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이다.
얼른 머리를 정리하려했으나 이미 늦었다.
별수없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파트 문을 열었다.

“잘 쉬었어?”
재혁이었다.
그는 잠시 나를 보고 웃더니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지나쳐 들어온 그는 몇개의 마켓비닐백을 부엌으로 가지고 가더니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음식거리와 음료수를 냉장고에 정리하더니, 그는 쌓여있는 설겆이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그와 사귈때. 그는 해외공연을 하고도 나를 오랫만에 만나면 우리아파트에 와서 저렇게 음식을 정리해주고 설겆이를 했었더랬다. 정작 그의 집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손버린다고 부엌에 못들어가게 했었는데… 그를 입양한 가족은 미국 상위층의 굉장히 부유한 가정이었다. Dr. Smith 가 어릴때 그의 부모는 둘째를 가질수 없어 평생을 함께 자랄 동생을 구해 아시아 전체를 뒤지고 다니다 어릴때부터 유난히 잘 생기고 똑똑했던, 3살때 부모를 잃은 재혁이를 찾아 입양했다.  한국말을 잊지 않게 하려고 집에 한인식모를 구하기까지했고, 일주일에 한번씩 가족모두 한식을 먹는가 하면, 일년에 한번은 꼭 한국을 방문하는 정말 대단한 정성이었다.

좋은 가정에서 자라난 재혁은 늘 겸손했고 다른사람 도와주기를 좋아했고,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라 해서 자기몸을 사리지 않아 친구가 많았고 또 의리가 최고였다.

그는 멍하니 앉아 지난일을 되새기는 나를 내버려둔채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빨래거리를 모으고,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며 내 아파트를 청소했다.  4년전 그의 모습 그대로…

눈가에 눈물이 고여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는데, 그가 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밥 먹자 주아야. 밥 다 됐다.”
재혁은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가 차려놓은 식탁에 앉았다.
“입맛이 없을거 같아서… 몇가지는 사왔어. 내가 만든게 맘에 안들면. 사온걸로 먹어도 되고…이건 저기 우동집에서”
“재혁아.”
그가 나를 본다.

“어제는…미안했어. 그리고 저번에…”
재혁이 내 눈을 피하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내 밥공기에 놓아주었다.
“밥 먹고. 얘기는 나중에 해. 어서 먹어 주아야.”
그의 정성이 고마와서 입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먹었다.
자꾸 목이 메었지만 그래도 꿀떡꿀떡 삼켜가면서…

음식을 먹고난후 우리는 마주 앉았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았는데 정작 어떤얘기를 먼저 할지. 한참 침묵이 흘렀다.

“혜림씨가…왔었어. 어제. 너가 파혼하자고 했다고…”

“미안해. 나때문에 너도 그렇고 혜림이도 그렇고.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었어.”
“너때문이 아니지. 이제와서 누굴 탓할수는 없는거잖아.”
“어쨌든…잘 지내고있는 너에게 갑자기 나타나서…너를 이렇게 힘들게 한것…미안해.”
“누가 그러니. 내가 잘 지냈었다고.”
처음인것 같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다시 본건.  그의 눈매가 많이 성숙해져 보였다.

“내가 다시 너를 사랑하고 싶다면. 내가 너무 욕심을 내는건가? 너에게 나라는 존재는. 이제 부담스럽고 괴로왔던 과거에 속한거야?”
“재혁아. 지금은 4년전의 내가 아니고. 너도 그때의 너가 아니라는게 사실이잖아.”
“바뀐건 아무것도 없어. 난 너를 그때만큼. 아니. 어쩌면 그때 보다 더 사랑해.”
“바뀐게 없다니. 혜림씨는. 그냥 그렇게 끝난거야? 약혼까지 했다면서. 너무 잔인하잖아.”
그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그에게도 혜림씨는 아직 너무 무겁고 힘든 일인것같다.
“넌…걱정하지마. 나쁜놈은 나니까. 모든 벌은 내가 받을거야. 혜림이에게 상처주고. 내가 어떻게 편할수가 있겠어. 그치만 너를 다시 만났는데.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모두 오해였는데. 어떻게 내가 혜림이와 아무일 없었다는듯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수있겠어? 그녀는 이미 알고있어. 내가 사랑하는사람이 너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