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쿵. 하는소리가 병실 문바깥쪽에서 들렸다.
누가. 왔나? 싶어 문을 열어봤는데,
급하게 뒤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금새 코너를 돌아버려 잘 볼수없었지만. 왠지 직감이 왔다.

그를 따라 뛰어가보니,

“재혁아…”

재혁이가. 여길 어떻게 왔지? 나의 말을 들은것인가… 지금. 현지원만 보인다는 나의 말을…
그가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어두웠지만 흐릿하게 젖은 그의 눈가가 보인다.

“재혁아…너가 어떻게…”
그는 아무말 없이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아주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걸어나갔다.
“재혁아!”
내가 불렀으나 그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더 급하게 따라가려고 하자,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터벅…터벅…생각에 잠겨 걸으며 생각했다.
재혁이가…어떻게 알고 여기에 왔을까.
아까 낮에부터…나를 따라다닌건 아니겠지.
내가 한 소리를 다 들었다면… 내가 왜 그를 찾아갔는지 알았다면…
고개를 내 저었다.
재혁의 가슴에 내가 줬을 상처를 생각하니, 제발. 내 상상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렇지만…여길 찾아왔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현지원의 병실문을 열었다.

“누가…왔어..?”
“아니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었어요.”

현지원과 내가 할말을 잃고 서로 마주보았다.
그런데…
내 심장이 갑자기 펄쩍펄쩍 뛰었고, 혹시라도 심하게 고동하는 내 심장소리를 현지원이 들을것같아,
나는 급하게 옆에있는 물병을 들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현지원이 풋..하고 웃더니, 그것도 아팠는지 얼굴을 찡그린다.

“더 다치게 내비둘걸. 제가 괜히 쫓아다녔죠? 경찰이 그때 도착안했음. 지금 그렇게 앉아있을수나 있었겠어요?”
괜히 심술을 부렸다. 혹시나 내 속마음을 들여다 볼까...

“…미안해.”
“뭐가요.”
“너 말대로.  너가 번번히 경찰을 불러다줘서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는것이고. 그래. 너 똑똑하고 순발력있어. 그리고…너는 로보트가 아니니까. 내가 불쌍하겠지… 걱정도 되겠지. 너는 내 가족도 아니고, 난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한테 너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너를 지켜줄수없는 지금. 내곁에 널 두고싶지 않은거야. 그래서 그랬어. 미안해.”

얼굴이 화끈했다. 이제는 아예 심장이 방방 뛰며 점프를 해댔다. 내 가슴을 보면 벌렁거리는게 보일정도로…

“그럼. 어서 낫기나 하세요. 절 지켜줄수있도록. 빨리 일어나시라구요.”
내 뻘게진 얼굴을 그가 보기전에 서둘러 돌아서서 병실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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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잔소리를 안들으려고 학교를 일찌감치 다녀와서 현지원의 퇴원절차를 밟았다.
지애와 친척아주머니란 분도 함께 오셨는데,
많이 다친 현지원을 보고, 모두 마음아파했다.
이 싸움은. 얼마나 오래가야 하는지.
한달이라는 시간안에 그 큰돈을 어찌 마련해야하는지.
힘도없고 능력도없는 내 자신이. 우리 모두가… 답답한 심정이었다.

모두 무거운 맘으로 택시를 타고 현지원의 집에 도착을 했는데,

어? 현지원의 차가 주차장에 세워져있다.
소름이 쫙 끼쳤다.
혹시…

서로를 바라보며 여자들이 놀라움을 금치못하고 우물쭈물하는사이, 현지원은 아파트문을 향해 먼저 걸어갔다.
우리도 곧 그의 뒤를 쫓아 들어갔는데…
“오빠! 조심해! 혹시..” 지애가 그를 따라 뛰었다.

현지원의 아파트 정문에 테이프로 차 키와 주민등록증이 붙여져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편지가 하나 덜렁 딸려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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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

현지애의 모든 빚을 갚았으므로
앞으로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현지원과 만나지
않는다고 우리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음.

블루밍 직원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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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랗게 찍은 빨간 도장과 찍찍 그어놓은 싸인이 보였는데…

“이게…어떻게 된거야?”

모두 할말을 잃고 멍하니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현지원이 이상한듯.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는데,

“여보세요…. 나 현지원인데….”
그가 잠시 듣고있더니, 곧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전화를 내려놓았다.

“뭐래요?” 세여자가 한꺼번에 물었는데,

“돈을…받았데.”
“누구한테요?”
“그냥. 끊어졌어.”

너무나 이상하고. 또 믿기지가 않아서 우리는 기뻐할 일인지. 아닌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어떻게 된거지..? 누가…” 지애가 기쁨반. 의심 반으로 목소리가 떨리는데…

순간. 병원에서 만났던 재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재혁이가?

“끝난건가봐. 하나님이. 도우셨나봐. 차도 돌려주고. 다신 안본다는 각서도 여기 있으니. 끝난거잖아?”
친척 아주머니가 코끝이 빨개지셔서 기쁜눈물을 훔치셨다.

현지원은. 무슨 직감이었는지, 나를 물끄러미 돌아보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웃는얼굴로 지애와 손을 마주잡았다.
어찌됐던간에  이제 지애와 현지원이 그 깡패들의 손아귀에서 풀려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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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혁의 집에 찾아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분명히. 재혁이인것 같은데. 그 큰돈을 그렇게 빠른 시일에 해결할수있는 사람은…
혹시…재혁이가 아니었는데 내가 괜히 또 들쑤셔놓는건 아닐까…

터벅터벅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돌아왔는데,
재혁이가 내 문앞에 기대고 서있었다.

