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에게 고마와 해야할지. 원망해야 할지. 오히려 재밌다는듯 웃고 있는 그녀가 분명히 얄미웠지만, 다희에게 마지막 용기를 준사람도, 이곳까지 오게 한사람도 그녀였기에 미워할수는 없었다.

"한대씩 얻어맞았으니까 된거지 모. 둘이 죽을 죄를 지은것도 아니고.. 안그래? 맘 편히 가지고 잘해봐. 나 간다! 방해꾼들 다...사라집니다. 지금." 웃으며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다 대고, 고마와요. 라고 소리라도 질러줘야 하나..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지수가 아니었으면 두사람은 큰 죄라도 지은 양. 더 심각하게 마음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폭풍이 한번 된통 불고난 뒤의 썰렁함이 작은 화실안에 가득찼다.
"저녁은..먹었어요?"
그제야 명우가 다희를 돌아보고 말했다.
"생각하니까...이제야 배가고프네요."
명우가 쟈켓을 집어들었다.
"가죠."
다희가 그의 옆에 바짝 따라 붙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졌는데...
"명우씨...괜찮은거죠?"
"뼈가 부러졌을땐 태연하더니, 왜그래요? 세삼스럽게..."
"그땐...그냥 환자로 봤으니까.."
"나쁜의사네...환자를 사람으로 안보고..."
"환자도 환자 나름이죠. 그렇게 말안듣고 삐뚤어진 환자. 별로 없거든요?"
"알았어요. 말 잘 들을께요."
농담하는 명우가. 고마왔다. 다희의 맘이 이제야 좀 편안해졌기에.
"숙제가 산더미네요." 다희가 잠시 생각하듯 눈을 치켜떴다.
명우는 의아한듯, 다희를 돌아보았는데,
"명우씨 어릴때부터 받은 상처에. 배신당한 아픔에... 이젠 또 미안해서 죽겠고...직장도 없어. 돈도 없어. 사는집도... 아주 후졌죠?"
"그래서요?"
"내가 할일이. 아주 많다구요."
".....?"
"이제 제가 다 고쳐줘야죠. 제일 아픈데부터. 아주 오래도록 곪은데부터. 싹 다..."

명우가 옅은 미소를 짓고 상처난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스치며 조금 장난스럽게 말했다.
"지금은...여기가 젤 아픈데..."
다희는 픽 웃고는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좀더 편안하고 사랑스럽게.  좀더 길고...오래...
명우가 다희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희도 그를 꼭 붙잡으며 생각했는데..이제...절대로 아프지 않게 할거야...내가..막아주고..지켜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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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일찍부터 다희는 이옷 저옷을 고르며 온 방안을 머리카락 날리게 쌩쌩 누비고 다녔다.
화장이 너무 진한가? 립스틱을 칠했다가 지우기도 했다가. 또 다시 바르다가.
옅은 향수를 칙칙 뿌리고 난뒤, 그녀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아수라장을 또 깨끗히 치웠다.
침실은 다시 아름답게 정리되었고, 집안 구석구석을 챙기는 그녀는 꼼꼼하고 정확한 그 모습 그대로.
마지막으로 거울앞에서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가방을 들었다.

