치만 베토벤도 그의 곡에 많은 시간을 투여했는데요?]

“His genius didn’t need time. He just took the time because he was a perfectionist, NOT because he needed it.  David, to the board.” [그는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게 아니였어.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이지. David 칠판으로.]

서교수가 그에게 마커를 건내주며 자리에 앉았고
David이 조금 망설이다가 칠판으로 가 서자
잠시 후, 막힘없이 악상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우…와…감탄을 했는데.

서지운교수는 묵묵히 보고있더니, 성큼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This, right here – is a common mistake of sequencing in the wrong key. And here, you’re modulating too late. Your answer in the bass line is using augmentation, and that goes against the voicing in the right hand. Correct them.”
[여기. Sequencing 에 key를 잘못 선택했어. 이렇게 늦게 modulate하면 안돼지. 여기. 베이스라인의 응답에서는 augmentation을 택하면 오른손의 라인과 안 맞잖아. 고쳐.]

오늘따라 서교수의 지적이 혹독했다.  다른 날은 잘한 부분의 칭찬도 잊지 않는 서교수였는데.
David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망설임없이 서교수의 말을 따라 음정을 고쳐 나갔다.
쉽지 않았다. 두둔곡은 계산적이고 수학적이기 때문에 쓸때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Wrong here. This is incorrect voicing.
Bass and the alto lines are parallel, which is entirely inappropriate.  Fix it.”

David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왔다.
긴장했을뿐 아니라, 서지운 교수의 요구가 점점 그의 실력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고치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몇번.
학생들도. David도 지쳐가고 있었다.

“Francis. Why don’t you help David.”

그제야 겨우 서교수가 David을 풀어주었다.
모두들 긴장감이 고조를 달했고,
수제자였던 Francis는 척척 서지운의 요구대로 David의 실수들을 순식간에 고쳐놓았다.

David은 지친표정으로 서지운교수를 바라보았고,
서지운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Next week’s assignment is a full piece fugue – at least two pages long.”

수업을 마치고…
서지운이 잠시 David을 보더니 아무말 없이 가방을 챙겨 지나치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힘들어?”

“아닙니다.”

“왜 시켰는지…알고는 있나?”

“조금은…”

“넌 흉내만 내고 있어. 기초도 없고. 기본도 안 됐으면서.”

“음악은. 모방의 예술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모방의 예술이지. 그런데 모방이라는건 그렇게 쉬운게 아니거든. 조금만 빈틈이 있어도 금방 표가 나.”

“배우고 싶었을 뿐입니다. 큰 욕심은 없습니다.”

서지운교수가 잠시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수연…
이수연.
그녀의 눈동자를 가진 이 아이의 눈빛이…
왠지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것 같았다.

“왜 배우고 싶은데.”

“모르겠어요.”

David이 눈을 조금 찡그리며 미새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전날 보았던 Clara와 많이 닮은 미소를.

“점심…먹을래…?”

서교수의 뜻밖의 제안에 David은 놀라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서지운 자신도 망설였다.
이 아이를 모른척 지나치는 것이 가장 좋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수연이의 아들이라는 David을.
조금은 감싸주고 싶기도 했다.

“싫으면. 됐고.”

“사주시게요?”
David이 피식 웃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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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운교수가 David과 함께 들어간 식당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한국식당이었다.

“교수님은…왜 작곡가가 되셨나요?”

서지운이 메뉴를 살피다가 David을 무심코 올려다 보았다.

“다른건. 잘 못해서.”

David이 조금 웃고는,
“뜻밖에…겸손하시네요.”

“겸손떠는게 아니야. 정말 그래.”

“피아노도… 잘 치시잖아요.”

서지운이 입가에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니가 잘 치는게 뭔지나 알아?”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어릴때부터 음악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콘서트는 거의 빼놓지 않고 참석하구요.”