“재혁아!”
그가 나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재혁아. 너… 여기서 뭐해…?”
“뭐하긴. 너 기다렸지.”
“혹시…너가…그랬니?  너가 도와준거야...?”
“뭘?”

뭐라고 해야하나…?

“내가 뭘?”

“너…어제 병원은…어떻게 알고 왔던거야?”

“야…춥다…나 여기서 너 기다린지 한시간정도 됬거든.” 그가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미안…들어가자.”

나는 서둘러 문을 열고 재혁과 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는동안 재혁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빚 갚아준사람…너 맞지…?”
커피를 내려놓으며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빚?”
그는 커피를 마시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 찾아갔을때… 내 뒤를 밟은거야…? 현지원이랑…깡패들이 만나는거…봤어…? 그래서 병원까지 따라왔던 거야?…”

“추리소설 써? 무슨소린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는. 아직도 내 눈을 마주보지 않았다.
“재혁아…”

“혜림이하고…결혼하려고 해.”
그제야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들고있던 커피잔을 떨어뜨릴뻔 했다.

“축하해 줄거지…?”
그가 미소짓는것이 더 마음이 아팠다.

“그걸 담보로…어머님이 돈을 주신거야…?”

“혜림이. 좋은여자야. 그래서 결혼하려고 해. …이제 마음 편하게 살려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또 다시 실없이 웃었다.

목아래에서 무거운것이 넘어왔다.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손이 떨려서 급기야 커피잔을 떨어뜨렸다.

깨진 찾잔을 향해 얼른 손이갔는데, 재혁의 손과 부딫혔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보았고…
재혁은 그제야 가짜미소를 거두었다. 그의 눈이 투명하고 맑았다. 그는 눈물을 애써 짓누르고 있었다.

“주아야… 너. 그사람 사랑하지?”
눈이 따가왔다. 코끝이 찡해지며 입술이 떨려 꽉 깨물어버렸다.

“그래…말 안해도 돼. 그럴줄 알았어.”

무슨말이라도 해야하는데…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야 겠다. 준비할 일이 좀 많아서.”

“재혁아.” 그의 손을 잡았다.
“현지원씨…정말 많이 다쳤어. 너도…그 깡패들 봤다면 알겠지만…그냥 놔두면. 죽을것같았어. 너한테 찾아간건…정말 미안해.”
“…알아…”
“그리고 정말…고마와. 현지원씨도…이 사실을 알게되면.”
“말하지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지 않으려고 애써 내 눈길을 피했다.

“내가 준거라고. 말하지마. 그건. 내가 싫어.”

“…왜….”

“니 말이 맞아. 널 따라갔었어. 하지만 난 현지원을 도우려고 그런게 아니야.”

그의 표정이 냉정했다.

“현지원이 맞아죽던 말던 나는 상관없거든. 근데…너가 그 사람이 가여워서. 힘들어하니까 곁에 있는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갚아준거야. 그 사람 편해지면. 너가 자연히 멀어질수도 있으니까.”

재혁이는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재혁이는 힘든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그게 아니더라고. 너가…그 사람만 보고 있더라고. 그 사람을. 눈물흘리며 걱정하고 있었어. 나한테 도움을 청할정도로…넌 몰랐겠지만. 그 사람은. 오래전부터 너만 보고있었는데… 너가 나때문에 혼란스러워 할때도. 늘 거기에 있었지. 이젠 너도 그사람만 보고있으니... 그러니 이제… 두사람사이에. 내가 설 자리가 없어졌어.”

“재혁아. 그건…”
“그리고. 너가 나한테 다시 돌아온다해도…나도 이제는 혜림이를 버릴 자신이 없고.  혜림이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이젠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걸…내 마음이 어쨌든. 그런건 이제 상관없으니까.”

마음이 아프다. 재혁이는 결국 행복할수있을까…사랑할수 있을까…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혜림씨를 위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면…너무 슬픈거쟎아… 결혼은...그렇게 하면 안돼는거잖아...

“주아야… 난 괜찮아. 그리고…슬프게 생각하지 않아. 운명이란거. 그리고 인연이란거. 이제 받아드리려고 해 …”

재혁이의 미소가…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더 마음 아프다.

“그냥…믿고 의지하는거. 서로를 지켜주고 도와주는거… 사랑이란건. 그런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함께 서로 받아주고. 믿어주고...그렇게 평범한게 사랑일지도 모른다고…내가 널 원했던건. 현지원이 말했던것처럼. 욕심인지도 모르니까.”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 왔다는걸 직감할수있었다.
나의 첫사랑.
나의 하재혁.. 잡으려고 하면 꿈에서 깨어날듯. 언제나 내가 가지고싶었던 사랑.

“그래… 재혁아…우리 사랑은. 우리가 너무 가지고싶었던… 꿈이었나봐. 꿈에서 배부르게 먹어도...깨어나면 배고픈것 처럼...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현실이 될수없는.. 그런 꿈이었나봐.”

재혁이 다가와 내 입술에 조용히 키스했다.

“안녕 이 주아…”

안녕…하재혁.