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운은 그녀의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려주고 싶은 충동에
조심스레 손을 내밀다가, 망설이며 다시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수연은 곧 눈물을 닦고, 자신을 진정시켰고.
“비켜주세요.”
“수연아.”
이수연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듯 했다.
아직 서지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불러보고 싶었어. 너 이름…
네가…불편하다면…
오래된 친구라고 생각해도”
“나는 친구따위. 가져본적 없어요.”
서지운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수연이 냉정해진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친구따위. 나는 20년을 찾아 헤맸는데.”
서지운의 허무한 미소에 이수연의 눈동자가 다시한번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만날거라고 믿었어. 그래서 너와의 약속대로 그 곡을 작곡했고…”
“정말 한가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시는군요.”
이수연이 이렇게까지 차가운 이유를.
서지운은 왠지 이해할수 있었다.
그녀가 냉정하고 날카로운만큼. 그녀의 상처가 그만큼 깊었던것이겠지.
“전 다 잊은 이야기예요. 어릴때 잠시.
벌써 흘러가버린
이젠 기억조차 없는 과거라구요.
나는.
밥을 먹기위해 일을 해야하고.
집세를 내기위해 돈을 벌어야 해요.
아시겠어요?
이제 어린애가 아닌 어른이라구요.
그까짓 추억.
나에겐 아무런 의미 없어요.”
서지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힘겹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아픔을 받아들이기에.
자신은 너무 평화롭고 안이한 세월을 보내온것 같아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다.
“그래. 그럼.
우리 밥먹는 얘기.
돈 버는 얘기.
그런 얘기 하자.
추억이든 기억이든...
네가 잊고싶다면. 나도 그렇게 할께.”
수연이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보았다.
“주차 딱지도 뗀김에, 차 놔두고 좀 걸을까?”
부드럽게 웃는 지운은
어릴때와 변함없었다.
늘 마음속 가득히 아름다운 상상을 가지고 있던 건강한 청년.
외롭고 비참했던 자신의 과거들을 편견이나 오해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었던 서지운.
서지운은 골목을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조용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자리에 먼지를 털고는 수연을 보며 웃었고,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수연이 말없이 그를 돌아보자,
“너 간호사라며. 어느 병원에서 일해?”
“서지운씨.”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수연이 고마운듯 서지운은 미소지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왔어요. 잘 지내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그러나 수연은 작별인사를 하듯, 차가운 목소리를 남기고 돌아서는데,
서지운이 서둘러 그녀의 스쳐가는 손을 붙잡았다.
“그동안!
어디서 뭘하고 살았는지...
왜 이렇게까지 나를 피하는건지.
어떻게 하면 너에게 사죄를 할수 있는지..
말해줘.”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수연의 화난 목소리에 서지운이 이제는 조금 지친듯.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무슨 상관이죠?
용서고 뭐고 내가 어디서 뭘하고 살았든.
20년이 지난 지금. 그게 당신한테 무슨 상관이냐구요!”
수연은 맻혀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전. 서지운씨하고 할얘기. 없어요.”
“니 아들. David. 재능있는 아이야.”
순간 수연의 표정이 돌같이 굳어졌다.
“덮어버리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수연이 기가막히다는듯 한숨을 내뱉었다.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 아이의 진로에 대해서는 저와 그 아이가”
“니가 막고있으니까 하는 얘기야.”
“무례하시군요. 나와 내 아들의 미래에. 당신이 개입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아이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 학생이기도 하니까.”
서지운의 표정이 진지했다.
이수연은 더 화를 내고싶었다.
정말 말도 안됀다고 생각했다.
서지운이. 왜 자기 인생에 참견을 해야 하는지.
더 많이 화가나고 냉정해져야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수연은 말없이 돌아섰다.
끝까지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위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멀찌감치 그녀를 따라 서지운도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엄마!”
David이 수연의 차에 기대어 서있었다.
서지운은 급한맘에 얼떨결에 나무뒤로 숨었는데.
“David. 너. 여기서 뭐해?”
“엄마 차가 아직 여기 있길래. 어디 갔다왔어? 여기 주차딱지까지 떼고?”
이럴수가.
그 지독한 주차 단속자는 고사이에 또 딱지를 남겨두고 간것인가!
역시 서지운 차의 앞창문에도 또 하나의 ticket이 걸려있었다. 아뿔사…
“너 공부한다면서. 왜. 집에 가려고?”
“집중이 잘 안돼서 오늘을 그냥 쉬려구요. 근데…누구….만났어요?”
“아니. 아니야… 타라. 집에 가자.”
이쯤에서 서지운은 물러났어야 했다.
자신도 알고있었다.
더이상은 민폐.
아니. 주책?
어쩌면 범죄행위에 가까운 집착?
그러나 20년만에 만난 수연이를 그냥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멀찌감치 수연의 차를 쫓아.
뭔가에 홀린듯, 서지운은 자신의 차를 몰았다.
6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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