그녀가 운전을 하고 도착한 곳은 전시회장이었는데, 화려하고 잘 차려놓은곳은 아니었지만, 소박하고 심플한, 깨끗한 전시회 장소였다.
"아! 다희씨 왔네!" 지수가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수의 팔에 휘둘림을 당한 남자는. 준기와, 그 옆에 손을 잡고 밝게 웃는 민지였다.
"의사 선생님!"
다희는 흐믓한 미소를 짓고 민지에게 다가갔다.
"민지야! 잘 지냈지?"
"네! 약도 잘먹고. 치료도 열심히 받구요."
"학교 가보니까, 재밌어?"
"네! 빨리, 매일 매일 다니고 싶어요!"
"그래. 곧 그렇게 될거야. 이따 오후에 병원에서 또 보자?"
"오늘 가면, 내일 모레까지 안가도 되죠?"
다희는 웃으며 지수와 준기를 올려다 보았다.
"오빠는...잘 지내는거지..?"
"그럼요! 보면 몰라요 다희씨?" 지수가 까르르 웃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옆에 선 준기는 소리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서정이는..."
"어머. 다희씨 한테 아직 말을 못했네...서정이. 일본갔어."  대답하는 지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네? 언..제요?"
"어제."
"그럼..."
"저번 주에 이혼서류 수속 거의 마무리 됐다고 했는데...싸인하기전에 마음이 바뀐건지...짐정리를 하려는지...어제 아침에 갑자기 훌쩍 떠나가버려서...준기씨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다희는 시무룩해서. 준기의 얼굴도 볼수가 없었다.
"어. 저기, 오늘의 주인공이 오시네!" 지수가 손을 가르키는 곳에 그 가 서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그의 정장입은 모습을 볼수있었다. 처음하늘에서 막 내려와 덮힌 흰눈처럼 하얀 셔츠에 단추를 두어개 풀어놓고 검정색 양복쟈켓과 깨끗하게 길쭉한 정장 바지를 입고있었는데...가뜩이나 훤칠하고 잘 생긴사람이 오늘 정말 인물나네...다희는 흘러나오는 미소를 숨길수가 없었다.

명우가 가까이 다가오며, 조금 쑥쓰러운듯, 멈칫 했다.
"어서와.."
"축하해, 명우야. 전시회. 정말 괜찮은데? 이거...최교수님이 너무 밀어주시는거 아니야?" 준기가 명우와 악수하며 웃었다.
"아직 멀었어. 니가 젤 잘 알잖아."
"아니. 잘 모르겠어. 어디서 이런 작품이 나온건지. 못했으면 좀 놀려주려고 왔는데, 이거 오히려 기분 나쁜데?"
준기와 명우가 마주보고 웃었다.
정말 보기좋은 두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이거."
준기가 카드봉투하나를 내밀어 명우에게 전해주었다.
"뭐야..?"
"우리..." 준기가 말을 잊지 못하고 잠시 고개를 불편하게 떨어뜨렸다 돌렸다가..하던 중,
"우리 아빠 지수언니랑 결혼해요!"
민지가 웃으며 선수를 쳤다.
다희와 명우.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준기는 부끄러운듯, 고개를 숙이고 웃었고, 지수는 좋아서 까르르 소리내며 웃었다. 방방 뛰지만 않았을뿐. 그녀는 정말 좋아서 환장한 귀여운 소녀같이 순수했다. 

