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직도 내 도움이 필요해?”
“네?”
“저 사람을 아주 잊을까. 다시 사랑할까. 모르겠다며.”

전에도 말했지만 현지원은 기억력이 무지 좋은것같다.

“경험이 없으시다면서요. 도울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너… 나 이용하는거야?”
“네?? 아니..왜 그런 못된소리를!” 너무 놀라고 억울해서 둥그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왜 그사람을 붙잡지 않았어?”
“그건…그게…전 감독님이 걱정이 돼서…”

“저 사람을 믿지못해서는 아니고?”
“…그건……”
“다른 여자가 있어서?”
“그것도 그렇지만…”

“그 여자에게… 그냥 보내주려고?”
“아니 뭐....보낸다기 보다는…”

“음…그냥 보내기는 좀 아까운가보지?”

“에이. 그만하세요. 수사반장도 아니고. 사람일이 그렇게 간단한가요 뭐…?”

“그래? 그럼 너가 얘기해봐. 너가 원하는건 뭐고. 왜 그렇게 복잡한건지.”

그는 참 열심히 내 얘기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마치 친오빠같이 푸근한기분이 들었다.
“재혁이는…재혁이를 보면 너무 아파요. 여기 가슴 한구석이 너무…아프고. 미안한 마음. 미운마음. 그를 잊으려고 애썼던 지난날의 모든 노력이. 너무 허무하고. 지나온 세월이 너무 한심하고…이제 겨우 다 잊었는데.. 또 나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고… 그를 사랑한다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너무…예쁘고?”

현지원을 째려보았다.
“지금 저 놀려요?”

그가. 웃는다.
조금 열받긴 하지만 그의 웃는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가 없이 살아온 지난 4년간…. 내가 뭘 잘못했는지…내가 어떻게 잘못해줬는지. 왜 나를 그렇게 버린건지… 너무 힘들고 혼란스러웠거든요.  그사람… 많이 많이 사랑했는데…그리고 미워했는데, 결국 모두 오해였고, 재혁이는 나한테 잘못한게 하나도 없긴하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차가운거야…?”

“재혁이를 다시 사랑하는게…겁이나요… 불안하고. 나 자신도. 재혁이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또 재혁이는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거든요. 그 여자도 그렇고…전 30년 살아오면서 자랑할만한 일도 없고. 돈도 없고 실력도 없고 집안도 가난하고. 이제와서 다시 사랑을 시작할 자신이 없어요. 재혁이 앞에 있으면 내자신이 너무 초라해서…그에게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예요.”

“그건 당연하지. 그 사람은 너에게 너무 과분하지.”
그를 째려보았다. 아주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는듯한 그의 표정…도와준다더니..

“너는… 생긴것도 보통인데다가 성격도 특이하고… 나이는 먹을데로 먹었고.  겨우얻은 직장에서는 지금 짤릴까 말까 하고… 학생들이 늘 불만이야. 음악선생님이 피아노는 좀 치는데 노래를 너무 못하신다고…”
“뭐예요?”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나를 막 가지고 노네 이 사람이…

“그런데 이주아씨.”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며 나를 놀릴려고…

“너를 보면…삶에 희망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는데…?”
이건 또 무슨소린가 해서 그를 쳐다보는데, 그는 멀리 창가를 보고있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서. 매일 눈을 뜨는게 괴로왔던 사람이 있었는데…기다리다 지쳐서 이제 그만 떠날 준비를 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너를 보고…한줄기 빛을 본것 같았고… 이렇게 오랜세월이 지나서 너를 우연히 만날수 있다면… 그 애도…언젠가 만나게 되지 않을까…”

현지원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보았다.

“그래서 너한테 말하지 않았어. 매일 매일 나를 기억못하고 지나치는 너를 보면서. 나는 조금씩 희망을 키워나갔거든. 지애를 다시 찾을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때. 너에게 말해주려고.”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를 무심코 지나쳐왔던 지난 일년 반,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의 무뚝뚝함이 그런것 이었나?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의…작은 희망?

“이제. 자신감이 생기셨어요?”
“너가 길거리에 뛰어들어 쓰러진날. 김 영석을 찾았어. 지애를 찾아 미국에까지 온사람이야. 지금은 마약과 인신매매로 감옥에 들어갔고.  지애와 한국에서 쭉 같이 살았다고 했어. 감옥에 들어가면서 지애와 연락이 끊겼다고.”

마약과 인신매매…그렇게 무섭고 끔찍한 사람하고 지애가 살았다고…
마음이 아팠다. 현지원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플까…

“그 사람을…오늘 보신거예요…?…많이 힘드셨을텐데…”
“12년동안 저주하고 증오했던 사람을 직접 만나는건…사람이 태어나서 할 일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쉰다.

“큰 짐을 벗은 기분이야. 밤마다 나를 덮치던 엄청난 괴물이. 초라한 죄수가 돼서 내앞에 울고 앉아있으니…기분이 이상했어. 꿈을 꾸고있는것처럼…”
“아주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텐데. 나쁜놈.”

그가 잠시 허무하게 웃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주아야. 너는 초라한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을 믿고. 너도 자신있게 사랑해. 결과가 어찌되든 미리 겁먹지 말고. 후회없이 사랑해야지.”
현지원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손이 내 손등을 만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았다.
호흡을 정리하려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 잘먹고. 몸 관리 잘해. 그런 몰골을 하고 사랑싸움에서 어떻게 이길래?”

꼭…끝까지…

그가 나가는 문가에서 나는 개미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힘내세요… 고마와요.”

그의 뒷모습이 푸근했다.
자신에게 너무나 끔찍하고 험난한 하루였을텐데 그는 나를 더 많이 위로해 주고 떠나갔다.  아니. 더 생각해보니 오늘 그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쓰러져서 내 신세타령을 하며 상처가 곪던 도지던 그냥 퍼져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