서지운이 미소를 지우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글쎄요. 못하게 하니까…더 좋아지고...또 하고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David이 잠시 망설이다가 서교수를 마주보았다.

“어머니는. 음악하는걸 굉장히 반대하셨거든요.”

서지운이 마시던 물을 조금 급하게 내려 놓았다.

“그래서…저번에 표절문제로 어머니께 연락 하지 말라고 부탁드린거구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벌써 아시더라구요.”
David이 허탈한듯 웃으며 물을 마셨다.
내가…일렀는데…하려다가 서지운이 메뉴판을 접었고.

“그래도 교수님이 허락하신다면. 다음 클라스도 택하고 싶어요.”

서지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David을 바라보았다.

“내가… 쉽게 허락할것 같아?”

“아뇨. 그래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으려구요.”

“하고 싶으면 어머님 허락 먼저 받아.”

“네?”

“많이 먹어라.”

서지운교수가 조금 힘들어진 표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것도… 엄마를 닮았구나…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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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피아노 가르쳐 줄까?”

“응? 아니… 아니야. 싫어.”

“왜. 너 저번에 혼자 악보 공부하는거 봤어.”

“너 연습해야지.”

“괜찮아. 자 여기 앉아봐.”

“싫다니까.”

오랫만에 아버지가 외국으로 여행을 나가셨다.
밤낮으로 연습만 하던 지운이 오늘만큼은 쉬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 좀 쉬고싶어서 그래.”
수연은 망설이는 눈빛으로 지운을 바라보았다.

“안돼… 너 연습하는거 방해 돼.”

“너까지 왜 그래? 내가 연습만하는 기계로 보여?”
“그런게 아니구…”
지운의 눈빛이 지쳐보였다.

“알았어…그럼…조금만 가르쳐 줘. 나머지는 내가 열심히 연습할테니까.”

지운이 미소지었다.
“그래.”

좁은 방이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한방을 거의 꽉 채우고 있었는데
오른쪽 벽으로는 탁 트인 창문 밖으로는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며 춤을 추었고
고운 햇살이 피아노 건반위로 따뜻하게 수연의 손을 감싸주었다.

수줍게 웃으며 수연이는 피아노를 배웠다.
한장 한장 악보를 소중하게 사랑하며.
한줄 한줄 이어져 나가는 멜로디를 가슴속 깊이 기쁨으로 누리며…

“잘 치는데?”
다정하게 웃어주는 서지운에게 수연이도 밝게 웃어보였다.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있는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지운아…고마와… 너가 없었을땐. 온통 어두웠고 침묵뿐이었는데…
너를 만나고…음악을 알게되서…나는 새로 태어난 사람같아.”

“나도 그래. 전에는 악보대로 피아노를 쳤지만. 이제는 마음도 함께 치게 됬고.
네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연습할때도 힘이 됐어… 너만 지켜봐 준다면. 더 잘할수 있을것 같아.”
수연이는 핑크빛 볼을 부끄러운듯 감싸다가, 곧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주머니를 뒤졌다.
꾸깃꾸깃 접혀진 쪽지에는…

“전에…내가 만들었던 멜로디야. 나중에. 만약에 말이야…”

지운이 기다리듯 수연을 보았는데,

“우리가 헤어지더라도…너가 이 멜로디로 멋진 곡을 만들어 줘. 그럼 내가 이 멜로디를 쓴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갈테니까.”

“어…? 헤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지운은 아직 생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수연은 충분히 헤어질수 있다고. 아니. 꼭 그렇게 되리라고 알고있었다.

“너희 어머님. 이제 거의 나으셨어. 내가 할일도 많이 없어졌고..”

“그래도 너 고등학교 공부 마칠때까지. 검정고사 합격하게 해주실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되면…정말 좋겠다…”
수연은 맑은 눈동자로 지운을 보며 웃었다.
서지운은 그 날 처음. 수연이 없는 자신의 삶을 상상해 보았는데…

"약속...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