"명우 너는 언제 할래? 젊지도 않은것들이 왜이리 서두르는 기색이 없어?" 지수는 명우를 툭치며 째려봤다.
"젊지 않다뇨.. 전 아직 삼십대 초반이예요. 왜 이러세요." 다희가 웃음을 감추고 기분나쁜 표정으로 지수를 쏘아줬다.
"다희씨. 삼십대 초반때, 나는 노처녀 소리를 지나서 아줌마 소리까지 들었어요. 동안이라고 안심하지 말고 어서 이 한심한 녀석을 구제해줘야 할거 아니예요?"
"자..자...우리가 비켜줘야 둘이서 뭐라도 해보지 않겠어..?" 준기가 웃으며 지수의 손을 잡아 끌었다.
"명우야..그리고.. 다희야..우리 간다. 전시회 축하하고."
명우와 준기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준기. 지수..그리고 민지가 손을 잡고 떠들며 나가는 뒷모습에, 다희는 왠지 작은 눈물이 맺혀왔다.
예쁜 한가족이 되어 수선스레 수다를 떠는 민지와 지수는 엄마와 딸이라기 보다 친한 친구들 같이보였고, 지수의 어깨를 감싸고 민지의 손을 꼭 잡은 준기는 듬직한 아빠로, 남편으로.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왜 울어?"
"너무...예뻐서요.."
명우와 다희는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정이도..잘 되겠죠?"
"쉽진 않겠지만...노력한다면. 서정이 고집이 세잖아....그래도 남편이 포기하지 않았다니까..."
보통 여자였다면 서정이를 너무나 잘알고. 또 너무나 걱정해주는 명우의 맘 씀씀이가 조금은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다희의 맘은 명우와 똑같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 항상. 언제나. 또 언제까지나 조금 미안한 맘이 계속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다희야."
명우씨는 이제 다희를 이렇게 불렀다. 6개월이란 시간동안 반말. 존댓말을 섞어쓰며 다희를 헷갈리게 하더니. 요근래 와서야 드디어 말을 툭 터 놓기 시작했다.
그의 심각한 목소리에 다희는 기대가득찬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넌... 전시회와서 그림은 안 보니?"
피잇..하며 다희는 명우의 팔을 둘러 안았다. "그럼 구경좀 시켜줘요. 난 이쪽에 영 아는게 없어서. 어떤 그림이 좋은건지. 무슨 뜻이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손수 명우의 해설을 들으며 그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명우는 감독시절의 실력그대로 말을 최대한으로 아꼈으나 요점은 확실히 전해지도록. 상대방이 이해할수있는 언어를 고르되 자기의 전하고자 하는것에는 절대적인 확신으로 다희를 그림속으로 서서히 이끌어 그안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게 해주었다. 그림 하나하나가 한편의 긴 영화처럼. 모르던 사람의 일생여정 처럼. 오랜시간을 지내온 친구의 흔적처럼, 다희의 마음에 새겨져갔다.
"꽤 쓸만한데요? 아주 구제못할 백수는 아니네..?"
"그래? 난 아직도 내가 바보온달같은데?"
"그 얘긴. 제목이 잘못 됐어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아니라 수지맞은 온달과 바보공주지. 그렇지 않아요?"
명우가 웃으며 다희의 손을 잡아 끌었다.  "보여줄게...있어."

명우는 다희의 손을 잡고 전시회 구석. 천으로 가려진 그림앞에 섰다.
그는 잠시 다희를 보더니 가려진 천을 치웠는데...
제목은 거울...이라고 써있었고.
그림안에는 다희와 명우가 있었다.
아니. 그런데 그가 자신들을 그린것은 아니었다.
다희는 조금씩 젖어가는 눈가에 눈물을 감추려 노력하지 않았다.
명우는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주었는데...

그림은 오히려 간단했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다희를 고려해서 였을까?
아름다운 두 손이 그려져 있었다. 주위가 얼음으로 둘러싸여 무척 추워보이는 손이었고,
조심스레 감싸는 그 손안에는 상처난 심장이 들려져 있었다.
그 심장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며 박동하는 심장같이 신비로왔고, 춥게얼었던 두손은 그 심장에 의해 따뜻히 녹아내리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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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그런 소리를 듣는다.
참 안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다희는 고상, 깔끔, 깨끗하고 모던하며 모든사람이 보기에 완벽한 모습과 인정받는것들을 추구한다.
명우는 될수있으면 자연에 가까운것을 좋아하고, 자기모습이 좋아보이건 아니건 상관치 않으며. 아직도 동문서답을 잘 하고 레이디 퍼스트를 가끔 잊어버린다.

