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원이…나를 재혁과 보내놓고 혼자 내 교실을 치웠을 생각을 하니…
여러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궁금하고. 미안하고. 고맙고.
재혁와 내가 왁자지껄 떠들며 웃는모습을 보던 그의 표정도 마음에 걸렸다.

“가보고 싶은곳 있어?”
“….”
“주아야.”

“주아야.  괜찮아?”
“응? 뭐라고 했어?”

재혁이 잠시 날 바라보며 생각하는듯 하더니 싱긋 웃었다.
“어디 가고 싶은데 있냐구.”
“응. 사실은…있어.”
“어디?”
“집에가서. 떡뽁이 만들어 먹고싶어. 우리. 예전에처럼.”
재혁이 활짝 웃었다. “그래. 그럴까?”

우리는 신나게 마켓에서 장을 봐다가 팔짱을 끼고 나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너. 내일 붕대 풀러 간다고?”
“응. 정말 너무 시원할거 같애.”
“내가 데릴러 올께.”
“아니야 재혁아. 내일 학교 끝나고, 버스 한정류장이야. 일부러 올거 없어.”
“나아니면. 누구랑 가려고?”
“뭐?”
“농담이야. 넌 저기 가서 앉아있어.”
“내가 할께.”
“난 너가 도와주는것 보다 맛있게 먹으면서 칭찬해주는게 훨씬 행복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의 재혁. 영영 다시는 사랑할수 없을거라 믿었던 재혁이 내 집에서 지금 떡뽁기를 만들고 있다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때르릉… 그때 재혁의 전화가 울렸다.

“Hello. Yeah. I’m…what? When? Where are you? Okay. I’ll be right there.”
그의 목소리 톤으로 봐서. 분명 좋은일이 아니다.

“왜…?”
“미안해 주아야. Andy가…학교에서 사라진것같아…집에. 안왔다고. 잠깐 가봐야겠어.”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아니야. 내가 연락할께…”

그의 말을 이해할수 있다. 그래. 내가 그의 가족일에 끼어들기엔…
너무…이르지…너무. 안어울리는 사람이지 아직은.

바보같이 까맣게 잊고있었다.
재혁은.
어쨌거나 Andy의 법적인 아버지인데. 왜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있었을까.
4년전의 철없었던 시절과 변함없이. 재혁과 나는 그대로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고 행복해하던 내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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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재혁이 사라지고…그날 밤이 쫄딱 세도록 그를 기다려도... 전화라도 해주지 않을까. 메세지라도… 그런데 다음날 해가 밝도록 아무런 연락도. 아무런 모습도. 볼수없었다.  Andy에게 무슨일이 생긴것일까.. 재혁이가. 또 사라진것일까. 겨우 하룻밤이 지났는데 마음이 온통 쪼그라 드는것처럼 불안하고. 숨통이 막혔다.  이렇게 또 헤어지는건 아닌가? 벌써…이 사랑은 또 끝이난거야?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수없이 눌러도. 아무 소리도. 아무소식도. 없었다.

밤을 꼴딱 세운나는 학교에서 하루종일 아이들과 씨름을 했다.
그날따라 아이들도 무지하게 말을 안들었다. 아마도 내가 헤롱헤롱하니까 아이들이 알아 챈것같다.(아이들은 어른들의 빈틈을 무섭게 알아채린다)

“이주아씨. 나좀 봐.”
몽유병 환자처럼 멍…하니 퇴근길에 복도를 헤매고 다니는 나를 현지원이 돌이켜 세우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네? 아…예…”
그가 오피스 안으로 들어갔는데,

“커피할래?”
“저기…근데 왜 그러셨어요…?”
“뭘?”
“어제 제교실…치우셨잖아요…”
“앉아.”
그는 커피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대답먼저 하세요. 왜 제교실을 감독님이 치우셨냐구요.”
“하도 지저분해서 치웠어. 왜?”
“그러니까 지저분하던 말던 왜 감독님이!”
나도 왠지 모르겠다. 잠이 모자라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현지원을 보니 괜히 또 땡깡을 부리고 싶어졌나..
말도 안돼는것인지 충분히 알면서…

“미안하다고…해야 하나? 늘어놓은거 들켜서 창피했어?”
그가 웃는다.
“왜…나한테 잘해주는거예요. 왜 나같은거한테 자신감 가지라는 말은 하셨고. 왜 사랑하라고 그러셨어요. 저는.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왜 후회없이 살라고 하셨어요. 왜…”

“혼자 드라마 그만찍고. 커피 안마실거면. 앉기나 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 사실 더 할말도. 기운도 없었다.
“너…괜찮은거야?”
“....”

그의 표정이 좀 심각해졌다.
“Andy는 찾았다니까. 걱정마.”

“하……” 갑자기 참고있던 숨통이 터지는 동시에 헛바람 같은소리가 세어나왔다.
“그 사람도… 무사해… 근데 너한테 연락은 당분간…못할거야.”

“…왜요?”
“Andy가 …심한건 아닌데…조금. 다쳤어. 식구들도...충격이 크고.”
“다쳐요? 왜..?”
“어린애가 눈길에 헤매고 다녀서… 동상도 좀 심하게 걸렸고. 넘어진 부상도 좀 있는 모양이야.”
“헤매고 다녀요? 왜요?”

현지원이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그러고 보니 현지원도 밤새 헤매고 다닌사람처럼 눈이 피곤해 보였고, 옷도 어제 옷 그대로 였다.
“근데. 그걸 감독님이 어떻게 알아요…?”

“학교에서 사라진 거니까. 내 책임도 있지.”


그때 갑자기 현지원의 오피스 문이 훌러덩 꽝! 하고 열렸다.
Dr. Smith 였다. 그의 안색이 무척 안좋았는데…
그의 옆에는 금발의 중년 부인이 서있었다.
“That’s her?” 나를 가르키며 묻는다.

“May I help you.” 현지원이 일어나서 그녀앞으로 가는데,
그녀는 현지원을 지나쳐서 나에게로 뚜벅 뚜벅 걸어왔다.

나의 어깨를 두손으로 꽉 잡더니 아주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You! Stay away from my family. DO. YOU. understand me?”
그녀는 나의 어깨를 쓰레기 버리듯 세개 밀쳤다.

분노하는 그녀를 Dr. Smith 가 진정시키며 오피스 밖으로 인도했고,
곧 그가 우리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Mother is very angry right now. She’s besides herself…
Andy ran away because he found out about 혜림’s broken engagement.
She was everything to him.  She was the closest thing to a mother to him.
And 혜림… was like a daughter to my mother. I hope you understand…”

충분히 이해가 간다. 혜림은 재혁을 사랑한것 뿐이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를 포용한 여자였다.
재혁의 어머니도 그녀를 딸같이 사랑했고, 어려서 엄마를 잃은 Andy도 그녀를 엄마같이 의지했을것이…당연하다.
다시한번 나는 비참하게 이기적인 내모습을 발견한다. 재혁이도 굉장히 미워진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할수있었는지…

Dr. Smith의 차가운 시선이 마음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세상 모두…나를 미워하고.
재혁은 내 곁에 없다.

바닥에 풀석 주저앉았는데,
현지원이 내 어깨를 잡고 나를 천천히 일으킨다.

방금전 거친손과는 달리…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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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서 붕대를 풀르고, 집에 돌아올때까지 현지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다 코를 풀다가. 또 멍하니 고개를 창가에 박고있는 나를.
그는 가만 내버려뒀다. 그저 병원에 데려다 주고, 집안 소파에 앉혀주었다.

“왜…내 옆에 있어요?”
그가 말없이 나를 본다.

“왜 나같이 못되고 이기적이고. 바보같고 한심한 사람옆에 있냐구요.”
그는 내 곁에 앉았다.

“감독님이 보시기에도 제가 파렴치하지 않아요? 어떻게 내 사랑를 하겠다고 약혼을 파혼시키고. 어린애한테까지 상처를 주고...정말 어이없고. 한심하고…”

“우리…짜장면 시켜먹을까? 배고파 죽겠는데. 이렇게 생긴 널 데리고 식당에 갈수도 없고…”

기막혀...

“내비두고 혼자가서 드세요.”
“그럼…맛이 없을텐데…”

어이가 없어서 헛 바람이 나왔다.

“넌 짬뽕 먹을래?”
그를 째려보았다.
지금 짜장면 짬뽕이 문제야?

“알았어. 그럼. 너도 짜장면 먹어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전화를 걸어 짜장면 두개를 시킨다.

“감독님. 지금 저 놀려요? 지금 제가 짜장면 먹게 생겼어요?”
“사람 사는일. 다 거기서 거기야. 그렇게 심각해 할필요 없어.”
“감독님도 책임 있다는거. 아시죠.”
“책임? 그래. 알아.”
“아시긴 뭘 또 아신다는 거예요?”

“너를…홀애비한테 보내긴 좀 아까운데… 그생각을 못했어.”

이건 또 무슨소린지.
그가 날 쳐다보더니,

“좋은데로 시집가야지. 너 나이 꽉찼다고 아무데나 갈 생각 하지마.”
이제 그가 무척 얄밉다.

“저같은걸 누가 데려간데요. 평생 혼자 늙어죽을테지요.”
“그래…결혼 적령기도 지나갈랑 말랑 하는데. 정말 큰일이다.…”
“남말 하시네요?”

그가 웃는다.
왜그럴까. 그가 웃으면 괜히 마음이 놓인다.

“난 어려보여서 괜찮아.”
“참 좋으시겠어요. 혼자 그렇게 착각하며 사시면.”

“너 내가 만만하니?”
“감독님이 절 자꾸 놀리시잖아요.”

띵동.

“와. 짜장면 벌써 왔나?” 현지원이 일어서서 문을 연다.
짜장면 배달원이 아니다.