"명우씨!"
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누구 아빠. 라든지. 여보. 자기..등등의 존칭을 쓴다.
그러나 다희는 아직도 그를 명우씨라고 부른다.
"대체 이게 뭐예요? 갈아입힌지 얼마나 됬다고 - 연희바지좀 봐요!"
"아..그거? 좀 전에 메뚜기 잡다가..."
"메뚜기? 넌 여자애가 벌레를 그렇게 좋아하니?"
"벌레 아니야 엄마. 곤충이야."
다희는 못당하겠다는듯 연희를 노려보고, 명우는 재밌다는듯 웃는다.
"오늘. 조폭할머니 보러가는 날이야. 이런 모습. 곤란해."
"다희야."
"아. 내가 지금 그말했어? 미안 명우씨. 우리둘이 하던 말투가 버릇이 돼서... 그나저나. 어머니 좋아하시는 커피 챙겼죠?" 어린 딸 연희는 할머니를 제일 무서워하는데, 조폭여사는 여전하시다. 평생 그 성격. 성질은 고칠수 없는것인지. 다희도 몇대 얻어맞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부딛치며 살고 있다.  그래도 다희는 시부모님과 갈라질 생각은 없다. 명우가 말려도 꼿꼿히  매번 꼬박꼬박 할건 다하고 산다. 

그날도 명우와 다희. 그리고 그들의 딸 연희는 예쁘게 차려입고 시어머님의 생신을 축하하러 집을 나선다. 그들이 사는집은 부산해변가에 있는 예쁜 custom house다. 명우와 다희가 벌어 산 집이 아니다. 민우가 형가족을 위해 디자인하고 지어준 집이었다. 하림과 다희는 친자매처럼 의지하고 붙어지내고 있다.

모든것이 완벽하다면. 거짓말이겠지.
서정이는 끄끝내 이혼을 했고. 지금은 외국에서 공부를 계속 하고있다 한다.
지수와 준기는 결혼을 하고, 쌍동이를 낳아서 바쁘게 예쁜가족을 키우고 있고, 민지는 이제 어엿한 중학생이 되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다희는 명우때문에 자주 화를 내게된다. 자신을 돌아볼줄 모르는 이 남자는 다희가 예상했듯이- 같이 살기 쉬운상대가 아니다. 희생하고도 자신을 구박하는 버릇을 아직 고치지 못해서. 툭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아 넘기고, 힘든일이있어도 다 털어놓고 편해지려 하지않고, 어려울때 혼자만 짐을 지려하고, 아파도 불평할줄 모르며. 피곤해도 쉴줄 모르고 칭찬해주면 불편해한다.  다희는 그에게 툴툴대며 다투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일매일 숙제하듯이 그가 다친데 없나, 상처는 나았나 살펴주고 챙겨준다.  때로는 소독약같이 독한소리로 그의 상처를 쓰리게하는 대신, 사랑의 붕대로 감아주는 일을 계속한다. 그러면서도 다희는 지치지 않는다. 이제는 권태기가 올법도 한 오랜 부부생활을 지냈고, 감정적인 흥분은 지나갔다지만, 명우의 사랑은 끊임없는 공기같이 그녀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는 다희의 비오는날 우산이고,
추운날 호빵이며,
씹을수록 맛이나는 쥐포이고,
아침마다 향긋한 커피다.

더러운 양말이나 냄새나는 런닝셔츠도.
팽팽한 젊음이 사라져 늘어지고 주름이 생긴 얼굴도.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하는 허연 머리카락 끝마디도.
처음 떨리는 맘으로 사랑을 시작했던 그때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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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번째 소설을 드디어 마치는군요...시원섭섭합니다. 이 소설을 사랑하는 저의 남편에게 바칩니다 (우리 남편. 한글도 잘 못읽지만..으하하하하하). 끝까지 용기주시고, 저에게 희망과 힘을 불어넣어주신 글친구님 모두,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함을 쭉..쓰려다가..혹시나 한분이라도 빠질까봐. 그냥 포기할께요.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가서 좋은 글들도 많이 읽고, 글쓰기 공부도 하고, 좀 더 배운다음 돌아오겠습니다.  Happy Ending을 쓰고나니까 좀 유치해진것같은 생각도 드네요. 이래서 여러 작가님들이 잘 나가다 끝에가서 요상하게 말아먹나봐요. 현실성이 떨어질까봐. 유치해 질까봐.  첨부터 그냥 심심풀이 땅콩같은 글을 쓰고싶었습니다. 처음이고, 또 실험적인 글이어서, 그정도면 만족하려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