초췌해진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마주친채. 한동안 아무말도 주고받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일때문에 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럼. 왜 여기에 계시죠?”
현지원이 잠시 생각하는..


“당신은 왜 오셨습니까?”  현지원의 질문에 재혁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무슨… 뜻이죠.”

“그만해요.” 내가 일어섰다.

“이만 가보시죠.” 재혁의 목소리가 차갑다.

“그래요. 가죠. 그런데.”
두남자의 눈에서 번개가 번쩍일듯 날카롭다.
“사랑은. 욕심하고 다른겁니다. 혼자만 행복하고. 많은사람이 힘들어한다면. 사랑이 아닐수도 있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재혁이 현지원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렀는데…
재혁은 마음이 여리고 따뜻하지만. 감정이 폭발하면. 잘 참지 못할때가 있다.  이렇게 무너지는 그의 모습을 보면 더 내 마음이 부서진다.
“재혁아!” 얼른 뛰어가 현지원을 붙잡는데, 현지원은 내 손을 조용히 밀고 일어섰다.

“당신이 뭔데.” 재혁의 목소리가 비참하기에 이르렀다. 내 눈시울이 붉어진다.

현지원이 한숨을 쉬고.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필요하다면... 주아에게 이용당할수 있는 사람.”

“뭐?” 재혁의 얼굴이 찡그러진다.
“그냥. 도구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눈으로 볼거 없어요.”
현지원이 재혁을 지나쳐. 문밖으로 나간다.

“감독님!”

재혁이 나를 돌아보는 표정이 아프다. 비수를 꽃는것처럼 내 마음이 아프다.

“주아야. 넌. 저 사람이 필요하니?”
내가 아무말 못하는데…
“저 도구같은 사람이. 필요하냐구.”

“재혁아. 그만해. 감독님은.  날 도와주신것 뿐이야. ”
“그래. 그럼 가시라고 해. 이제 다 썼으니까. 필요없다고 해.”
현지원이 참을만큼 참았다는 표정으로 재혁을 돌아본다.

 “재혁아. 너 왜그러니? 너 힘든거 알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현지원이 눈을 잠시 감고 생각하더니,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지, 나를 잠깐 돌아다 본다.

문을. 닫았다. 마음아프게 돌아선 현지원을 생각하니. 문을 닫는 내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지지만…

재혁이가 괴로운듯. 머리를 붙잡고 벽에 기대어 선다.
“미안해 주아야…”
“아니야 재혁아. 내가 미안해.”

“주아야…내가…잘못하고 있는거. 알아. 혜림이를 버리면. 가족모두에게 배신이라는거… 그런데 너를 포기할수가 없었어. 거짓말하면서 평생 살고 싶지 않았어.”

그래… 재혁이는 모두에게 붙잡혀 있었다. 아들로써. 아버지로써. 주희가 그 예전에 풀어놓은 덫에서. 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영원히 빠져나올수 없는. 죄수가 된것처럼 그는 이제 혜림씨와. 가족과. Andy에게 완전히 속해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만은. 그를 놓아줄수 있다. 아니. 놓아줘야 한다.

“버리지마. 날 위해서.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고. 알았어? 사랑은 버려도. 그 바보같은 감정은 버려도. 사람은 버리는거 아니야. 특히 그 사람이 가족이고. 약혼녀이고. 그리고…아들이면. 버리는거. 아니야.”
“주아야. 너까지 이러면. 나는 정말로 갈곳이 없어. 붙잡을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혜림씨를 붙잡아. 이제. 너무 늦었어. 나는 너를 받아줄 힘이 없어.”

재혁이 눈을 감는데…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의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짜장면 배달이요!”

와…정말 대단한 타이밍. 이런 심각한 순간에… 올것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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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혁을 보내고 혼자 짜장면 두 그릇을 다 먹었다.
아무생각없이 짜장면이 독약이듯. 이걸 먹고 죽을각오로 두 그릇을 먹었다.
덕분에 다음날은 배탈이와서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띵동.
벨이 울리고. 나는 문을 열지 않고.
띵동.
또 벨이 울리고. 나는 문을 열지 않고.

조용히 한두시간이 지난것 같다.
오후 늦게나 지나서. 잠시 바람이나 쐴까…하고 문을 열었는데.

현지원이 벽에 기대 서있다.

“감독님…”
“너 짤리고 싶어서 환장했어?” 그의 지친 목소리가 마음 아프다.
내가 미안해서 사과를 할라 치면. 꼭 현지원은 이렇게 먼저 화를 낸다.

“…아픈데…어떻게 해요.”
“지난 한달간. 며칠을 결석했는지. 알아?”
그가 쪼끔 야속하게 느껴질라 하는데.

“오래…기다리셨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할일은 하고 살아야지. 이렇게 막 하고싶은데로 할거야? 너가 어린애야?”
“그래요. 잘못했어요. 그렇게 절 혼내고 싶어서 몇시간을 이 밖에 서 계셨어요?”

그가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뭔가 할말이 있는것 같은데.

“감독님.”
“지애를…찾은것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